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상인 두 남자의 느닷없는 키스…외교적 초대형사고?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3. 7. 2. 06: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색-28] 두 거물의 만남이었습니다. 사회주의의 대표 국가를 대표하는 정상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었지요. 육중한 체구에서 카리스마가 뿜어져 나옵니다. 두 사람의 패기에 주변 사람들은 식은땀을 흘릴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 가까이 다가가더니 갑자기 입을 맞추기 시작합니다. 볼에 살짝 입을 갖다 대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정확히 포개집니다. 마치 연인인 것처럼요. 세계 언론이 주목하는 외교적 현장, 숨겨왔던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었을까요. 할리우드 퀴어 영화의 한 장면처럼요.

소련 서기장 레오니트 브레즈네프(왼쪽)가 1979년 동독 탄생 30주년을 맞아 동독 총리 에리히 호네커에게 키스하는 모습.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정말 진한 키스였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동독의 지도자 에리히 호네커가 소련 서기장 브레즈네프를 만났을 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1979년 동독 건국 30주년 기념행사에서 두 사람이 느닷없이 진한 키스를 나눈 것이었지요.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습니다.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듯이 받아들였지요. 사회주의에서는 가까운 국가의 정상들은 입을 맞추는 게 관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눈에는 매우 당혹스러워 보이는 문화이지만, ‘키스’라는 행위는 여러 문화에서 다르게 해석되기 마련입니다. 우리 문화에 어색하다고 그것이 남에게도 부자연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의미지요.

베를린 장벽 동쪽에 묘사된 두 사람의 키스 모습. 이 사진은 하나의 문화적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사진=Joachim F. Thurn>, <저작권=Corbis Corporation>
오늘은 키스의 역사를 사색합니다. 사회주의 리더인 중년 남성들이 키스하게 된 맥락부터 고대에서 현대까지 이어진 입맞춤의 변천사를 돌아봅니다. 오는 6일이 국제 키스의 날이어서입니다.
19세기 영국 화가 프랭크 딕시가 그린 로미오와 줄리엣. 연인 간의 낭만적인 키스를 수려하게 묘사했다.
사회주의자들은 왜 남자끼리 키스했을까
냉전의 시대, 사회주의 리더들은 키스로 스스로 유대감을 표시했습니다. 문화적으로 가까운 자본주의 세계 지도자들보다 훨씬 ‘끈적한’ 스킨십을 보여줬지요. 기본적인 관계에서는 포옹을, 조금 가까운 사이면 볼 키스를 했으며, 형제와 같은 지도자끼리는 입을 맞췄습니다. 키스에 관용적인 유럽에서도 남자끼리 입을 맞추는 일은 드물었기에 학자들은 이를 사회주의 형제애 키스(Socialist fraternal kiss)라고 불렀지요.
“스탈린 동무, 입맞춤 한번 해주갔소?” 조종사 발레리 차칼로프가 1936년 소련 독재자 요제프 스탈린에게 키스를 시도하는 모습. <사진출처=Alamy>
이들의 키스에는 맥락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종교’입니다. 공산권 국가인 러시아와 동유럽에서는 로마 가톨릭에서 1000년 전에 분리된 동방정교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었지요.

동방정교회에서는 종교적 존중의 표현으로 입맞춤하곤 했습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들어서기 전인 러시아 제국에서도 군인과 장교사이의 키스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지요. 일찍이 사회주의 이론을 완성한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선언했지만, 개개인의 생활 깊숙이 스며든 종교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동방정교회 걸작으로 통하는 블라디미르의 성모. 12세기 작품. <t사진출처=위키피디아>
정교회가 키스에 관대한 건 초기 기독교가 ‘평화의 입맞춤’을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초창기 때는 영적인 헌신의 표현으로 키스를 권장했지요. 사도 바울은 “거룩한 입 맞춤으로 서로 경의를 표하라”고 말했습니다. 로마서, 고린도전서, 베드로전서에도 같은 구절이 수시로 반복되지요. 동방정교회는 로마 가톨릭보다 초기 기독교의 모습을 갖췄던 탓에 동성간 키스 문화가 좀 더 오래 남아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사회주의 형제애 키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퍼져 나갑니다. 소련의 주도로 동유럽·남미·남아프리카·팔레스타인 등지에 사회주의 권력이 힘을 얻으면서 키스 문화도 함께 퍼진 것이었지요.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마오쩌둥(왼쪽)이 1957년 베이징을 방문한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 당시는 중소 갈등이 심한 상황이라 두 사람은 사회주의 형제애 키스를 생략했다.
진한 포옹과 키스는 두 사회주의 국가가 얼마나 서로를 신뢰하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였습니다. 반대로 이를 생략한다는 건 그들의 관계가 틀어졌다는 걸 의미했지요. 중국과 소련의 관계가 소원해진 이후인 1957년 니키타 흐루쇼프가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흐루쇼프가 마오쩌둥을 포옹하려고 하자, 그는 뒤로 물러서면서 대신 악수를 청했지요. 그들의 관계가 봉합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신체 접촉을 꺼리는 유교문화도 마오쩌둥의 행동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키스를 금기시하는 나라들
사회주의 형제애 키스가 증명하듯, 키스는 언제나 연인 간의 전유물은 아니었습니다. 또 어느 문명에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지요. 오히려 일부 문명에서 키스는 ‘금기’ 중 하나였습니다. 인류의 약 10% 정도는 키스를 전혀 하지 않는다고 분석됩니다.(하고 싶은데 못하는 분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ㅠㅠ).
“키스는 절대 안하지 말입니다.” 수단에서는 키스가 영혼을 빼앗아 가는 행위로 여겨진 것으로 전해진다. 사진은 20세기 초 수단의 원주민. <사진출처=위키피디아>
수단의 일부 지역에서는 입이 영혼의 관문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키스를 꺼린다고 합니다. 입과 입을 통해서 영혼이 빠져나간다고 믿는다는 것이지요. 심리학 교수인 일레인 헷필드(Elaine Hatfield)는 “키스는 보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고 많은 사회에서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행위이지만, 일부 지역에서는 여전히 공개 키스가 터부시 되고 있는 것이지요.
키스, 언제부터 시작되었나
키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고대 힌두교의 산스크리트어 경전인 ‘베다’에서 발견됩니다(텍사스 A&M 대학교 인류학자 본 브라이언트). 기원전 1500년 전의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500년 전의 일이었지요.
힌두교의 고대 산스크리트어 텍스트인 베다는 키스가 기록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여겨진다. <사진 출처=위키피디아>
인도 지역에서 보편적이었던 키스가 유럽으로 건너간 건 기원전 350년. 알렉산더 대왕이 이 지역을 점령하면서 고대 그리스에도 키스 문화가 정착됐다는 설명입니다. ‘키스의 본고장’인 인도에서는 최근 공개키스가 만연하자 이를 “서구문명의 산물”이라고 반발하는 목소리가 높다고 하지요. 역사는 변화한다는 걸 보여주는 방증입니다.
고대 로마 폼페이에서 발견된 키스 벽화. 연인끼리의 입 맞춤으로 보이지만, 여자는 고급 창부 ‘헤테이라’였다. 고대 로마 남성들에게 성적인 건 창부를 통해서, 가사는 부인을 통해 해결했다. <저작권자=ArchaiOptix>
고대 그리스를 계승한 로마인들은 키스를 즐길 줄 아는 민족이었습니다. 존경심을 표현할 때도, 애정을 드러낼 때도 키스했었지요. 부위에 따라 키스의 다른 명칭을 붙인 것도 로마인들이었습니다. 손이나 뺨에 입을 갖다 대는 건 오스쿨룸, 친척끼리 입을 다물고 입술을 맞추는 건 바슘이라고 했습니다. 열정적인 키스는 수아비움이라고 불렀지요.
기독교에서 입맞춤은 종교적 의미였다
기독교에서도 키스는 연인 간의 애정보다는 어떤 존중의 의미를 담고 있었습니다. ‘키스와 그 역사’의 저자 크리스토퍼 니롭은 “입맞춤은 감사, 동정심, 기쁨과 슬픔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고 썼습니다. 구약성경 속 창세기에서도 야곱이 쌍둥이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입 맞췄다는 구절이 전해지지요. 유대 민족을 이집트에서 구해낸 모세 역시 장인어른과 입을 맞췄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구약 성경 속 요셉이 야곱에게 키스하는 모습. 1897년 성경에 수록된 삽화.
초기 기독교에서 평화의 입맞춤은 중세까지 이어졌습니다. 니롭은 “키스로 적의 화해와 평화를 봉인하는 것이 관습”이라고 했지요. 기사들조차도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서로에게 평화의 키스를 했습니다. 세례, 결혼, 고백, 안수 또는 장례식과 같은 엄숙한 행사에서 교회 의식에서도 왕왕 행해졌지요. ‘거룩한 입맞춤’이었습니다. 유다의 키스처럼 입맞춤이 때로는 배신의 행위로 여겨지기도 했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키스는 평화와 배신을 동시에 상징했다는 의미입니다.
중세 최대 스캔들 중 하나로 통하는 아벨라르와 엘레노이의 연애를 그린 작품에는 입맞춤에 대한 묘사가 많이 남아있다. 그림은 19세기 화가 장 비노가 1819년 그린 두 사람의 입맞춤 모습.
‘로맨틱’의 관점에서 키스가 서서히 떠오른 건 궁정문화와 기사도가 자리 잡은 11세기부터입니다. 20살의 나이 차이로 중세 최대 연애사건이라 불리는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이야기가 대표적이지요. 이들이 나눴던 편지에는 ‘키스의 달콤함’을 묘사하는 구절이 많았습니다.

성직을 공부하던 두 사람은 “우리는 수 많은 책 앞에서, 교훈보다는 키스를 더 많이 나눴다”고 썼습니다. 궁중 시인들 역시 키스를 찬미하면서 사랑하는 이들에게 입맞춤을 해 줄것을 갈구하는 시를 보내곤 했었지요.

독일 뉘른베르크의 연대기에 수록된 삽화 ‘죽음의 춤’(1493년). 흑사병으로 죽음을 묘사한 작품도 많아졌다.
그러나 중세 말에 이르자 상황은 변해갔습니다. 입맞춤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갔지요. 흑사병이 찾아왔기 때문이었습니다. 타인은, 또 타액은 지옥이 된 것이지요. 3년 전 팬데믹이 처음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요. 1439년 잉글랜드 왕국의 한 신하는 주군인 헨리4세에게 “전염병이 위험하니 백성들에게 키스하는 행위를 삼가야 한다”고 조언합니다.
대중문화가 키스를 왕좌의 자리에 올렸다
오늘날 키스가 대중화된 건 역시 자본주의의 힘이었습니다. 1896년 미국의 무성 영화 ‘The Kiss’는 낭만적인 입맞춤을 묘사한 최초의 영상이었지요. 18초 동안 두 사람이 입을 맞추는 초단편 영화였습니다. 당시 미국에는 청교도적 보수적인 사람이 많았던 지라 “역겹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작가 루이스 블랙은 “암흑기에서 키스를 부활시킨 건 미국이었다”고 썼을 정도였지요.
할리우드의 황금기인 1930년대에는 연인 간의 키스가 자연스레 묘사됐다. 사진은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년) 포스터.
1930년대 할리우드의 황금기에서 영웅적인 남성 주인공이 수동적인 여성과 키스하는 건 하나의 공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에 의한 평화)가 장기간 지속되면서 연인 간의 공개 입맞춤도 자본주의 국가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지요. 오늘날 우리가 사랑하는 연인과 편안히 키스할 수 있는 것에도 수 많은 역사적인 기원이 있었던 셈입니다.
식민지 시기 키스에 눈뜬 조선
우리 역사에서도 본격적으로 키스가 대중문화에 소개된 것도 이때쯤입니다. 이전 조선시대에도 ’접문‘이라는 이름의 입맞춤이 있었지만, 연애라는 개념이 부재한 시절이었습니다. 남녀가 입맞추는 행위를 묘사하는 표현이 자주 나오지는 않았었지요. 키스라는 표현을 볼 수 있었던 건 1930년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우리 문화에도 연애와 키스가 새겨지기 시작합니다.
신윤복 월야밀회(1805년). 두 남녀가 키스를 하는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간송미술관 소장품.
“처음 사랑을 허한 젊은남녀가 곽 그러안고 숨이 맥히도록 입술을 마죠 빠는 키스―이것이 키쓰로써의 절정일것.”

당시 잡지 ’제일선‘에 수록된 ’키스강좌‘ 구절입니다. 묘사가 직설적이면서도 정곡을 찌르지요. 당시에는 ’키쓰‘가 자유연애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구현체였습니다. 당연히 보수적인 식민지 조선에서 의견이 갈렸겠지요. 조선일보에서는 키스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했다고 전해집니다. 반면 동아일보와 매일신문은 키스를 문명과 결부시켜 밝은 면을 조명하지요. 지금의 신문사가 철학에 따라 갈리듯이요.

키스는 연인과의 설렘임과 동시에 배신의 상징이기도 했다. 또 그 외설성으로 많은 사회에서 반대에 부딪쳤다. 사진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카르바조가 묘사한 유다가 예수에게 키스하는 모습(The taking of Christ). 유다는 키스를 통해 로마군에게 누가 예수인지를 밀고했다. 1602년 작품.
그럼에도 반대는 있을지언정, 후퇴는 없었습니다. 우리에게도 키스는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습니다. 이제는 길거리에서도 서로에게 입을 맞추는 이들을 쉽게 볼 수가 있지요.
키스데이에 사랑하는 연인과 입맞춤을
키스는 경건함이었고, 우정의 상징이었으며, 때론 방종과 배신의 징표였습니다. 한 여름 밤, 선선한 바람이 설렁설렁 부는 들판을 상상합니다. 미풍에 흔들리는 꽃, 귀뚜라미 울음소리 한 가운데서 연인이 입 맞추는 모습이 떠오릅니다.

오늘날 키스는 사랑을 보증하는 최고의 증표입니다. 앙증맞은 아이에게, 사랑하는 연인에게, 존경하는 부모님에게, 애정의 키스를 보내보시길. 오늘이 아니면 기회는 언제 올지 모릅니다. 키스하기 가장 좋은 시간은 언제나 지금 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1908년).
<네줄요약>

ㅇ사회주의 국가의 정상들은 국가 간 우정을 강조하기 위해 키스를 하곤 했다. 존중을 나타내는 동방정교회의 영향을 받아서였다.

ㅇ기독교 문명에서도 존중을 표현하는 의미로 키스가 행해졌다. 흑사병 이후로 키스 문화는 주춤했다.

ㅇ할리우드의 영향으로 연인 간의 공개 키스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ㅇ키스합시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들을 볼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면서.

<참고문헌>

ㅇ오토 에프 베스트, 키스의 역사, 까치, 2001년

ㅇ이민희, 근대문화에 관한 문화지형도 구축, 2018

역사(史)에 색(色)을 더하는 콘텐츠 사색(史色)입니다. 역사 속 외설과 지식의 경계를 명랑히 넘나듭니다. 가끔은 ‘낚시성 제목’으로 알찬 지식을 전달합니다. 기자 페이지를 구독해주세요. 매주 토요일 알롱달롱한 역사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