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나지 않아서 바꿀수가 없네”...최고의 기업 키워낸 일본 ‘경영의 신’ [추동훈의 흥부전]

추동훈 기자(chu.donghun@mk.co.kr) 2023. 7. 2.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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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로 남은 창업자들-07] 혼다 소이치로

한일관계 회복과 더불어 일본기업의 선전이 돋보이는 가운데 유독 힘을 못 쓰는 기업이 있습니다. 야심차게 시작한 온라인 플랫폼 전략이 흔들리는 데다 예상치 못한 대규모 리콜 사태까지 발생한 기업, 바로 일본의 대표 자동차 기업 혼다입니다. 혼다는 지난 4월 온라인 판매 플랫폼을 구축했지만 지난 5월 판매량이 106대로 급감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게다가 후방카메라 영상 오류로 인해 120만대에 달하는 리콜이 예정되며 우려를 키우고 있습니다. 도요타와 더불어 일본을 대표하는 자동차 기업 혼다가 이처럼 커지는 위기 속 어떤 돌파구를 마련할지 관심이 쏠리는데요. 일본 현지에서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린 혼다의 창업주 ‘혼다 소이치로’의 경영철학을 재조명하며 반전마련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혼다 소이치로
삶 자체가 도전 그 자체였던 혼다 소이치로는 ‘기술’밖에 모르는 바보라 불렸습니다. 1906년 일본 시즈오카현 하마마츠시에서 태어난 그는 철공소에서 일한 아버지 덕에 어릴 적부터 기계와 가깝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각종 기계와 장치들을 접하며 철공소를 드나든 그는 이 곳에 있던 자전거를 장난감 삼아 놀며 분해하고 조립했습니다.

또한 당시 시골 마을에 미국의 포드 자동차가 가끔 지나갈 때면 혼다는 뛰쳐나가 뒤를 쫓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공학도이자 기술자의 꿈을 키워오던 혼다는 1921년 무작정 도쿄로 상경해 한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합니다. 당시 그의 나이 15세에 불과했죠.

혼다는 중학교조차 졸업하지 못한 학력에도 불구하고 혼다를 대표하는 핵심 엔진을 직접 개발했습니다. 이 역시 현장에 답이 있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학력만능주의보단 철저한 실력으로 회사를 이끌어간 그의 DNA이기도 했습니다. 6년간 자동차 엔진을 수리하고 전문성을 쌓아간 혼다는 정비소 사장으로부터 더 이상 가르칠게 없다라는 말을 들으며 고향으로 돌아가 본인의 정비소를 차릴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렇게 1928년 고향으로 돌아와 정비소를 운영하며 자동차와 오토바이 등 탈 것에 대한 전문성을 키워온 혼다는 귀향 10년뒤인 1937년 ‘도카이세이키’라는 자동차 부품 공장을 세웠습니다. 모터 피스톤 등을 생산한 회사는 이미 자동차 시장에 진출한 도요타에 부품 납품 등을 하며 사세를 키워갔습니다. 하지만 세계2차대전과 미카와 지진 등 악재가 거듭 발생하며 공장 등이 손실됐고 남은 자산과 기술 등을 도요타에 매각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혼다 오토바이 로고
하지만 위기는 기회가 돼 당시 매각해 확보한 45만 엔으로 1946년 혼다 기술연구공업을 재창업하며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전쟁의 후유증으로 사실상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했지만 12명의 직원과 함께 힘을 합친 그는 전쟁 당시 쓰였던 군대의 무선기용 소형 엔진을 대량으로 매입해 자전거에 부착하는 아이디어를 냈습니다.

여기엔 사실 아내에 대한 사랑이 담긴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평소 자전거를 끌고 언덕을 넘어 집을 가던 아내를 지켜보던 혼다는 아내가 어떻게 하면 좀더 편하게 집에 갈 수 있을지 고민하다 자전거에 소형 모터를 달아 이 문제를 해결한 것입니다.

평소 탈 것에 대한 관심이 컸던 그는 자전거에 엔진을 붙인 간단한 오토바이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고 시장에선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혼다가 사업을 확장하기에는 돈이 많이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고민끝에 혼다는 일본의 1만8000여곳의 자전거 가게에 직접 편지를 보내 자전거 부착용 소형엔진을 홍보하며 투자를 부탁했는데 무려 5000여 곳에서 답장이 오며 본격적인 사업이 확장됐다는 점입니다 .

세계 판매량 1위 혼다 커브
그렇게 1948년 첫 양산형 오토바이를 생산한 혼다는 1950년대 들어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물론 위기도 있었습니다. 1954년 새로 내놓은 220cc급 드림호가 시장의 외면을 받았고 자동차용 엔진 개발을 위해 만들어둔 새로운 기계는 돌리지도 못한 채 방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혼다는 다시 한번 승부수를 던집니다. 혼다의 엔진을 달고 전세계 스피드레이스 대회에서 우승해 기술 경쟁력을 선보이겠다고 발표를 한 것입니다. 직원들과 시장은 코웃음을 쳤습니다. 하지만 혼다는 그 약속을 지킵니다. 1959년 오토바이 레이스에 참가를 시작한 혼다는 1961년 한 대회에서 1위부터 5위까지 차지하는 성과를 거두며 보란듯이 기술경쟁력을 발휘합니다. 이때부터 혼다는 ‘기술의 혼다’라는 별명으로 불리기 시작합니다.

기술 개발과 품질로 승부하겠다는 혼다 리더십이라 불리는 ‘혼다이즘(Hondaism)’의 탄생입니다. 이처럼 전 세계 오토바이 시장을 장악한 혼다의 다음 목표는 다름 아닌 자동차였습니다. 1969년 혼다자동차는 미국 시장에 진출합니다. 도요타, 닛산에 이어 3위 자동차 브랜드였던 혼다는 미국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또다시 승부수를 던집니다.

역시 또 기술력입니다. 혼다는 품질과 기술을 앞세워 마케팅과 홍보했고 값도 싼데다 고장이 없는 혼다자동차의 인기는 나날이 높아졌습니다. 그리고 오토바이에 이어 자동차 역시 F1 대회에 도전하며 1986년과 1987년 2년 연속으로 우승을 하는 쾌거를 거둡니다. 망신만 당하지 않아도 다행이란 시선을 보란듯이 비웃은 것입니다.

혼다 브랜드 로고
기술의 혼다를 이끌어온 혼다는 1973년 67세의 다소 이른 나이에 경영진에서 물러납니다. 기업의 경영은 젊고 똑똑한 사람들에게 맡기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었습니다. 혼다는 자신에게 관심이 쏠린다는 이유로 후임사장 취임식장에도 안갔고 기술고문이란 직함을 달고 전 세계 혼다의 직원들을 만났습니다. 일본 내 700여곳의 매장과 공장을 방문하는데 1년 6개월이나 걸렸습니다.

그 기간동안 수많은 직원들을 만나며 자신이 어떤 부분이 부족했는지 왜 실패를 했는지를 잘 알 수 있었다는 혼다 소이치로. 그는 여전히 일본이 자랑스러워하는 기술기업의 최고봉이자 존경받는 경영자로 남아 있습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오토바이를 대신해 혼다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만큼 동남아시아 시장에서의 혼다 브랜드의 힘은 압도적입니다. 또한 혼다의 가장 큰 단점은 고장 나지 않아서 바꿀 수 없다는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합니다. 기술의 혼다. 흔들리는 혼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혼다 소이치로의 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혼다 베스트셀링카 CR-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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