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하늘 물들인 '보랏빛 아미'… 도시 콘텐츠가 소비 살린다

김기정 전문기자(kijungkim@mk.co.kr) 2023. 7. 2.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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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상품으로 떠오른 도시
그룹 방탄소년단(BTS) 데뷔 10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12일 서울 랜드마크들이 BTS를 상징하는 보랏빛으로 물들어 있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남산서울타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롯데월드타워, 반포대교. 연합뉴스

지난달 12일 오후 남산서울타워, 서울시청,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등이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방탄소년단(BTS)의 데뷔 10주년을 하루 앞두고 서울 랜드마크들이 BTS 팬클럽 '아미'의 상징색인 보라색으로 바뀐 것이다. 서울 여의도 한강공원에서 열린 'BTS 페스타'에는 40만명이 몰렸다. 이 중 해외에서 온 BTS 팬도 12만명에 이른 것으로 추산된다. 당장 경제 효과가 나타났다. 여의도 콘래드, 페어몬트 앰배서더, 켄싱턴호텔 등은 만실을 기록했다. GS25, CU 등 행사장 인근 편의점도 특수를 누렸다. 여의도 더현대서울과 IFC몰도 BTS 팬들로 북적였다.

더현대서울을 운영하는 현대백화점 관계자는 "BTS 기념 행사를 진행한 지난달 12~17일 외국인 매출이 1년 전 같은 기간 대비 515.8% 늘어났다"고 밝혔다.

여의도뿐만이 아니다. 용산 아모레퍼시픽도 BTS 소속사 하이브(HYBE) 사옥 인근에 있는 이점을 살려 다양한 콘셉트 공간을 마련해 팬을 맞았다. 홍대입구 지하철역 앞 라인프렌즈 스토어에도 BTS와 함께 만든 BTS 캐릭터 굿즈 'BT21'을 사려는 해외 소비자가 줄을 이었다.

서울을 물들인 이 보랏빛은 국내 유통기업에 희망의 '시그널'이 될 수 있다. 한국을 방문하는 해외 소비자는 국내 내수시장 활성화에 꼭 필요하다. 특히 오프라인 소매 경기에 미치는 영향은 더욱 크다. 글로벌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 변화와 함께 '도시' 자체가 새로운 소비 상품이 되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소비재 기업이 '도시'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다.

에드워드 글레이저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도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는 '도시가 놀이터가 되면 오프라인 경제도 살아날 수 있을까'라는 화두를 던진다.

글레이저 교수는 베스트셀러가 된 '도시의 승리'라는 책에서 도시를 인간이 만든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불렀다. 인간은 도시에서 만나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교환하며 인류 문명을 발전시켰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만남은 '줌(Zoom)'이 대체했다. 코로나가 끝났지만 뉴욕 직장인도 사무실로 돌아오지 않았다.

글레이저 교수가 최근 뉴욕타임스에 쓴 칼럼에 따르면 뉴욕에 비어 있는 사무실 공간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26.6개를 합친 면적에 달할 만큼 심각한 수준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뉴욕 유동인구는 줄지 않았다. 휴대전화 통신 데이터를 분석해보니 사무실은 비어 있었지만 거리는 활기를 띠고 있었다. '관광객' 덕분이었다. 지난해 뉴욕을 방문한 사람은 560만명에 달했다.

뉴욕은 시대와 함께 변화를 택했다. 1970년대 제조업 붕괴를 경험한 뉴욕은 금융업으로 부활했다. 글레이저 교수는 이제 뉴욕이 월스트리트 금융인의 '일터'가 아닌 '놀이터 도시(Playground City)'로 바뀌고 있다고 진단했다. 뉴욕에서는 코로나로 중단됐던 뮤지컬과 오페라가 다시 커튼을 올렸고, 메트로폴리탄(MET)미술관, 뉴욕현대미술관(MoMA), 휘트니미술관, 구겐하임미술관도 각자 개성에 맞는 전시회를 열고 있다.

KT 데이터 분석에 따르면 엔데믹과 함께 서울 '연트럴파크(경의선숲길)'에도 외국인 유동인구가 크게 늘었다. 하지만 뉴욕 '하이라인(High Line)'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극명하다.

내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앞두고 에펠타워 앞에 오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뉴욕 맨해튼 첼시 지역을 가로지르는 하이라인도 경의선숲길처럼 버려진 철길을 리모델링해 만든 공원이다. 토머스 헤더윅이 디자인한 허드슨야드의 명물 '베슬'을 보며 시작하는 산책길은 독특한 모양의 주거지 '랜턴'을 비롯해 개성 강한 건축물이 길 양옆에 들어서 있어 거리의 건축박물관으로 불린다. 첼시마켓, 리틀아일랜드 등 다양한 체험 공간으로 연결되는 장점도 있다.

하이라인의 진정한 매력은 북쪽 끝 허드슨야드의 복합 문화공간 더셰드(The Shed)와 남쪽 끝 소호거리의 휘트니미술관이다. 최근 더셰드는 지난 3월 타계한 사카모토 류이치 모습을 가상현실(VR)로 재구성한 'KAGAMI(鏡·거울)' 프로그램을 선보이는 등 새로운 문화 성지로 자리 잡고 있다.

연트럴파크의 아쉬운 점은 해외 소비자의 N차 방문을 이끌 '콘텐츠'의 부재다. 먹고 마시는 상권은 형성돼 있지만 해외 소비자를 머물게 할, 또는 유인할 뮤지엄도 미술관도 없다.

단순히 먹고 마시는 소비만으로는 N차 방문을 이끌어낼 수 없다. 문화적으로, 감성적으로 풍부한 경험이 뒷받침될 때 소비자는 다시 그 도시를 찾는다. 서울시가 내놓은 남산 곤돌라, 한강 유람선, 서울 링 등의 아이디어는 서울을 찾는 해외 소비자에게 좀 더 매력적이고 다양한 체험을 제공할 것이다. 글로벌 소비자가 서울을 N차 방문하도록 소비 콘텐츠를 기획하는 일은 과제다.

이 숙제를 풀기 위해 롯데, 신세계, 현대백화점, GS리테일 등 국내 유통기업이 나서야 하는 데는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국내 인구는 이미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연간 신생아 수는 2020년부터 20만명대로 떨어졌고 계속 줄어드는 추세다. 내수시장 성장의 한계가 예상보다 빨리 찾아올 수 있다.

해법은 두 가지다. 해외로 진출하거나, 해외 소비자를 국내로 끌어들이는 것. 유통업의 해외 시장 진출은 쉽지 않다. '지역색'이 강한 업종이기 때문이다. 월마트, 카르푸 등 글로벌 유통기업이 한국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철수했던 이유와 비슷하다. 국내 오프라인 유통업의 '종말'은 인구 감소와 함께 시간문제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국내 유통업은 어떻게 '생존'할 것인가.

최근 오프라인 소매업의 키워드는 '체험'과 '팝업'이다. 온라인 구매에서 소비자가 경험하지 못하는 체험을 선사함으로써 차별화를 시도한다. 또 MZ세대 소비자는 그 체험을 쉽게 질려 하기 때문에 계속 바꿔줘야 한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1년간 문을 여는 '팝업스토어(임시 매장)'가 리테일의 트렌드가 된 이유다.

도시 경쟁력의 핵심 역시 '체험'과 '팝업'이다. 도시 구조물 외면을 감싼 콘크리트의 웅장함이 아니고 그 내면에 들어 있는 기획 능력인 것이다. 해외 소비자의 N차 관람을 유도하려면 같은 공간이라도 팝업스토어처럼 새 '프로그램'을 열어 소비자에게 지속적으로 새로운 체험을 선사해야 한다.

과거 국내 유통업은 사람이 많은 곳에 백화점, 쇼핑몰, 마트, 편의점, 호텔, 면세점 등 '상점'을 만들어 그 안에 소비자를 가둬두고 돈을 버는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이제 점포 범위를 도시 속 상점이 아닌 '도시' 그 자체로 키워보자는 것이다. '서울'이란 도시 자체를 글로벌 소비자의 소비 공간이자 소비 상품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뉴욕의 슬립노모어(Sleep No More) 공연이 호텔 내 무대가 아니라 무대와 객석의 경계 없이 호텔 전체를 공연장으로 사용하는 것처럼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프랑스 파리가 대표적인 사례다. 지난 5월 파리를 방문했을 때 센강은 수질 개선 작업이 한창이었다. 내년 7월 파리에서 열리는 올림픽에서 센강은 수영 경기장으로 변신한다. 센강뿐만이 아니다. 파리 도시 전체가 올림픽 '체험' 공간으로 바뀐다. 에펠타워에는 올림픽 성화가 설치되고 에펠타워 앞 마르스 광장에선 비치발리볼 경기가 열린다. 승마와 근대5종은 베르사유궁전, 양궁은 앵발리드 군사박물관, 태권도와 펜싱은 샹젤리제 거리의 그랑 팔레에서 치러진다. 올림픽이란 콘텐츠를 활용해 도시 전체가 글로벌 소비자를 겨냥한 '팝업' 공간으로 바뀌는 것이다.

그 뒤엔 세계 최대 럭셔리 소비재 기업인 루이비통모에헤네시(LVMH)가 있다. 외신 보도에 따르면 LVMH는 파리올림픽을 위해 1억6100만달러(약 2095억원) 후원을 검토하고 있다.

센강에서 올림픽 수영 대회가 실제 열릴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올림픽 경기 전에 비가 3일 이상 내리면 수질 관리가 힘들어 경기 일정을 조정하거나 무산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파리의 도전은 상상만으로도 즐거움을 선사하기에 충분하다.

소비자는 즐거운 경험에 기꺼이 돈을 쓴다.

뉴욕과 파리를 찾는 글로벌 소비자도 랜드마크 건축물 자체가 주는 매력과 함께 그 공간에서 일어나는 공연과 전시를 체험하기 위해 지갑을 연다. 파리 루이비통재단미술관은 세계적인 건축가 프랭크 게리의 작품이다. 지금은 앤디 워홀과 바스키아 특별전으로 파리를 찾는 전 세계 소비자에게 기쁨을 주고 있다. 글로벌 소비자는 내년에는 또 다른 프로그램을 볼 설렘으로 미술관을 찾을 것이다.

국내 유통업계도 해외에서 한국을 방문한 글로벌 소비자 관점으로 '서울'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한국은 BTS, 블랙핑크 등 세계적인 아티스트를 보유하고 있고 기생충과 오징어 게임 등으로 콘텐츠 생산 능력도 증명했다. 다만 글로벌 소비자와 소통하고 이를 상업화하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야 한다.

보랏빛 서울은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줬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센강을 올림픽 수영 경기장으로 바꾸는 좀 더 신나고 대담한 상상력이다. 그것이 도시의 승리와 우리 유통 산업의 승리를 동시에 이룩할 수 있는 명랑한 전략이 될 수 있다. 도시가 즐거운 경험의 공간이자 상품이 될 때 소비재 시장도 함께 살아날 것이다.

[김기정 컨슈머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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