마이스토리 33화. "한국 가족은 나의 힘"…친가족 만나 상처 보듬은 벨기에 입양동포

YTN 2023. 7. 2.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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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리 / 벨기에 입양동포]

안녕하세요. 선 리입니다. 저는 한인 입양인이고 1984년 3살 무렵에 입양됐습니다. 그래픽과 예술을 전공했고 지금은 그래픽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습니다.

입양 후의 삶은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은 만나지 않지만, 당시 양어머니는 항상 저에게 '난 널 원하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저를 입양했을 때 아버지는 다른 여자분이랑 살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양어머니가 저를 갑자기 떠안게 된 거죠.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아버지는 다시 결혼하셨어요. 새어머니랑은 정말 잘 지냈어요. 새어머니를 저의 어머니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머니는 카메룬 분이세요. 가족 구성이 참 다양했죠. 정체성 문제는 늘 저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이 백인이셨잖아요. 학급에서도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보니 용의 아들, 칭총이라는 별명이 있었죠. 지금은 괜찮지만 어렸을 때는 그런 것들이 저를 힘들게 했어요.

1987년부터 올림픽과 함께 한국이 알려지게 됐어요. 올림픽을 시청했던 기억이 나요. 한국에 대한 반항심이 컸던 시기였어요. 벨기에나 프랑스를 응원했지, 한국은 전혀 응원하지 않았어요. 마음이 아프기도 했고 나를 버린 상대에 대해 존중할 마음이 없었던 거죠.

처음 남동생을 봤을 때 바로 알아챘어요. 너무 감동적이어서 눈물을 쏟았죠. 처음 남동생을 만나 같이 놀고 소주도 마시고 호텔에서 같이 자고 다음 날 아침에 엄마를 만나러 갔어요. 음식을 어마어마하게 차려 놓으셨더라고요. 정말 좋았어요.

엄마를 만나자마자 울었던 것 같아요. 처음 만나서 10분 동안이나 계속 안고 울었어요. 친아버지는 1980년대 시위 도중에 돌아가셨다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어요. 엄마를 만나기로 했을 때부터 제 마음속에서 엄마를 진작에 용서했었어요. 사실 용서할 필요도 없어요. 엄마를 탓할 수 없잖아요. 당시 한국은 정말 가난한 나라였고 여성 혼자 아이를 키우는 걸 아주 안 좋게 봤거든요. 엄마가 저를 버렸다기보다는 나라가 버린 거로 생각해요. 당시 문화와 인식들이 엄마를 그렇게 하도록 강요한 셈이죠. 가족과 다시 만나고 그 만남이 잘 이어진다면 삶의 구멍들을 메꿔주더라고요. 삶의 공허한 부분들이 있었는데 정확히 그게 뭔지를 몰랐어요. 지금은 알아요. 가족과 만난 뒤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은 것 같아요.

첫 번째로 입양기관에 연락해야 해요.

하지만 반드시 마음의 준비도 하길 바라요.

입양인이 친가족을 찾고 싶을 때 생각해야 할 부분은 친가족이 만남을 거절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에요. 이 부분을 미리 인지하지 않으면 친부모가 거절했을 때 삶이 크게 힘들어질 수 있어요. 아이를 버렸다는 것은 친부모에게도 트라우마라고 생각해요. 원해서 그랬다기보다는 사회의 시선과 문화적인 차이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그들도 쉽게 잊어버리고 살아온 게 아니라 아이 없이 살아내느라 긴 싸움을 했을 거예요. 그걸 이해할 수 있어야 해요. 친가족이 나를 피한다고 미워만 하는 게 아니라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를 해보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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