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열망’의 한국인, 사교육 대책은 없다[노원명 에세이]
최근 정립된 한국학 연구 성과들은 위의 주장이 과장·왜곡의 산물일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조선 왕조가 법제적으로 평민의 문과 응시를 금하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양반과 평민의 지위가 명확하게 구분되기 시작한 16세기 이후 평민의 과거 응시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평민은 족보를 갖지 못한 반면 과거 응시자는 친가와 외가 4대에 걸쳐 세계도(世系圖)를 증명해야만 했다. 재외 한국학 대가중 한명인 마르티나 도이힐러에 따르면 조선의 양반 개념은 절대적인 기준은 없었지만 현실에서 감각되는 것이었다. ▲계보상으로 추적할 수 있으며 널리 이름이 알려진 현조(顯祖)가 있어야 하고 ▲자신이 그 같은 선조의 후손이라는 사실이 일정 지역에서 인지되어야 하며 ▲명망 있는 가문들과 통혼(通婚)으로 연결되어야 하고 ▲제례나 과거준비 등 양반의 법도에 맞는 생활방식을 유지하면 양반이었다. 이같은 조건을 충족하면 비록 오랫동안 관직을 배출하지 못하더라도 지역사회에서 양반으로 인정받았다. 도이힐러에 따르면 이들 뿌리있는 양반의 경우 조선후기 정부로부터 관직을 사들인 ‘벼락부자’ 들로 인해 양반품계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을 때도 거의 영향받지 않았다. 실제 누가 양반인가는 지역사회가 그를 양반으로 인지하느냐에 달려있는데 그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평민에게 과거의 문을 열어둠으로써 조선왕조 몰락이 지연되었다는 주장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생각한다. 논밭 가는 평민이 과거에 합격한 사례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틀린 주장이다. 그러나 100년~200년 관직을 배출하지 못하고 경제적으로 몰락해 평민보다 생활이 나을게 없었던 잔반(殘班)들에게 양반이라는 특권의식(혹은 허위의식)을 부여해 끊임없이 과거에 도전하게 하고 그 결과 그들을 체제 지지세력으로 붙들어 놓은 것은 확실히 왕조 수명 연장에 도움이 됐을 것이라 본다.
그 ‘과거열망 DNA’는 현대에도 계승되고 있다. 아다시피 한국은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전통 계급질서가 완전히 무너졌다. 이 질서전복은 양반계급을 없앴지만 한편으로는 모두가 ‘나도 양반’이라는 주장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출세를 통한 신분상승 욕망이 조선시대에는 일부 향반이나 잔반에 국한돼 있었다면 근대 이후에는 전 국민이 출세경쟁에 나서는 시대가 됐다.
20세기에는 최고 명문대학을 나오고 국가고시에 합격하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 21세기에는 그것만으로는 안된다. 양반의 수효가 많아짐에 따라 내부 분화가 급속히 진행돼 이제는 양반계급내에도 여러 층위가 존재하고 모든 층위는 그들보다 아래 층위에 대해 배타적이다. 자수성가를 통한 당대 양반은 위계구조에서 맨아래 층위를 구성한다. 그들의 신분에 대한 집착과 불안은 신경증에 가깝다. 많아야 한두명일 자식이 삐끗하면 자신이 간신히 진입 성공한 양반신분에서 탈락하리라는 공포에 휩싸여 살아간다. 그는 자식을 의사같은 최고 전문직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그러면 통혼을 통한 신분의 상위 이동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어쨌든 모든 신분경쟁의 출발점은 학력이다. 금수저가 아니라면 명문대라도 들어가야 한다. 당대에는 어렵겠지만 성취가 2,3대 누적되다보면 양반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한국인은 경쟁심이 사후에까지 이어지는 독특한 민족이다. 자기보다 현달한 후손이 나오기를 진심으로 열망한다. ‘신의 뜻대로’ 한평생 살다 가면 그만인 기독교적 현세·내세관으로는 가늠이 안되는 세계관이다.
조선의 ‘범양반’ 계층들이 과거 하나만 바라보고 살았던 것처럼 한국의 중산·서민 대중은 자식의 진학에 전력을 투구한다. 조선 양반들이 대체로 전 인구의 10% 안팎이었다면 작금의 진학경쟁에 참전하는 계층 인구는 최소 50%는 되지 싶다. 나는 한국인의 생래적 계급인식 본능, 여기서 발원하는 신분상승 열망을 그대로 두고서는 사교육 대책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쪽이다. 어떤 것도. 그것이 우리 삶을 제아무리 속박하고 불행하게 만들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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