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배역 다양해졌지만…중년 여배우 '엄마 역할' 한계 여전
중·장년 女 배역 경쟁 치열…"엄마 아닌 다른 역할 해보고파"
(서울=연합뉴스) 오명언 기자 이승미 인턴기자 = "여자 배우도 나이가 들잖아요. 나이에 따라 역할이 달라지고 그걸 보면서 (제가 나이가 들었다고) 느껴요. 역할이 한정적이다 보니 어떻게 해야 하나 싶고 불안하기도 해요."
지난달 27일 방송된 채널A 프로그램 '고두심이 좋아서'에 출연한 데뷔 23년 차 배우 이유리(43)가 중년 여성 배우로서의 고충을 털어놓자 잠자코 듣고 있던 대선배 고두심(72)은 이렇게 답한다.
"(방송계가) 여자 배우들을 빨리 늙히는 것 같아. (시간이 지나면) 고모, 이모가 되고, 주인공 위치에서 벗어나 조연이 되고 단역이 돼. 그걸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해."
올해 송혜교의 '더 글로리', 이보영의 '대행사', 전도연의 '일타 스캔들', 엄정화의 '닥터 차정숙' 등이 잇따라 흥행몰이하면서 최근 안방극장은 40·50대 여자 배우들의 전성시대라는 말이 나온다.
실제 현장에 있는 배우들이 체감하는 변화는 어떨까.
우선 '드라마의 여왕'이라 불리던 배우들은 어렵지 않게 다양해진 여성 서사물의 주인공 자리를 꿰차며 '제2의 전성기'를 누리는 것이 사실이다.
대표적으로 배우 김희애는 넷플릭스 시리즈 '퀸메이커'에서 선거판을 뒤흔드는 이미지 메이커를 연기했고, 개봉 예정인 영화 '더 문'에서는 미국항공우주국(NASA) 우주정거장 총괄 디렉터 역을 맡는다.
넷플릭스 새 오리지널 시리즈 '돌풍'에서는 정치판을 바꾸려는 국무총리에 팽팽하게 맞서는 경제부총리를, 웨이브 범죄 영화 '데드맨'에서는 정치권을 쥐락펴락하는 묘령의 컨설턴트를 연기한다.
김희애는 앞서 진행된 '퀸메이커' 제작발표회에서 "예전에는 주로 남성 배우가 많이 나오는 장르가 많아서 저도 남장하고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장르물에 너무 출연하고 싶었다"며 "여성 서사물을 이끌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찍부터 '톱스타'가 돼 그 자리를 유지해온 경우가 아닌 이상 좁은 문을 뚫기 위한 경쟁은 여전히 매우 치열하다.
39세에 드라마 '응답하라 1988'(2015)에서 엄마 역을 맡으며 스타덤에 오른 연극배우 출신 김선영은 최근 영화 '드림팰리스' 개봉을 앞두고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유리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는 작품마다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이는 내로라하는 '연기파 배우'이지만, "요즘 계속 놀고 있다. 정말 연기할 기회가 없다"고 털어놨다.
김선영은 "작품을 찾아보면 배역 80%가 남자고, 20%가 여자인데 (경쟁이) 굉장히 치열하다"며 "거기서 50대 여성이 들어갈 수 있는 시나리오가 많지 않다"고 했다.
이어 "드라마도, 영화도 50대 여성이 자식에 대한 모성 연기 말고 그냥 독립적인 서사가 있는 시나리오가 많지 않다. 그런 (독립적인 서사가 있는) 작품이라면 어떤 역할이든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응답하라 1988'에 함께 출연해 얼굴을 알린 라미란도 이제는 엄마가 아닌 다른 배역을 선택하고 싶다는 마음을 내비쳤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나쁜엄마'에서 아들의 행복을 1순위로 여기는 엄마 진영순으로 열연하며 호평받았던 라미란은 종영 기념 인터뷰에서 "아직 '응답하라 1988'의 '치타여사' 이미지도 떼지 못했는데, 이미지 변신을 하고 싶으니 '국민 엄마'라는 수식어는 사양하고 싶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면서 "과거에 비해 중년 여성 배우들이 출연하는 작품이 많아졌는데, 역할이 작더라도 재밌고 의미 있는 작품이면 도전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과거에 여자 배우들은 제아무리 한 시대를 풍미했던 '톱배우'였더라도 50대로 접어들면 자연스럽게 주인공의 어머니 역을 맡으며 변두리로 밀려났었다.
지금은 시대가 변해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여성 배우들이 맡을 수 있는 배역이 과거보다 다양해졌지만, 아직 중년 여성 배우들에게 '엄마 역할'이라는 한계를 깨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는 "김희애, 전도연 같은 톱스타가 여성 서사물의 주인공으로 자리를 유지하는 경우는 전보다 많아졌지만, 여자 배우들이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주연급 중년 배우로 성장하기는 여전히 어려운 상황"이라고 분석했다.
cou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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