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하 목숨 달렸는데 '물막이판' 거부한 집주인…"손해배상 가능성 커"
행정지도·안전배려의무 따져야…피해 예측가능성도 쟁점
(서울=뉴스1) 박우영 기자 = 정부와 지자체가 침수 취약 반지하 주택에 물막이판·개폐형 방범창 등의 설치를 진행중인 가운데 주택 소유자들이 거부하며 설치가 미진한 상황이다. 법률가들은 추후 세입자들이 집주인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에 나설 경우 집주인의 손해배상 책임이 성립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고 내다봤다.
2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민사 영역에서 활동하는 5명의 변호사는 이번 여름 침수 피해를 입은 반지하 등 주거취약가구(세입자)가 집주인에게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할 경우 승소 가능성이 상당하다는 데 대체로 동의했다.
법률가들에 따르면 법적인 쟁점은 크게 '행정지도'와 민법상 '안전배려의무' 두 가지다.
우선 물막이판 등을 설치해달라는 정부·지자체의 요청이 '행정지도'에 해당하는지 따져봐야 한다. 정부·지자체의 요청을 행정지도로 볼 수 있다면 물막이판 설치를 거부한 반지하 집주인에게는 과태료 등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행정 지도란 행정 관청이 '권력적·법적 행위에 의하지 아니하고 지도, 조언, 권고 따위의 수단으로 정책 목적을 달성하려는 일'을 말한다. 법상의 근거가 없는 행위도 행정 지도가 될 수 있는 만큼 물막이판 등을 설치해달라는 이번 정부 요청도 행정 지도로 판단될 여지가 있다.
정부와 지자체는 현재 마땅한 법적 근거가 없어 설치비 전액 지원으로 취약 반지하 주택에 물막이판·개폐형 방범창 등 설치를 유도하고 있다. 정부에 따르면 지난달 28일 기준 전국의 물막이판 설치 대상 반지하 3만3697가구 가운데 1만2012가구만 설치를 완료해 설치율은 36%에 머물러 있다.
A 변호사는 "이번 정부·지자체 권고를 행정지도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하는 문제는 다툼의 여지가 있다"며 "법원에서 어떻게 판단할지 예측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반면 B 변호사는 "더 자세히 따져볼 필요가 있지만 정부 권고가 행정지도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행정지도 여부를 판단하는 데는 여러 요건이 작용한다. 정부 기관이 서면으로 권고 내용을 제시하고 피의무자도 서면으로 관련 내용 제출을 요구할 수 있을 정도의 구체성 등이 그런 기준 가운데 하나다.
행정지도와 별개로 집주인의 '보호의무' 혹은 '안전배려의무' 위반으로 손해배상 소송이 성립할 가능성도 있다.
민법 제618조는 '임대인은 임차인이 목적물인 주택을 사용·수익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임대인에게는 사용 목적물인 집이 '외부 위협 없는 안전한 거주'라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사용되도록 보장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변호사들은 이 같은 의무가 임대차 계약의 핵심이라고 입을 모았다.
C 변호사는 "주택 거주자는 집에 거주하며 생명과 신체를 침해당하지 않아야 한다"며 "이 부분에 있어 침해가 일어난다면 집주인이 책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의무로 인해 집주인들은 주택에 물이 샌다거나 문이 떨어진다든가 하는 여러 상황에서 책임을 지고 수리·개선 조치를 한다.
보호의무 혹은 안전배려의무 위반으로 손해배상 소송이 이뤄지려면 우선 실제 침수 피해가 발생해야 한다. 아울러 그 피해가 방재 설비로 방지할 수 있었던 것이어야 한다. 설비로도 예방할 수 없었을 극한 폭우에 대해서는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뜻이다.
집주인이 호우 피해를 예상할 수 있었다는 '예상 가능성'도 입증돼야 한다. 또 집주인이 정부·지자체가 국비로 물막이판 설치 등을 지원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는가도 중요한 쟁점이다.
정부·지자체는 올 여름 물막이판 등의 설치가 필요한 취약 반지하에 대해 세입자는 물론 집주인을 일일이 찾아가 설득해왔다. 이 과정에서 사업 취지는 물론 정부 지원 사실도 설명했다. 아울러 지난해 폭우로 반지하 안전이 사회 문제로 대두된 만큼 올 여름 호우 피해에 대한 예측이 충분히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여러모로 집주인의 손해배상 의무 성립 가능성이 상당한 상황이다.
C 변호사는 "지난해부터 100년만의 홍수라는 등 반지하 문제가 공론화됐다"며 "설치비를 지원해줬는데도 설치하지 않아 사고가 난다면 법리상 과실 책임이 인정될 여지가 크다"고 말했다.
D 변호사는 "반지하 침수 피해가 충분히 예견된다면 집주인에게는 그걸 방지할 주의 의무가 있다"며 "특히 정부에서 지원해준다고 했는데도 이를 거부해 설치를 하지 않았다면 (피해가 발생할 경우) 임대인이 책임을 피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B 변호사는 "설치를 강제하는 법률이 없다 해도 정부가 돈까지 지원하며 권고한 사항을 임의적으로 따르지 않았다면 안전배려의무 위반이다"며 "방재 설비 설치로 피할 수 있었던 피해라고 재판부가 인정하면 집주인이 손해배상을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안전배려의무 위반은 생명뿐 아니라 텔레비전, 장롱의 고장 등 재산 피해에 대해서도 성립한다"고 설명했다.
E 변호사는 "올해는 지난해와 달리 호우로 인한 반지하 침수 가능성에 대해 많은 예보가 이뤄졌다"며 "임대인이 피해를 예견할 수 있었고 정부 지원 대책도 인지하고 있었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말했다.
A 변호사는 "정부 요청 외에 세입자가 개인적으로 집주인에게 설치를 부탁한 사실 등이 있다면 손해배상 가능성은 더 커진다"며 "건물마다 여건이 다르겠지만, 방재 설비가 꼭 필요한 임차인의 목적물로 인정될 경우 집주인은 손해배상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만 집주인이 피해를 예측할 수 있었다는 점과 정부 지원 사업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점 등은 세입자 측이 증명해야 한다.
법률가들은 또한 법으로 반지하 소유자의 방재 설비 설치 의무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방안에 대해서는 일률적인 기준으로 설치 의무 지역을 특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alicemunro@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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