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 앱만 ‘5개’ 쓰는 사과 농가···‘농사 맞춤’ 기상 정보가 길잡이[기후적응②]
“살기 좋은 미래를 보장할 기회의 창은 빠르게 닫히고 있다.”
전 세계 과학자와 세계 각국 정부 대표단이 합의해 작성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보고서는 현재 인류가 처한 상황을 이렇게 요약했다. 전 지구 평균기온이 산업혁명 이전보다 1.5도 넘게 오른 세상에 인류가 적응하기 위한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홍수, 산불, 태풍, 폭염 같은 기후 재난은 전례 없는 빈도와 강도로 인류 사회를 위협한다. 너무 빠르게 변하는 기후에 적응하지 못한 작물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수십년간 한국의 ‘대표 감자’였던 수미 품종의 위기는 기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농업의 미래를 보여준다. 기후위기는 우리가 사는 곳, 먹는 음식, 하는 일과 같은 삶의 기본 조건을 송두리째 흔든다.
국제기구와 과학자들은 기후위기로 인한 변화는 이미 기정사실이며 ‘피할 수 없는 미래’라 경고한다. IPCC가 지난 3월 발표한 제6차 종합보고서를 보면 이미 33억~36억명이 기후변화로 생기는 극한 기상 현상과 식량 안보 위험에 ‘매우 취약’한 상태로 놓여있다. 2010년부터 2020년까지 홍수, 가뭄, 태풍 등 기후 재난으로 죽은 이들의 비율은 ‘매우 취약한 지역’이 ‘가장 덜 위험한 지역’보다 15배 더 컸다.
세계 각국은 이미 ‘적응’을 준비하고 있다. 기후위기에 적응하는 것은 순응이나 포기가 아니다. 인류 문명의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인 선택이다. 전문가들은 기후위기 대응의 두 축으로 온실가스 감축 위주의 ‘저감’과 적응을 함께 꼽는다.
애초에 인류의 역사는 지구 기후에 적응해 살아남아 온 기록이다. 기후위기 적응은 다양한 기후재난으로부터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 자연 생태계를 지키기 위한 예방 대책부터 재난 이후 시민들이 일상을 회복할 수 있도록, 생태계가 생물 다양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회복과 복원 대책을 모두 포괄한다. 또 위기를 기회로 바꿔 이익을 키우고 있는 산업 분야의 사례들은 인류의 적응력이 기후위기에서도 발휘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농업과학원과 지자체들이 협력해 구축한 기상재해 조기경보시스템을 사용해 소득을 증대시키고 있는 농가들의 사례가 대표적이다.
물론 기후적응은 쉽지 않다. 우선 온실가스 감축으로 대표되는 ‘기후위기 완화’와 달리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온실가스 감축이 숫자 등으로 정량화되어있는 것에 비해 분야별로, 사례별로 정량화하기도 어렵다.
경향신문은 국내외 기후위기 적응 현장을 다니며 ‘피할 수 없는 기후위기에 한국 사회가 잘 적응하고 있는지’ 살폈다. 한국에서도 기후위기 적응은 선택이 아닌 생존의 문제다.
#목차
① 피할 수 없는 기후위기, 한국 사회 잘 적응하고 있습니까
② 기회가 된 기후적응, 정보가 위기를 바꾼다
③ “바람직한 기후위기 적응, 스스로 역량 키워야”
지난 6월15일 찾아간 경북 의성군 안계면 일대 사과 과수원. 사과나무 위로 안테나처럼 1m쯤 솟은 가는 관이 보였다. 의성에서 20년째 사과농사를 짓고 있는 최병흠씨(59)가 1년 전쯤 설치한 미세살수 장치다. 작동시키면 물이 스프레이처럼 분사돼 나무를 덮는다. 갑자기 닥친 추위로 온도가 영하 2도 아래로 떨어지면 나무에 따뜻한 물을 뿌려 냉해를 줄이고, 또 너무 더우면 차가운 물을 뿌린다.
베테랑 농사꾼 최씨도 이 장치를 언제 켜야 할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내 농장’의 기온을 아주 정확히 예측하기 어렵다. 꽃이 피는 시기에는 1~2도만 더 낮아도 꽃의 암술이 저온 피해를 받고, 열매가 생기지 않을 수 있다. 기상청이 제공하는 동네예보의 구역 단위는 농장보다 큰 가로, 세로 5㎞짜리 격자다. 산지가 많은 한국에서는 농장별로도 날씨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농업은 날씨에 민감해 기후위기의 피해를 가장 먼저 입는다. 그래서 기후위기 적응도 가장 먼저 해야 한다. 농촌진흥청 산하 국립농업과학원이 재단법인 국가 농림기상센터와 만든 ‘농업기상재해 조기경보서비스’는 농가 맞춤형 기상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 각 지역 농업 기술센터는 농가에 서비스를 알려주고 사용법도 교육한다.
꽃이 일찍 피면, 사과 일찍 팔 수 있을까
경북 안동 길안면에서 사과 과수원을 하는 권해경씨(58)는 지난 6월12일 사과나무 사이를 누비며 덜 익은 사과를 땄다. 수확까지 약 4개월 반을 남기고 2차 적과(과실나무에 열매가 적당한 크기로 자라기 위해 일정량을 남기고 따는 것)로 바빴다.
권씨의 과수원 곳곳에는 냉해를 입어 자라지 못한 채 쭈글쭈글해진 사과가 있었다. 권씨는 “5월 초까지도 기온이 많이 떨어져서, 냉해 때문에 사과가 버티지 못하고 떨어지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의성에서 농사를 짓는 권오진씨(43)도 “보통 4월 초쯤 돼야 서리 피해가 있는데 올해는 3월 말에 온도가 영하로 내려가니 암술이 피해를 받았다”라고 말했다. 사과는 영하 3도 정도 저온을 한 시간쯤 버틸 수 있지만 그 이상 길어지면 암술이 갈변돼 버리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
안동·의성의 사과 농민들은 올해 평년보다 일주일 정도 꽃이 일찍 피었다고 입을 모았다. 사과는 중생종의 경우 꽃이 만발한 뒤 180일 정도 지나면 열매가 익는다. 시장에 아직 사과가 많지 않을 때 내놓을 수 있다면 비싼 값을 받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일찍 핀 꽃’이 마냥 좋지만은 않다.
꽃이 일찍 피었다는 것은 나무가 이르게 겨울잠에서 깨어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식물은 내재 휴면 중일 때는 추위에 잘 견디지만, 휴면을 풀고 꽃눈이 자라기 시작하면 조금만 추워도 큰 피해를 본다. ‘기후변화 시나리오에 근거한 과수 개화기 변화 및 개화 후 저온 발생 전망’ 연구를 보면 배, 복숭아, 사과 등 과종은 2071년 이후 현재보다 20일 정도 빨리 꽃이 필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를 진행했던 김대준 국가농림기상센터 산학연협력부장은 “기후변화는 단순히 온도가 따뜻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갑자기 추워지는 변동 폭도 커지게 한다”며 “개화기 꽃의 저온해가 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냉해뿐만 아니라 비·바람도 수익과 직결된다. 꽃이 필 때 비가 자주 오면 꿀벌이 날지 못해, 수정률이 떨어진다. 인근에 벌이 적어지자, 권씨는 양봉 농가에 벌 한 통을 빌려오는데 18만원을 썼다. 농약 방제를 ‘언제’ 할지도 문제다. 6월에는 탄저병 균 등에 감염되는 일이 잦다. 방제한 직후에 비가 오면 약제가 씻겨 내려간다. 농가들은 약재를 뿌린 하루 이내에 20㎜ 정도 비가 오면 방제 효과는 50% 정도라고 본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도 약재 효과가 줄어든다.
‘내 과수원’ 날씨 정확히 알면, 비용도 줄여
날씨가 한해 농사를 말 그대로 좌우하다 보니 최병흠씨의 휴대전화에는 날씨 관련 애플리케이션만 5개 이상 깔려있다. 이 중 ‘의성군 농업 기상재해 조기 경보서비스’를 가장 자주 이용한다. 농진청 산하 국립농업과학원이 개발해 전국 61곳 기초 지자체에 서비스되고 있는 ‘농업 전용’ 날씨 알리미다.
농업 기상재해 조기 경보서비스는 기상청 동네 예보 등에 농장 고도, 지형 특성, 도심과의 거리 등을 반영해 가로세로 30m 단위로 날씨를 예보한다. 산악지형이 많은 한국에서 ‘내 농장’의 날씨를 알기에 최적이다.
예보 대상은 최고기온(당일 포함 3일간 오후 3시 기온 예보), 최저기온(3일간 오전 6시 기온), 강수량, 일사량, 평균 풍속, 최고 풍속, 일조 시간, 습도, 증발산량이다. 의성군에서는 사과, 벼, 마늘이 싹을 틔워서 꽃을 피우고, 과실이 비대해지는 시기도 알려준다. 동해, 저온해, 고온해, 홍수해, 냉해 등이 있을 수 있는 시기를 향후 9일까지 예보한다.
의성군은 서비스 구축 과정에서 과수 화상병 예측을 위해 설치된 관측망의 데이터를 추가했다. 여기에심식나방, 굴나방, 순나방 등 병해충 경보도 내린다.
이동근 서울대 조경·지역시스템공학부 교수는 “하향식 국가 주도 기후위기 적응 대책보다는 지자체, 주민이 직접 참여해서 정책을 만들어가는 ‘리빙랩’ 형태의 기후변화 적응 대책이 앞으로 가야 할 방향”이라고 말했다.
오랜 경험이 있는 농민들에게 새로운 시스템을 알리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다. 의성군 농업기술센터는 기존 농민들과의 접점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알리고 있다. 김인규 의성군 농업기술센터 과수기술팀장은 “센터에서 교육을 할 때 교육 시간을 할애해서 앱이 있다고 홍보를 하고, 사용법도 안내하고 있다”고 말했다.
농가에서도 점점 ‘믿음직스럽다’는 반응이 많아졌다. 권오진씨는 “내 과수원은 산이 바로 옆에 있어서 일반 보도, 날씨 앱에서 나오는 정보가 맞지 않을 때도 많은데, 과수원을 중심으로 날씨 정보를 보내줘서 이 시스템이 가장 믿음직스럽다”라며 “기존 앱은 주위 전체의 날씨가 나와서 참고만 한다”라고 말했다.
날씨를 미리 알면, 대비할 시간도 늘어난다. 저온해·고온해가 예상될 때는 미리 밭에 물을 뿌려놓는다거나, 미세살수 장치를 켜두면 피해를 막을 수 있다. 병해충 예보가 나면 농약을 준비하고 방제 시점을 정확히 잡아 피해를 줄일 수 있다. 다만, 장치가 없는 농가에서는 대응력이 떨어질 수 있다. 심교문 농업과학원 기후변화평가과 실장은 “기후변화가 심화하면서 사전 예방을 해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시스템이지만, 작목·농사 수준에 따라서 대응력이 달라서 미세살수 장치 등 시설이 없는 농가는 방법이 없다”라며 “손쉽게 현장에 맞게 적용할 수 있는 대책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장기적으로는 사과의 ‘재배 적지’ 자체가 변할 수 있다. 최병흠씨는 재해 보험도 들지 않았을 정도로 과수원 자리가 좋았지만, 앞으로는 걱정스럽다. 최씨는 “기후변화가 예전보다 심하고, 수시로 급작스럽게 오는 폭우 같은 건 당해내지는 못하겠다”며 “적응해 나가면서 하니까 차이가 크지만 그래도 익숙해지는 부분도 있다”고 말했다.
https://www.khan.co.kr/environment/climate/article/202306251526001
https://www.khan.co.kr/environment/environment-general/article/202306251525001
https://www.khan.co.kr/environment/climate/article/202306251526011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강한들 기자 handle@kyunghyang.com
Copyright © 경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빗속에 모인 시민들···‘윤석열 퇴진·김건희 특검’ 촉구 대규모 집회
- 트럼프에 올라탄 머스크의 ‘우주 질주’…인류에게 약일까 독일까
- 최현욱, 키덜트 소품 자랑하다 ‘전라노출’···빛삭했으나 확산
- 사라진 돌잔치 대신인가?…‘젠더리빌’ 파티 유행
- “나도 있다”…‘이재명 대 한동훈’ 구도 흔드는 경쟁자들
- 제주 제2공항 수천 필지 들여다보니…짙게 드리워진 투기의 그림자
- 말로는 탈북자 위한다며…‘북 가족 송금’은 수사해놓고 왜 나 몰라라
- 경기 안산 6층 상가 건물서 화재…모텔 투숙객 등 52명 구조
- [산업이지] 한국에서 이런 게임이? 지스타에서 읽은 트렌드
- [주간경향이 만난 초선] (10)“이재명 방탄? 민주당은 항상 민생이 최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