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아기' 등에 업고…엄마는 미쳐 있었다
참전용사 허먼은 머나먼 네덜란드에서 한국에 와 전쟁을 치렀다. 라미 현 사진작가(43)가 그를 만나러 갔다. 한국전쟁 당시 기억을 물었다.
헌병으로 있을 때였다. 허먼은 한 여자를 봤다. 그는 등에 무언가를 업고 미친 사람처럼 이리저리 걸어 다녔다. 자세히 보니 죽은 아기였다. 아이를 잃은 엄마였다. 그리고 시신은 이미 부패해 있었다.
먹을 걸 줘야 할지, 뭘 해줄 수 있을지, 허먼이 고민하자 간호사가 말했다. "저 분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게 없어요. 저 아기가 세상을 떠난 그 순간부터는요." 그게, 허먼이 기억하는 전쟁의 가장 참혹한 순간이었단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6.25 전쟁. 사망자는 한국군 13만7899명, 유엔군 3만7902명. 미군은 3만3686명. 정말 많은 이가 나라를, 자유를 지키려다 숨졌단 걸 잘 안다. 그러나 숫자가 드러내지 못한 이야기가 이리 자세했다.
전쟁이 끝나고 자기 나라로 돌아간 참전용사들. 이들을 만나러 전 세계를 다니며 2000명의 사진을 찍은 라미 작가. 그는 사진액자로 참전용사를 울리고 자부심을 채워주었다. 그리고 또 하나 큰 의미를 남겼다. '전쟁을 겪은, 사람의 기록'이다.
"사진은 돈을 버는 수단이 되기도 하지. 하지만 진정한 사진은 중요한 매개체야. 지금 시대를 기록해서 다음 세대로 전달해주는 거지."
그 가르침에 따라 직접 찾아가 참전용사 얘길 기록했다. 교과서로 배운 한국전쟁과 달랐다. 그 얘길 기록했다. 나도 라미 작가가 남긴 기록을 봤다. 책도 보고 영상도 봤다. 라미 작가와 인터뷰 한 날 처음 고백했던 얘긴 이거였다. 나도 기록하는 사람인데, 너무 모르는 게 많았다고. 부끄럽다고. 그가 이리 말했다.
"우린 교육을 못 받았거든요. 6.25를 배울 때 전쟁, 전투를 홍보하지, 개개인의 스토리를 못 듣는 거지요. 사람을 배운 게 아니라 덩어리를 배웠잖아요. 그러니 요즘 세대는 전쟁 사진을 봐도 영화 한 장면처럼 느껴지는 거고요."
그후 참전용사를 만나 자세한 얘길 들었다. 전쟁도 희노애락이었다. 삶의 일부분이었다. 탄생과 죽음도 있지만 사랑도 있었다. 민족의 비극이라던가, 북한 괴뢰군 같은 게 다가 아녔다.
영국에서 참전한 알렌 가이. 그는 리버풀에 살았다. 어렸을 때부터 2차 세계대전을 겪어 폭탄 소린 무섭지 않았다. 부산항에 도착했을 때였다. 사람들이 다 까맣게 탔다. 까만 산에 까만 흙뿐인데, 하얀 십자가 수천 개가 있었다. 함께 있던 군인들이 그걸 보며 일순간 조용해졌다.
알렌 가이가 말했다. "다들 그걸 보며 직감한 거예요. 아, 여긴 웃고 떠들 곳이 아니구나. 나도 곧 저렇게 될 수 있겠구나." 의무병이었던 그가 가장 두려웠던 건, 전장에서 오는 시체 썩은 냄새였다.
미 해병대이자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던 노먼 보드. 돌아다니던 삽살개, 믹스견 등을 데려와 키웠단다.
처음엔 다들 "내보내, 병균 옮아"라며 나무랐다. 그리고 어느 컴컴한 밤, 해병대가 수색하러 나갔을 때였다. 노먼이 귀엽다며 키우던 강아지 'Rebel(레블)'을 함께 데리고 나왔다. 달빛도 없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였다.
'으르르릉, 컹컹.'
순했던 강아지가 해병대 뒤쪽을 보며 짖었다. 이상해서 그쪽을 향해 조명을 쐈다. 그런데 뒤에서 중공군이 오고 있었다. 강아지가 아녔다면 꼼짝없이 뒤에서 습격당할뻔 했다. 다음 날부터 미 해병대에선 이리 명령을 내렸단다. "야간 수색할 때 개를 반드시 데리고 나가라."
미국 뉴저지에서 한국으로 와 참전했던 용사. 그는 지휘관이었다. 그리고 참혹한 전쟁서 잃은 부대원들을 기억하며 자책하고 있었다.
"전쟁에서 내가 잘한 건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애들 죽인 것 말고 없어요. 다 내 책임이지요."
그러던 참전용사가 문득, 잘한 게 딱 하나 있다고 했다. 라미 작가가 그에게, 그게 뭐냐고 물었다.
"내 애들이 죽으면 모든 조각들을 모았습니다. 창자, 손가락 하나하나, 피 묻은 흙까지 전부 다요. 폭탄에 죽었든 뭐든, 몇 시간이 걸리든 모아서 지퍼백에 담아주었습니다. 몇 조각이 안 남았어도 챙겨주었어요. 그거 하나는 자랑스럽습니다. 그 덕분에 부대원들이 날 믿고 따라주었지요."
"Do you think about suicide now? Press 1.(지금 자살을 생각하십니까? 1번을 누르세요)"
라미 작가에게 실제, 자살한 참전용사가 많느냐고 물었다. 그는 "엄청 많다"고 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 사는 참전용사, 로버트 버스틴. 그는 전쟁 후 15년간 한 달 넘게 직업을 갖지 못했다. 사람들과 못 견뎌 떠돌이 생활을 했다. 그러다 보훈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치료를 받고, 아내를 만나 평생 살았다. 라미 작가가 말했다.
"자기 부대 다 죽고, 나만 살았다면요. 살아 돌아오는 게 죄인인 거잖아요. 못 버티죠. 돌아가실 때 전우 이름 부르며 이렇게 말해요. 'Oh, Jack. I'll be there.(잭, 내가 갈게. 조금만 기다려)'"
끝끝내 사진 촬영과 인터뷰를 거절한 이도 있다. 2021년에 있었던 일. 지인이 참전용사라며 소개해줘서, 미국 새크라멘토에 찾아갔다. 가서 전화했더니 정작 당사자인 참전용사가 이리 말했다.
"나 그거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어떤 일 당했는지 알아? 얘기하고 싶지 않은데 왜 그 기억을 또 끄집어냅니까."
평생 꺼내놓지 못했던 얘기. 참전용사는 화내면서도 꺽꺽 울고 있었다.
라미 작가의 유튜브 채널을, 책 <69년 전에 이미 지불하셨습니다>(마음의 숲)를 보며 생각했다. 덜컹덜컹, 지하철을 타고 퇴근할 때였다.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원하는 목소릴 내고, 비판하고, 이리 평범히 살 수 있는 '자유'. 그게 이리 힘들게 얻어진 줄 몰랐다고. 평범한 일상이 다시 느껴졌다.
라미 작가가 인터뷰할 때 쓰고 온 진초록색 모자엔 이리 쓰여 있었다. 'Freedom is not free(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그 문장도 엄청나게 크게 보였다. 그 기록엔 어떤 힘이 있기에, 마음을 울리는 걸까. 라미 작가에게 물었다.
"사람 이야기와 목소리는 '감정'이란 게 있잖아요. 그래서 변할 수 있는 거지요. 예를 들면 하얀 벽인데 핑크로, 리트머스 시험지처럼 퍼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어느 순간 흰색이 아니라 핑크가 되겠지요. 이걸 보고 다른 사람이 또 바뀌고요. 그런 과정이 되면 성공이에요."
기록을 보면 언젠가, 또 누군가, 다음 세대일지라도 보고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기록이 없으면 '기회'조차 없다. 그게 기록의 힘이란다. 영화가 아닌 실제 경험이다. 그래서 몰입하고 마음이 울린다. 라미 작가는 "사람 이야기로 역사가 바뀌면 좋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아직 늦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맘이 급하다. 기록은 값지지만, 그를 위해 치러야 할 비용도 값이 많이 든다. 모아둔 기록을 콘텐츠로 만드느라 4명이 그를 돕고 있다. 번역하고, 핵심을 뽑고, 스토리를 만들고, 영상 작업을 하고, 다시 한국 자막을 입힌다. 이걸 매일매일 해서 짧은 영상을 유튜브에 올린다. 비영리 사단법인이라 인건비도 충분히 못 준다. 그 가치를 알고, 함께해준 직원들에게 엄청 고맙다고 했다.
모아둔 것, 카메라를 판 것, 대출받은 것까지 다 해도 올해면 비용을 다 쓸 것 같단다. 지금껏 쓴 비용만 대략 10억원 정도. 라미 작가는 "SF 같지만 가장 원하는 게 있다"고 했다. 20명 팀을 만들어서 한국전쟁 참전한 22개국을 자유자재로 다니며, 참전용사를 만나 기록하는 것. 인터뷰하고 사진을 전시하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 "돈만 있으면 1년이 안 걸릴 거예요"라던 그의 말이 씁쓸했다. 이게 개인이 이리 고군분투할 일인가 싶어서.
한국 정부에 당부했다. 간절한 바람이 느껴졌다. "진정성 있게 하는 분들이 많아요. 그런 분들 지원하고 일 맡기면 되고요. 그런데 공무원, 정치인, 장관 차관이 자꾸 자기가 하려고 합니다. 전시행정이 많아요. 높은 사람일수록 뒤에서 서포트만 해주면 됩니다."
그러면서 아예 미국에 가서 프로젝트를 할지도 고민한단다. 미국이 보여준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 그건 정말 달랐다고.
라미 작가가 캠핑카를 타고 다니며 참전용사 150명을 만날 때였다. 경찰에게 네 번 단속당했다. 아시안이 캠핑카 운전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의심했단다. 그가 참전용사들을 만나고 기록한다며, 경찰에게 설명하자 이리 답했단다.
"단속 티켓을 끊을 수 없잖아요. 우리 할아버지도 참전용사였습니다. 당신이 하는 일에 진심으로 감사를 표합니다. 운전 조심하세요."
남형도 기자 human@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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