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며느리, 뭐 어때…가족이 망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퀴어를 저출생 주범으로 엉뚱하게 몰지 마시라
가족 무너진 건 관계를 유지할 역량 부족한 탓
2023년 6월17일 대구에서 열린 퀴어축제에서 경찰과 대구시 공무원이 충돌하는 이례적인 사건이 있었다. 홍준표 대구시장이 성소수자 축제에는 ‘공공성’이 없고 또 다수의 교통을 소수가 방해하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행정대집행을 하려 했고, 경찰은 이에 맞서 법으로 보장된 집회를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의무라며 둘이 맞붙은 것이다.
■ 홍준표의 혐오, 전세계적으로 상당히 희귀한 사례
홍준표 시장의 이 ‘퍼포먼스’에는 이해되지 않는 점이 있다. 성소수자 행사에는 이렇게 강경하게 법과 공공성을 들고나온 그가 대구에 짓는 이슬람사원에는 또 개신교 위주의 혐오세력에 맞서 ‘소수자’ 편에 서 있다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대구에 짓는 이슬람사원은 지역에서 극심한 혐오에 부딪혔다. 개신교 극단주의자부터 지역 부동산 가격을 우려하는 사람들까지 모여 이슬람에서 금기시하는 돼지고기를 그 앞에서 굽는 등 극단적인 문화 혐오 투쟁을 벌이고 있다. 홍준표 시장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우파’답지 않게 혐오세력을 비난하며 소수자 권리를 옹호했다.
이 행보는 전세계 ‘우파’들의 입장을 고려해도 상당히 이례적이다. 우파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성소수자와 이민자 모두를 반대하는 것으로 주로 개신교 우파가 취한다. 미국에 많이 있는 이들은 국경 장벽을 높게 쌓으면서 동시에 개신교 가족 가치관에 입각해 성소수자에도 반대한다. 둘째는 성소수자 권리에 찬성하면서 이민자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이들은 자유와 인권, 민주주의라는 서구의 가치를 우선시해 이에 반하는 가치의 적으로서 이민자에 반대한다.
‘혐오’는 감정이지만 동시에 ‘명분’이 필요하다. 명분 없이 “그냥 싫다”고 말해서는 결코 공론의 장에서 한 ‘의견’으로 대접받을 수 없다. 더구나 그 혐오가 퍼져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명분이 필요하고, 이 명분은 경제적 이익만으로는 다소 부족하고 도덕적/윤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포장돼야 한다. 지켜야 할 가치가 있고 그 가치를 위해 혐오를 정당화해야 한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서구의 우월한 가치를 명분으로 세속화한 유럽 인종주의에서 주로 취하는 것이 두 번째 입장이다. 이에 대한 상징적 사건이 2023년 6월17일(현지시각)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났다. 오스트리아의 퀴어퍼레이드를 앞두고 이슬람극단주의 이주자 청소년 세 명이 체포됐다. 이들은 퀴어퍼레이드에 극단적 공격을 할 계획을 세우다 발각됐다. 영국 방송 <비비시>(BBC)의 보도에 따르면 오스트리아 당국은 "우리 민주주의 사회에서 혐오와 테러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고 말했다.
■ 동성애는 ‘출생’에 도움 안 된다? 아니오
미국과 한국에는 첫 번째 입장이 가장 많을 것이다. 미국과 한국에 개신교 영향력이 크다는 점에 기인하는 듯하다. 물론 종교적 가치만으로는 전체 시민을 설득할 수 없다. 그래서 종교적 신념을 세속적 가치관의 문제와 중첩시킨다. 그 교집합의 핵심이 ‘가족’이다. 홍준표 시장이 ‘공공성’과 ‘다수자의 교통에 대한 권리’를 운운했지만 실제 반대세력이 목표로 삼는 것은 ‘가족’이다. 성소수자나 청소년 인권에 반대할 때 이들이 내세우는 대표 구호가 “남자가 며느리라니!”라든가 “중학생 엄마/아빠 양산하는 인권조례 반대”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홍준표 시장의 세 번째 입장, 즉 이주민에는 찬성하지만 동성애는 공공성이 없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입장은 전세계적으로도 상당히 ‘희귀’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런 입장이 어떤 가치에서 기인하는지 다른 사회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별의별 추측이 다 나온다. 정치적 입장이 ‘차이’로 만들어지기에 일단 자기가 차별화해야 하는 국민의힘의 다른 정치인들과 무조건 다른 견해를 취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고, 대구시의 기치를 ‘파워풀 대구’라고 선정해 중동 이슬람의 자본과 투자를 노리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파워풀 대구’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비약해보면 그럴듯한 가설이 하나 더 나오긴 한다. 인구문제다. 지금 어느 지방자치단체나 인구 감소가 가장 실체적 위협이 되고 있다. 인구를 늘리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해야 하고, 인구 증가는 공공정책의 최우선 과제다. 이번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국회 연설에도 나왔지만, 한국은 현실적으로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밖에 없는 단계다. 보수주의 정당도 대단히 적극적이다.
반면 댓글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처럼 성소수자는 엉뚱하게 저출생과 인구 감소의 주범으로도 지목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종교적/윤리적 가치로서의 가족이 아니라 ‘파워풀’한 도시와 국가가 되는 것의 핵심인 인구를 유지하거나 늘리는 토대인 가족을 해체하는 존재로 지목된다. 출생에 ‘도움’이 안 되고 출생의 토대인 가족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는 점에서 성소수자는 홍준표 시장식 ‘공공성’에서 전혀 가치가 없는 존재로 여겨진 것인지 모르겠다.(그리고 여기에 이슬람사원 문제로 척진 극우 개신교 세력을 달래려는 목적도 있었을지 모르겠다.)
■ 관계는 저절로 지켜지는 게 아니므로
이 두 입장에서 홍준표 시장이 퀴어축제에 몸소 나서서 경찰과 충돌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고 생각해보자. 그런데 사실 가족이 붕괴한 것은 성소수자와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이성애 중심 가족주의가 붕괴한 것은 이성애 내부의 자체 모순 때문이었다. 단적으로 말해 이성애 중심 가족주의가 관계를 맺고 유지하고 갱신하는 의사소통 역량이 형편없었기에 가족은 “미워해서가 아니라 같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되면서 붕괴했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같이 사는 문제이며 같이 사는 ‘생활의 문제’에서 핵심은 구성원들의 의사소통 역량이다. 말 안 통하는 사람과 사는 것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이전에는 가족에게 실망했을 때 사람들이 소통을 통한 연합이라는 자기의 희망을 버리고 그냥 살았지만, 지금 사람은 자신의 희망을 위해 이 ‘실패한 연합’을 버린다.
사실 가족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의 ‘연합’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 핵심이 의사소통으로 새로운 의례를 만들어내는 역량이다. 소통으로 서로를 인정하는 의례에서 ‘반복적 변형’이 일어나고 관계가 쇄신되며 그 관계를 유지/지속해야 하는 의미가 재생산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쇠락하고 만다. 특히 그 변형적 반복을 주도하거나 담당하는 것이 상호적인 것이 아니라 일방의 책임이자 의무가 되면 그 담당자(주로 아내이자 어머니인 여성)의 거부나 저항과 더불어 일순간에 무너진다.
특히 가족 같은 친밀성의 공간에서 의사소통은 다른 공적 공간에서의 의사소통보다 훨씬 더 까다롭다. 사회학자들은 친밀성의 의례를 반복하며 재생산해내는 의사소통을 ‘담소’라고 부른다. 이걸 아주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이 이전 <개그콘서트>의 ‘대화가 필요해’ 코너다. 이상적인 가족은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담소’가 펼쳐져야 한다.
담소는 인간의 의사소통 가운데 가장 어려운 역량을 요구한다. 한편에서 지나치게 무거운 주제는 담소에 어울리지 않는다. 정치적 주제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너무 가벼워서도 안 된다. 일상적인 주변의 일에 대해 서로 걱정을 나누지만 동시에 각자의 자율성은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개입하고 조언하되 마지막에 ‘축복’으로 끝나는 것이 담소다.
담소의 마지막 의례가 ‘축복’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축복은 “네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걱정을 나누는 내가 있는 한 너에게는 큰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세상에 나가는 걸 격려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중에서도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축복이며 담소가 하나의 의례로서 끝맺는 방식이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예배의 끝이 사제의 축복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담소는 말의 내용과 진행에서 형식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고도로 양식화한 의례 행위다. 이 의례를 지속적으로 갱신하지 못하면 그 가족은 ‘대화가 필요해’로 전락하고 고통스러운 존재가 되거나, 사실은 서로에게 무관심한 것이 최선인 경제/정치 공동체로 전락한다.
■ 가족을 축복합니까, 당신은 노력합니까
아이러니한 것은 가족이 처한 현실은 담소에 대한 기대가 없을 때 오히려 유지된다는 점이다. 가족에 대해 가족 구성원들이 지금의 ‘연합’을 현상 유지하는 것 외에 어떤 기대도 서로에게 하지 않을 때 잘 유지된다. 반대로 담소의 역량을 서로에게 요구하는 순간부터 가족은 붕괴하는 경우가 많다. 가족이 가족답기를 바라는 순간부터 가족은 서로에게 존재하지 않는 ‘담소’라는 의사소통 역량을 발휘해야 하는 피곤한 상황이 벌어진다. “집에까지 와서도 힘들어야 해? 좀 쉬자!”가 된다.
그래서 이성애에 기반을 둔 가부장적 가족은 붕괴했다. 형태를 유지하는 가족은 가족이라 할 수 없고, 가족다운 가족이기를 요구한 가족은 구성원들이 첨예한 갈등 속에서 서로를 피곤해하다가 해체됐다. 이 과정은 전적으로 가족의 의사소통적 무능에서 비롯되지, 성소수자 같은 외부의 어떤 출현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성소수자와 인권 등을 가족 붕괴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을 남에게 전가하는 비겁한 짓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서로의 안전을 염려하되 자율성을 침범하지 않으면서 동행하는 의사소통이자 의례인 축복이 있는 담소. 그 담소의 공간이 없는 인간만큼 외로운 인간이 없다. 그리고 이 공간이 부재한 인간들이 모이는 곳이 아고라 같은 공론장 구실을 하는 공공공간이라면 그 외로움의 여파는 친밀성의 공간을 넘어 전체 정치공동체에 미친다. 말하는 것을 통해 충족할 수 있는 존재감을 고양하는 유일한 공간이 ‘정치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가족을 보존하고 유지하고 쇄신하는 의사소통 역량은 없으면서 가족(의 가치)에 대해 ‘정치적’으로 떠들기만 하는 황당한 존재들이 점령해 공론장을 폐허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홍준표 시장의 횡보에서 가장 우려되는 일은 저 행보가 전혀 설명이 안 된다는 점이다. 어떤 가치와 사상으로 일관성 있게 설명되지 않는다. 공론장 처지에서는 이것이 가장 해롭다. 시류에 따라 그때그때 바뀌는 편의주의적 입장이야말로 숙고하고 논의하는 것을 허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대를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포기하게 한다. 그러니 그의 말을 귀여겨들을 필요도 없고 충실하게 대응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말은 무가치한 것이 되고 남는 것은 몸의 부딪침, 즉 육탄 돌격밖에 없다. 말은 휘발되고 몸만 부딪치는 곳만큼 끔찍한 곳이 없다. 이게 시장이 나서서 할 일은 아니지 않을까?
엄기호 사회학자·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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