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송희일의 견문발검] 부자들의 환경주의, 서울국제환경영화제
상황이 이렇게 긴박한데도, 되려 한국의 환경운동 진영 일부는 반환경 세력과 결탁되어 있다. 지난 6월7일 폐막한 '서울국제환경영화제'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미디어오늘 이송희일 영화감독]
지난 금요일(24일), 영국에선 프라이드 퍼레이드 50주년을 기념하며 '영국 성소수자 어워드(British LGBT Awards)'가 성대하게 열렸다. 성소수자 인권과 프라이드(Pride)의 가치를 알린 인사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행사. 배우 엠마 왓슨 등 유명 인사들이 후보에 올랐고, 정장 차림의 스타들이 시상식 포토 월에서 한껏 유명세를 과시했다.
그런데 어워드가 열리던 그 시각, 시상식 건물 앞에 일단의 성소수자들과 기후활동가들이 보이콧 시위를 벌였다. '무지개 자본주의가 아니라 해방', '화석연료 속에 프라이드는 없다'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소란을 피웠다. 시상식 안에도 프라이드, 시상식 밖에도 프라이드. 공교롭게 두 개의 프라이드가 대척한 셈이다.
화근이 된 건 시상식 후원 목록에 들어간 비피(BP)와 쉘(Shell)이었다. 두 기업은 영국에 기반을 둔 세계 최대 석유기업들이다. 사실이 알려지자 수상 후보의 일부가 사퇴하는가 하면, 곧장 항의가 쇄도했다. 성소수자 기후운동 조직인 파슬 프리 프라이드(Fossil Free Pride)는 시상 후보들에게 보이콧 동참을 호소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이 기업들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토지를 약탈하고, 주요 생태계를 파괴했으며, 환경 재앙과 군사 폭력에 투자한 책임이 있습니다. 영국 성소수자 어워드에서 이러한 기업들을 광고하는 것은 성소수자 공동체의 패배이자 우리가 국제적으로 연대하는 모든 사람에 대한 모욕입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어워드 측은 후원 명단에서 BP와 쉘을 슬그머니 제외했다. 보이콧이 만들어낸 성과였지만, 문제가 다 사라진 게 아니었다. 여전히 후원 명단에는 네슬레, 아마존, 맥쿼리 캐피탈 같은 환경오염 기업들이 존재했다. 시상식 당일, 면전에서 항의 시위를 벌이다 경비원과 마찰을 빚은 한 트랜스 저널리스트의 인터뷰는 정곡을 찌른다.
“성소수자 권리는 저항과 항의를 통해 만들어진 겁니다. 그런 식으로 프라이드는 항상 저항과 연결되어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태어난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와인잔과 카메라 셔터로 북적이는 시상식 분위기와 달리, 도로 길가에 운집한 채 춤추고 목청 높여 연대의 언어를 발화하는 활동가들의 세계는 완연히 다른 풍경을 빚고 있었다. 전자가 부자들의 프라이드라면, 후자는 빈자들의 프라이드일 것이다. 시위 참여자들은 부자 성소수자의 시상식 파티가 '핑크워싱'과 '그린워싱'을 동시에 도모한다고 비판한다. 핑크워싱은 제국주의 국가와 기업들이 인권 친화적인 이미지로 치장하기 위해 성소수자 친화적인 마케팅이나 정책을 활용하는 것을 의미하고, 그린워싱은 실제로는 오염을 지속하고 탄소를 대량 배출하면서도 마케팅과 후원을 통해 환경 친화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는 기만적인 위장 환경주의다.
예를 들어, 거대 석유기업 BP는 마케팅과 후원으로 오랜 기간 영국의 성소수자 진영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해왔는데, 사실 석유를 판매하기 위해 이집트를 비롯한 권위주의 정부와 우익 정치 후보들을 지원함으로써 많은 나라의 성소수자들을 위험 속으로 밀어넣은 터였다. 그린워싱이자 핑크워싱, 그저 검은 기름의 이미지를 세탁하기 위해 무지개 깃발을 이용하는 표리부동의 위선이라는 반발이 뒤따르는 이유다.
2017년 미국 워싱턴 D.C의 퀴어 퍼레이드에 일단의 활동가가 바리케이드를 치고 행진을 보이콧했던 사건 이후, 화석연료 자본과 환경오염 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는 주류 성소수자 행사와 이벤트에 대한 난입과 저항이 점차 거세지는 형국이다. 최근의 유럽 퍼레이드에서도 똑같은 양상의 보이콧이 발생하기도 했다.
'기후정의가 퀴어정의다'라는 슬로건은 기후위기를 유발한 이 세계가 이윤 축적과 성장에만 골몰한 채 사회적 소수자들을 배제하고 불평등을 조장해온 역사적 관행의 결과임을 폭로한다. 가령, 미국과 영국의 청소년 노숙자의 28% 남짓이 성소수자들이다. 커밍아웃 후 집에서 쫓겨나거나 가출한 처지다. 주택과 직업이 불안정한 탓에 폭염과 홍수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다. 또한 2005년 미국 뉴올리언스를 휩쓴 카트리나 태풍에서부터 2022년 홍수로 90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한 방글라데시에 이르기까지 트랜스젠더들은 연속되는 기후 재난 속에서 혹독한 배제와 모욕을 겪어야 했다. 최근 성소수자 기후운동이 급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모름지기 새로운 풍경으로의 전환이며, 시대사적 변화다. 영국 성소수자 어워드 사태는 기후위기가 가속되면서 하루라도 더 빨리 화석연료와 환경오염을 퇴출하려는 움직임이 전방위적으로, 다양한 형태로 분기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장면이다.
상황이 이렇게 긴박한데도, 되려 한국의 환경운동 진영 일부는 반환경 세력과 결탁되어 있다. 협치와 ESG 명목으로 화석연료 기업과 대기업의 그린워싱에 조력하는 세탁실을 자처한다. 천연가스 기업, 화석연료 투자 금융 등의 로고들로 치장한 채 탄소중립 행사를 여는가 하면, 기업과의 파트너십을 애지중지하며 조직의 덩치를 키우는데 여념이 없다. 지난 6월7일 폐막한 '서울국제환경영화제'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명색이 '환경' 영화제인데, 후원 명단에 환경 악당으로 지목된 기업들의 로고가 휘황하게 반짝거린다. 삼척화력발전소의 최대 주주인 농협은행, 국내 최대 온실가스 배출 기업인 포스코, 팜유 생산 과정에서 대규모 화재, 환경 훼손, 지역 주민 피해를 야기했다는 이유로 인도네시아 정부로부터 180억의 벌금을 물었던 삼성물산 등 이게 환경을 위한 영화제인지, 환경파괴 기업들을 위한 잔치인지 아연실색의 지경이다.
반인권적 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은 인권영화제가 성립 가능할까? 노동자 착취 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는 노동영화제는 정합성을 가질 수 있을까? 과연 무기 기업들로부터 후원을 받는 평화영화제는 존립의 근거가 있는 걸까? 그런데 이 형용모순이 환경 쪽으로만 건너오면 극구 자기 합리화를 앞세운다. 지속적 경제 성장, 기술과 시장의 발전, 그리고 기업과의 협치를 통해 환경 오염을 줄일 수 있다고 착각하는 기이한 자기 세뇌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환경을 파괴하고 재앙적 규모의 탄소를 배출하는 기업이라고 하더라도.
캐나다 저널리스트 나오미 클라인은 80년대 신자유주의를 경유하며 주류 환경운동이 풀뿌리운동의 전투적 야성을 상실하고 기업과 시장의 품에 뛰어들어갔다고 비판한다. <부자들의 환경주의>를 펴낸 피터 도베르뉴도 오늘날 주류 환경주의가 '분노'를 잃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분노의 정신을 회복해야만 극심한 불평등, 파괴적인 성장, 생태적 붕괴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부자들의 환경주의는 결국 환경오염 기업과 화석연료 자본주의에 면죄부를 발급하고 위기를 지연시키는 공동정범에 가깝다. 환경을 내세워, 환경을 헐값에 팔아치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영국 시상식 저 앞의 저 반짝거리는 소란이 우리에게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보이콧과 항의도 없었고, 환경운동의 프라이드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이 시대에 무려 환경영화제가 화석연료와 환경오염을 보호하는 괴이한 행보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거의 전무하다는 사실, 그게 더 쓰리다. 부자들의 환경주의는 시민의 무관심과 냉소를 먹고 자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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