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위 가져오라 했더니 식칼을…” 언어장벽 뛰어넘은 박항서의 ‘파파 리더십’ [이헌재의 인생홈런]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 자리는 ‘독이 든 성배’라고 불린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엄청난 비난에 시달린다. 성적이 괜찮아도 선수 선발이나 경기 운영 등에서 뒷말이 나오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동남아시아의 ‘축구 변방’이던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직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객관적인 전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지만 국민들의 기대치는 높았다. 감독 임명 후 채 1년을 채우는 게 쉽지 않았다. 그렇게 감독들이 차례차례 갈려 나가면서 평균 감독 수명은 8개월여밖에 되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한 번에 바꾼 사람은 박항서 감독(65)이다. 2017년 10월 베트남 성인 대표팀 및 23세 이하 대표팀(U-23) 감독에 부임한 박 감독은 올해 1월 열린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미쓰비시컵)까지 무려 5년 4개월 동안 베트남 대표팀을 이끌었다. 박 전 감독은 “처음엔 나도 8개월도 못하고 쫓겨나는 게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더 물러설 곳도, 더 나아갈 곳도 없었다. 개인적인 욕심은 버리고 딱 1년만 버티자는 마음가짐으로 베트남 감독 직을 수락했다”고 말했다.
이 결정이 베트남 축구의 역사를 바꿨다.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에서는 역대 최고 성적인 4강에 진출했고, 그해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당시 스즈키컵)에서는 10년 만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
약체였던 베트남은 박 전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후 동남아의 ‘다크호스’가 됐다. 2019년 AFC 아시안컵 8강에 오르며 역대 최고 성적(2007년 8강)과 타이를 이뤘고, 같은해 12월 동남아시아경기에서는 처음으로 축구 금메달을 땄다. 박 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서도 베트남을 사상 첫 최종예선 진출로 이끌었다.
그리고 자신의 ‘라스트 댄스’였던 올해 1월 동남아시아축구선수권(미쓰비시컵) 태국과의 결승에서 베트남은 1, 2차전 합계 2-3으로 준우승을 했다. 박 전 감독 부임 당시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130위였던 베트남은 6월 말 현재 95위에 올라 있다.
박 전 감독은 어릴 적 작은 신장 탓에 남들보다 늦게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럭키금성 황소의 창단 멤버로 프로에 데뷔했지만 4년 만에 은퇴했다. 국가대표로 뛴 A매치 경기는 1981년 3월 한일정기전에 교체 멤버로 뛴 게 유일하다.
지도자가 된 후엔 2002년 한일월드컵 한국 대표팀 수석 코치로 4강 신화에 기여했다. 거스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제대로 해내며 체육훈장 맹호장도 받았다.
하지만 그해 부산 아시아경기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동메달에 그쳤고, 이후 프로축구 경남 FC, 전남, 상주 상무 FC 감독으로서도 눈에 드러나는 성적을 내지 못했다. 2017년 베트남행은 그에게는 ‘마지막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의 성공 후 그는 베트남에서 ‘국민 영웅’ 대접을 받는다. 가는 곳마다 팬들의 사인 요청과 사진 촬영 요청을 받는다. 베트남 국영 항공사 베트남항공은 박 감독에게 한국∼베트남 노선 비즈니스석 평생 이용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예순에 시도한 도전이 그의 축구 인생의 꽃을 다시 한번 화려하게 피웠다고 할 수 있다.
박 감독의 성공 비결은 ‘파파 리더십’이라는 말로 정리할 수 있다. 베트남 문화에 대한 존중과 자식뻘 선수들과의 소통이 빛을 발했다는 것이다.
박 감독이 트레이너실에서 선수의 발을 직접 마사지해주는 장면을 선수가 직접 자신의 소셜미디어에 올린 게 대표적이다. 박 감독은 2018년 스즈키컵 결승 1차전을 위해 말레이시아로 이동하던 중 부상 선수에게 자신의 비즈니스석을 양보하기도 했다.
박 감독은 “선수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내게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선수들과 같이 어울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는 바로 트레이너실이었다”며 “선수들에게 트레이너실은 사랑방 같은 곳이다. 치료도 받고 마사지도 하면서 가벼운 농담부터 사생활까지 각종 이야기들이 오고 간다”고 말했다.
그가 트레이너실을 자주 찾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말이 잘 통하지 않아서였다. 그는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몸으로 스킨십을 하면서 선수들을 이해하고자 했다”며 “선수들의 부상 부위와 치료 정도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고 말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아 생긴 에피소드도 있다. U-23 대표팀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선수단은 한 식당에서 단체 식사를 했다. 식단이 제대로 나오는지 확인 차 그 식당을 찾은 박 감독은 통역을 통해 “가위를 좀 가져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정작 직원이 들고 온 것은 서슬 퍼런 칼이었다. 박 감독은 “직원의 손에 들린 칼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내가 경상도 출신이라 사투리가 심해 통역이 이해를 잘못한 것 같았다. 이후 가능한 한 말을 짧고 정확하게 하려고 신경썼다”며 웃었다.
하지만 선수들과 서로 인간적으로 통하게 된 이후 말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선수들과의 대화는 베트남어와 영어, 그리고 손짓, 발짓을 모두 동원했다. 그는 “가끔 선수들과 전화로도 이야기를 한다. 옆에 사람이 ‘대체 그렇게 얘기하면 어떻게 알아듣느냐’고 하는데 축구에 관한 얘기라면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말했다.
평소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선수들을 자식처럼 대한 박 감독이지만 그는 동시에 굉장히 엄하고 무서운 감독이기도 했다. 그는 “선수를 뽑을 때 축구 실력만 보지 않았다. 슬로건으로 정한 ‘원 팀’의 일원이 될 수 있느냐를 더 유심히 봤다”며 “베트남 축구대표팀이 선수 하나로 좌우되는 걸 원치 않았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팀과 하나가 될 수 없으면 그 선수를 선발하지 않았다”고 했다.
박 감독은 요즘 스스로를 ‘실업자’라고 부른다. 하지만 재충전을 하는 와중에도 베트남과의 인연의 끈을 여전히 이어가고 있다.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지내고 있는 그는 얼마 전 베트남 하노이에 자신의 이름을 딴 축구 아카데미를 세웠다. 현재 13세와 11세, 9세 등 어린 유소년 선수들을 중심으로 시범 운영 중이다. 그는 “5년 4개월간 베트남 팬들과 협회로부터 큰 사랑과 지원을 받았다. 조금이나마 베트남 축구 발전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축구 아카데미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60대 중반의 나이지만 그는 또 한 번의 ‘마지막 도전’을 위해 몸과 마음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2~3년간은 더 감독직을 수행할 수 있을 것 같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던 것처럼 한국이나 베트남에 있는 팀은 가지 않는다”며 “그 외 제3국에서 제안이 온다면 대표팀이건 클럽팀을 가리지 않고 맡을 용의가 있다. 저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워볼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헌재 기자 u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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