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에 살면 현금 수천만원은 있어야 한국서 민사소송"
(서울=연합뉴스) 이영섭 기자 = 프랑스에 사는 여성 A씨는 한국에 사는 전남편에게 받을 돈이 약 8억원이다.
이 빚을 받아내려고 국내 한 신용정보회사에 전남편의 자산 조회를 의뢰했다. 신용정보회사는 전남편 명의 부동산은 없다고 통보했고 이에 A씨는 그의 월급에 대한 압류 절차를 시작했다.
그러나 전남편은 자기 명의의 아파트를 팔아 처분한 후 회생 신청을 했다. 알고 보니 신용정보회사에서 전남편의 자산 현황을 잘못 알려준 것이었다. 법원은 회생절차 개시 여부를 결정할 때까지 모든 채권을 동결했다.
A씨는 신용정보회사에 채권 추심을 방해한 책임을 물어 아파트 가격인 6억원 상당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문제는 이 업체가 "A씨가 패소하고도 소송비용을 안 낼 우려가 있다"며 소송비용 담보제공을 신청하며 드러났다. 재판부는 신청을 받아들여 A씨가 약 4천500만원을 담보로 공탁하되 보증보험 증권으로 갈음할 수 있도록 명령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이런 보증보험 서비스를 사실상 독점하는 서울보증보험(SGI서울보증)은 '외국에 산다'는 이유로 A씨의 보험 가입을 거절했다.
결국 A씨는 현금으로 4천500만원을 마련하지 못하면 소송을 시작도 못 할 처지에 놓였다.
A씨를 대리하는 법무법인 온세상의 김재련 변호사는 2일 "거액 현금이 없으면 외국 거주자가 국내 법원에서 소송을 걸기 어려운 구조"라며 "외국인 소송권의 심각한 침해"라고 지적했다.
A씨처럼 외국 거주자가 보증보험에 발목이 잡혀 국내 법원에서 소송을 치르는 데 어려움을 겪는 일이 적지 않다.
민사소송법상 소송비용은 패소한 쪽에서 부담하는 게 원칙이지만 원고가 패하고도 소송 비용을 내지 않으면 피고가 그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을 수 있다.
이를 막기 위해 법원은 원고에게 소송비용에 대한 담보를 제공하도록 명령할 수 있다. 통상 소송비는 보증보험 증권으로 대신한다.
보증보험 특화 서비스업을 하는 사실상 유일한 곳인 서울보증보험은 "외국인도 내국인과 같이 개별 사건의 위험성 등을 고려해 가입 여부를 판단한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실무선에선 외국 거주자는 보증보험에 가입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 변호사는 "A씨가 프랑스에 산다고 하니 관련 서류를 받아보지도 않고 '가입이 안 된다'고만 하더라"고 주장했다.
외국인의 법률대리를 전담하는 IPG리걸 법률사무소 민지원 변호사는 "과거 한국에 살았던 외국인은 보증보험 가입이 되는 경우를 봤지만 한국에 거주지나 직장 등 최소한의 연고가 없다면 가입이 매우 어렵다"고 설명했다.
그는 "미군 출신 의뢰인이 양육권 관련 문제로 3억원 상당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가 4천만원을 공탁하라는 결정을 받았는데 외국에 산다고 보증보험 가입이 막혔다"고 말했다.
이 문제는 국내 소송 제도가 외국 거주자보다 국내 거주자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소송비용 담보제도의 취지가 결국 피고의 이익을 보호하려는 것인데 외국에 있는 원고에게 거액의 소송비를 미리 내도록 하는 이유는 그만큼 피고가 소송비를 받지 못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이에 외국 거주자가 현지에서 가입한 보증보험을 담보물로 인정해주는 방안이 하나의 해결책으로 언급된다.
민 변호사는 "미국에도 소송비 공탁 제도와 관련 보험 상품이 있다"며 "현지 보험가입 증서를 국내 법원이 받아주면 그나마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제안했다.
다만 이는 법원의 재량권을 넘어서는 일일 수 있다. 민사소송규칙은 지급보증 위탁계약을 "은행법상 금융기관이나 보험회사와 맺은 것"이라고 규정하는데, 소송비용 보증상품을 취급하는 외국 은행은 국내 은행법 적용 대상이 아닐 가능성이 커서다.
김 변호사는 "A씨는 공탁할 소송비를 마련하려고 대출을 신청했다"며 "재판받을 권리에서 외국인이 차별받는 이 문제는 국가인권위원회의 직권 조사가 이뤄져야 할 사안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youngl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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