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의 아들 마르코스, 친미·탈중 외교의 집권 1년은? [박종현의 아세안 코너]
내·외부 정책 ‘전임자 지우기’로 채워
친미·반중 외교, ‘마약과의 전쟁’ 변화
“식료품값 상승, 농산물 부족은 위기”
“아버지가 아니라, 행동으로 나를 판단하라.”(취임 당시 발언)
“1주일에 100페소(약 2400원) 버는 아이들이 아니라, 더 큰 범죄자를 추적해라.” (집권 초기 지시)
“미·중국 사이에서 (미국 측에 더 기울러진)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데, 필리핀에 도움이 될 것이다.” (취임 1주년 평가)
취임 1주년을 맞은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관련된 주요 평가와 발언이다. 평가와 발언은 시간 순으로 나열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지난해 6월 30일 마닐라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취임식을 통해 정식으로 임기를 시작했다. 시민혁명으로 추방된 독재자의 아들로, 이름도 같은 2세의 등장이었다. 좀처럼 오욕의 역사가 청산되지 않은 필리핀에서 가장 논쟁적인 가문의 재등장이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제17대 대통령으로, 임기는 6년이다. 부친은 1965~1985년 대통령을 지냈다.
선거에서 승리한 아들 대통령은 “(아버지를 포함한) 조상이 아니라, 나의 행동과 정책으로 나를 판단하라”고 요청했다. 임기 6년 가운데 1년을 마친 그가 그동안 보여준 것은 무엇이었으며, 스스로는 어떻게 평가했을까.
마르코스 대통령은 인플레이션 등으로 경제적 어려움이 예상되는 가운데 집권 2년차를 시작하게 됐다. 마르코스 대통령도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최근 기자회견에서 “무역, 지정학적 측면에서 국제적 환경이 변하고 있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며 “우리 정부도 국제상황 변화에 맞춰 움직이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성공적인 경제는 민첩하고 유연한 경제라고 할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위한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다”고 자평했다. 그의 취임 1주년을 즈음한 시점에 내놓은 필리핀 언론을 포함한 외신의 평가는 대략적으로 이랬다. 친미·탈중 외교행보, 인플레이션과 경제 성장 혼재, 투자유치 약화, 전임자 지우기로 채웠다.
역시 눈에 띄는 것은 외교정책 변화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취임 직후 전임자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외교정책을 폐기했다. 그의 외교정책은 지난해 7월 첫 국정연설에서 공개됐다. 자주적·독립적 외교방향에 방점이 찍힌 연설이었다. 그는 그러면서 1cm의 필리핀 영토도 내놓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전임자의 친중 정책을 폐기하고, 미국에 기울어진 외교행보를 펼치며 미·중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펼치는 모양새를 보여왔다. 일종의 실리외교 모색이었다. 그로서는 과감한 시도였다. 그는 두테르테 전 대통령의 정치적 자산을 물려받은 딸 사라 두테르테와 정·부통령 ‘러닝 메이트’를 이뤄 당선됐기 때문이다.
실리·균형 외교의 사례로는 지난 2월 미국에 군사기지 4곳에 대해 추가적인 사용을 허용한 조치가 꼽힌다. 당시 조치에 대해 필리핀이 미·중 패권경쟁 또는 나아가 패권전쟁과 관련하여 특단의 전략적 선택을 결정했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였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앞서 1월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와 회동하며 양국의 긴밀한 관계를 확인한 터였다.
필리핀 내부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레나토 데 카스트로 국제문제 분석가는 ABS·CBN뉴스와 인터뷰에서 “마르코스 대통령의 해외 순방, 미·필리핀 방위지침 창설, 서필리핀해에 대한 강력한 입장은 정부가 미·중 긴장관계에서 장기적으로 국익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집권 1주년을 넘긴 마르코스 대통령이 중국과는 경제관계를 강화하면서 미국과 일본·호주 등과는 안보관계를 강화해 균형외교 목표를 달성하려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보여준 전임자와의 단절 의지는 ‘마약과의 전쟁’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전임자 두테르테 전 대통령 재임 당시엔 마약과의 전쟁으로 3만 명이 넘는 사람이 숨졌다. 많은 언론인과 시민운동가도 살해됐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필리핀의 인권위기 상황에서 취임한 셈이었다. 그는 마약은 전쟁 대상이 아니라 예방 대상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면서 경찰을 향해서는 “매주 100페소(약 2400원)를 버는 아이가 아니라 더 큰 플레이어(범죄자)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약과의 전쟁에 변화를 주면서 사망자 수치가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그가 취임한 이후에도 마약과 관련돼 숨진 사람은 300명이 넘었다. 그는 전임자의 마약 대응과 관련해 국제형사재판소(ICC) 조사에도 협조하지 않고 있다. 필리핀 자체 내 조사에도 별다른 진전이 없는 상태다.
필리핀의 언론환경은 그의 취임 이후 일부 개선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언론을 향한 폭력적인 공격이 줄어들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려가 된다는 평가였다. 그의 집권 이래 필리핀의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전체 180개국 가운데 132위를 기록했다. 1년 전 147위에서 15단계 올라간 것이다.
◆ 인플레이션 상존과 식량안보 문제
필리핀 내에서는 경제문제가 뜨거운 이슈다. 경제의 지속적인 성장 여부가 무엇보다 관심을 받고 있다. 필리핀은 지난 상반기 인접국에 비해 비교적 건실한 경제성장 흐름을 보여 왔다. 강력한 소비력을 성장동력으로 삼아왔지만, 세계 경제의 침체 국면은 상시적인 위협요인이 되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의 지지율은 높은 편이다. 이를 정치적 자산으로 삼아 투자 촉진과 일자리 창출, 공급 증대, 물가·금리 안정 기조를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식량안보 문제도 중요하다. 식량안보는 최고통치권자의 상시적 과제다. 농업 부문을 관장하는 내각의 힘도 필리핀에서는 강력하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농업부 장관을 겸임하고 있다. 전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식량 생산의 자급자족을 목표로 내걸며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마르코스 정부는 양파, 설탕 등 식료품 부족 사태를 겪었다. 지난해 선거운동 과정에서 쌀 가격을 1kg에 20페소로 낮추겠다고 공약했지만, 당시에도 비현실적인 공약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을 정도로 상황이 좋지 못하다. 지금도 이 공약은 달성되지 못한 상태다.
기상이변과 아프리카 돼지 열병 등으로 식량안보를 위협하는 요인은 상존해 있다. 쌀값마저 상승하고 있어 곡물가격을 안정화시키겠다는 마르코스 대통령의 공약이 이행될지 의심하는 시각도 짙어지고 있다. 이는 농업과 농산품 물류 분야에 혁신적인 대책을 주문하는 목소리가 커지는 원인이 되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해외 순방 등을 통해 각종 투자 약속도 받았다. 하지만 필리핀의 2022년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전년도에 비해 23%포인트 줄어든 상태다.
미·중 갈등으로 각종 경제공급망 사슬이 움직이거나 해체되는 상황도 챙겨야 한다. HSBC 홀딩스의 아세안 경제 전문가 아리스 다카네이는 “세계적으로 공급망이 이동하고 있으며 필리핀은 이 추세가 진행되는 중심에 있다”며 “이 추세를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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