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닮은 로봇 '에버6', 국립극장서 지휘자로 데뷔하다

장병호 2023. 7. 2.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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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Ⅳ '부재'
국내 최초 로봇이 지휘하는 음악 공연
완벽한 박자, 연주자들 따라가기 힘들기도
최수열 지휘자 "로봇 통한 인간의 교감 인상적"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로봇이 어떻게 등장하는 걸까? 무대 옆에서 나오나?” “지휘봉은 어떻게 들고 있을지 궁금하네.”

지난달 3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Ⅳ ‘부재’ 공연을 앞둔 객석은 평소보다 들뜬 분위기였다. 이날 국내 최초 로봇이 지휘하는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관객은 모두 1200여명.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텅빈 무대 위에 로봇이 어떻게 등장할지 궁금해하면서 공연 시작을 기다렸다. 로봇을 보기 위해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 관객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국립극장에 따르면 이날 공연은 로이터, AFP, CNN 등 해외 언론도 취재를 요청할 정도로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지난 3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Ⅳ ‘부재’의 한 장면. 로봇 지휘자 ‘에버6’ 무대에 등장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국립극장)
공연이 시작하자 국립국악관현악단 단원들이 하나둘 무대에 올라 자리에 앉았다. 이번 공연의 지휘자는 한국생산기술연구원에서 개발한 인간형 안드로이드 로봇 ‘에버6’. 무대 앞 오케스트라 피트를 통해 ‘에버6’가 등장하자 객석에선 탄성과 함께 박수가 쏟아졌다. ‘에버6’는 상반신을 180도 회전해 관객에게 정중히 인사를 한 뒤, 양팔을 힘차게 들어 올려 지휘를 시작했다.

1부에서 ‘에버6’가 연주한 곡은 ‘깨어난 초원’(작곡 비얌바수렌 샤랴브), ‘말발굽 소리’(작곡 만다흐빌레그 비르바)였다. 두 곡 다 몽골 출신 작곡가의 곡으로 국립국악관현악단이 2012년 몽골과의 예술교류 사업의 일환으로 초연한 곡이다. 대륙의 기상을 담은 곡답게 빠른 박자의 연주가 돋보였다.

‘에버6’는 그 어떤 지휘자보다 정확하게 박자를 셀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현재의 기술로는 음악을 직접 들으며 연주자들과 소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날 무대에서 ‘에버6’는 사전에 짜여진 프로그램대로 지휘를 이어 나갔다. ‘깨어난 초원’과 ‘말발굽 소리’를 선곡한 이유 또한 정확한 박자가 중요한 곡이기 때문이다.

공연을 앞두고 진행한 연습 공개에서 최수열 지휘자는 “아직은 지휘자보다 지휘 동작을 하는 ‘퍼포머’에 가깝다”라며 “박자는 완벽하지만 이로 인해 연주에서 ‘오류’가 발생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지휘자와 연주자가 주고받는 ‘호흡’을 ‘에버6’는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다. 이날 공연에서도 연주자들이 ‘에버6’의 완벽한 박자를 따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 연주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몇몇 부분에서 박자가 어긋날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도 있었다.

지난 3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Ⅳ ‘부재’의 한 장면. 로봇 지휘자 ‘에버6’가 지휘를 하고 있다. (사진=국립극장)
2부에서 ‘에버6’는 최수열 지휘자와 함께 무대에 올랐다. 이번 공연을 위해 손일훈 작곡가에 위촉한 신곡 ‘음악적 유희 시리즈-감(感)’(이하 ‘감’)을 초연했다. 악보 없이 손일훈 작곡가가 정리한 음악 노트에 따라 즉흥적으로 연주되는 곡이다. ‘에버6’가 손일훈 작곡가가 정한 규칙대로 박자를 세는 동안, 최수열 지휘자는 연주자들에게 즉흥적으로 연주를 지시하며 로봇과 인간이 공존하는 무대를 만들어 나갔다.

이번 공연은 ‘로봇이 지휘자를 대체할 수 있을까’라는 호기심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실제 공연은 역설적으로 로봇이 아직은 지휘자, 나아가 사람의 예술활동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음을 보여줬다. 최수열 지휘자 홀로 지휘에 나선 가야금 협주곡 ‘침향무’(작곡 황병기), ‘영원한 왕국’(작곡 김성국)이 그러했다. 최수열 지휘자는 로봇의 완벽한 박자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호흡’을 보여줬다. ‘영원한 왕국’에선 감정에 북받친 듯 격정적인 지휘로 연주자들을 통솔하며 지휘자의 필요성을 증명해 보였다. 최수열 지휘자는 공연을 마친 뒤 국립극장을 통해 “교감할 수 없는 존재인 ‘에버6’를 매개로 연주자들끼리, 사람과 사람이 서로 더 교감하려 노력한 것이 인상적이었다”는 소감을 전했다.

로봇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보다는 일종의 이벤트에 가까운 공연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와 상관 없이 새로운 시도 자체가 예술로서 의미가 크다는 것이 국립국악관현악단의 생각이다. 여미군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 직무대리는 “투자를 통해 지속적으로 실효성이 있는 가치를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예술은 그런 결과가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일단 가보는 것이 중요하다”며 이번 공연의 의미를 밝혔다.

지난 30일 서울 중구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열린 국립국악관현악단 관현악시리즈Ⅳ ‘부재’의 한 장면. 최수열(왼쪽) 지휘자와 로봇 지휘자 ‘에버6’가 같은 포즈로 등장해 관객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국립극장)

장병호 (solanin@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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