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양식과 시의 형식이 만나는 곳에서[PADO]

박선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연구소 책임연구원 2023. 7. 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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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라이언 에커스. /사진제공=Ryan Eckes

도시는 흥미로운 시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드높은 고층빌딩과 정갈한 거리는 번영과 발전의 상징이지만 도시다운 바로 그 모습을 유지하기 위해서 숨겨지는 것들이 필연적으로 존재하기에 여러 시인들로 하여금 그 역설을 주시하게 만들어왔다. 18세기의 영국시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는 산업혁명 이후 급속히 발달하는 런던을 그리면서도 그 기저에서 포착되는 도시적 위기를 시로 노래한 바 있고, 20세기 활동했던 미국의 시인 칼 샌드버그(Carl Sandburg) 또한 오로지 나아가기만 하려는 미국의 개발논리가 구현된 도시의 풍경을 그리며 종국에는 인간과 물질의 유한성을 깨달아야 한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로부터 십수년 뒤, 우리의 도시는 어떤 모습인가. 필라델피아 출신의 미국 현대시인 라이언 에커스(Ryan Eckes) 또한 주로 도시의 풍경을 시로 그려 온 시인이다. 다만 그의 시선은 도시 자체를 그리기보다 그 도시를 채워 넣은 사람들을 주시함으로써 조망하던 독자의 시야를 단숨에 현미경 앞으로 불러오는 방식을 택한다. 말하자면 그의 시에서 도시는 도시를 이루는 사람들을 바라봄으로써 재구조화된다.

라이언 에커스 - 양식 (번역: 박선아)
다른 5천만 사람들과 함께

교사감사주간 끝자락에 실직서류 양식을 채워 적는 중에

난 창가에 에어컨을 반대로 세워, 켠 채로 밖을 향하게 할 뻔했다.

내가 온 도시를 식힐 뻔 한 것이다.

"너 뭐하냐?" 밤이 되던 때, 델라웨어 가로 내려 앉고 있던 친구가 다정히 물었다,

고마워, 하고 내가 말했다. 안녕하고 손을 흔들며

양식을 채우러 돌아가는 길에 그랬다:

"업무가 있을 시 결근했습니까:"

아니, 전혀 그런 적 없다

나는 "전혀" 친구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모든" 날에, 물수제비를 떴다

재미 삼아서, 한 꿈 다음엔 다음 꿈을

좀 더 나아지기를 더 나아지기만을

왜 더 나아지기만을 바라는 인생을 "언제라도" 원하겠는가

"휴가수당을 받았거나 받을 예정인가요"

차가 주차되어있고, 문은 잠겨있고

방은 비어있고, 냉장고는 닫혀있고

하루는 길고, 고통은 오래됐고

"언제 깨달을 거니"

A.T.M의 시체가 말했다.

어떤 사람들이 도시를 이루고 있는가? 시 '양식'에서 그가 주시하는 사람은 교사감사주간에 실직서류 양식(한국으로 치면 실업급여 신청서)을 채워 넣어야 하는 이의 모습이다. 미국 고등교육에 종사하는 교육노동자들은 여름 내내 사실상 실업 상태로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서 실업급여를 신청해야 하는데, 사회의 시민을 길러내는 교사라는 공공적 성격의 직무에 이러한 관료적 행정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양식'의 화자는 이 실존적 고충이 비단 자기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안다. 또 "다른 5천만 사람들"이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임을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화자만의 목소리가 아니게 되는 바, 시에서 의아하게 여겨졌던 "나"의 소문자 처리의 이유를 추측해볼 수 있다. 이 도시의 시스템이, 자본주의 체제가, 행정의 관료성이 "나"를 얼마나 작게 만드는지에 공감할 수 있는 이들이 그토록 많다는 뜻이기에 시인은 대문자 "나"(I)를 소문자 "나"(i)로 처리하면서 다른 "5천만 사람들"의 목소리와 "나"의 목소리가 겹쳐질 수 있게끔 설정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체제를 두고 "모든 견고한 것이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All that is solid melts into air)고 표현한 마르크스(Karl Marx)의 말처럼 견고하던 "나" 역시 생존을 도모하는 최소한의 절차 앞에서는 수많은 실업급여 신청자들 기운데 하나가 되고, 에커스는 이 목소리를 주시하며 같은 처지에 놓인 여러 목소리가 있음을 드러내고자 "나"라는 주체를 소문자로 처리한 것이다. 이러한 시쓰기는 첫째, 실직서류 양식을 채워 넣어야만 하는 이들과 연대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지를 표방하고, 둘째, 현대 영미시에서 자주 시도되는 목소리의 다성화를 성취해낸다.

그러니 이 시에서 바라보는 도시는 끓어 오르는 공간이다. 5천만 사람들의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기에 화자는 "에어컨을" "켠 채로 밖을 향하게" 하고 싶은, 그렇게 "온 도시를 식히"고 싶은 욕망을 연출하는 장이다. 이 때 이 불길을 잠재워주는 것은 하나라도 있다면, 그것은 자신에게 "다정하게" 안부를 묻는 친구의 한 마디. "너 뭐하냐?"라며 다소 투박하게 묻는 친구의 말조차도 수많은 이들의 열기와 절박함을 온 몸으로 감각하던 화자를 다시 현실로 붙들어 오는 계기가 되어준다. 그리하여 시인이 다시금 고개를 돌리는 곳은 눈앞에 놓인 실직서류이고 그 양식은 질문한다. "업무가 있을 시 결근했습니까." 이에 화자는 "아니"라고, "전혀 그런 적 없다"고 혼잣말 하듯 대답하는데, 그런 적이 "전혀" 없었다고 대답하는 화자의 대답은 이윽고 "전혀"라는 말의 쓰임을 곱씹게 만든다. 이 "전혀"라는 말이 "나는 "전혀" 친구를 사랑하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고 말할 때의 그 "전혀"와 겹쳐지는 것이다. 근무지를 이탈한 적 없이 자신의 직무에 충실해왔음을 토로하는 화자의 마음이 친구를 사랑하는 일을 애써 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그것이었다는 말과 겹쳐지면서 시의 목소리는 시의 형식에 대한 시인의 고민과 자연스레 엮인다.

이어지는 행에서 시인은 "전혀"라는 부정형의 말을 "모든"이라는 극도의 긍정과 잇는다. "모든" 날이 물수제비 뜨듯 겨우겨우 이어지는 날들인 상황에서, 조금 더 나아질 기미는 없고 나아지기만을 바라게 만드는 삶을 누가 "언제라도" 원했는가 묻는 것이다. 그런 삶을 원한 적 없음을 역으로 물으며 갈 데 없는 분노를 터뜨리려던 화자는 다시금 눈 앞의 실직서류 양식을 확인하는데, "휴가수당을 받았거나 받을 예정"임을 표명해야 하는 삶은 그 구조를 뜯어고치는 일이 요원한 현실 속에 이다. 시인은 이 현실을 주차된 차, 잠긴 문, 텅 빈 방, 꼭 닫힌 냉장고, 길고 긴 하루, 오래된 고통으로 고요하게 그려내고, 시의 결말부에서 화자는 결국 이 현실을 "언제 깨달을 거냐" 묻는 현금지급기의 "시체"를 마주한다. 내놓을 현금이 없어 그야말로 "시체"와도 같은 현금지급기.

에커스의 시는 다소 무력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결국은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데, 당장 이 현실을 타파할 방법이 아무것도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렇게 절박하게 살아 마땅한 그 어떤 그른 일도 "전혀" 한 바 없지만, 물 위를 위태하게 튀어오르는 "물수제비"같은 하루하루는 오천만명의 "모든" 날로 이어질 뿐, 당장 내일의 생존을 보장할 여유조차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아무 희망도 없는 것은 아닐 터, 현실의 변화가 요원하다면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할 것이다. 시인은 직접적으로 희망을 노래하지 않았지만 시 곳곳에 실천의 힌트들을 숨겨놓았다. 지끈거리는 대기를 식혀주는 다정한 친구의 투박한 안부, 노력 할 필요조차 없이 사랑하게 되는 친구들, 위태롭고 고되지만 성실하게 사는 매일매일. 시인은 막막함 속에서도 이런 것들을 감각하는 일을 놓지 않기를 시 속에서 노래한다. 오늘 당신의 도시가 친구의 안부를 묻는 하루만큼 채워지기를. 무엇보다도 5천만명이 이 길을 "함께" 가고 있다는 연대의 가능성을 각성할 수 있기를.

라이언 에커스는 미국 필라델피아에 거주하는 시인이며 시집으로 'General Motors'(2018), 'Fine Nothing'(2019), 'Wet Money'(2020)이 있다. 겸임교수와 교육 노조 상근자로 일한 바 있으며 2016년 퓨 예술 펠로우십(Pew Fellowship in the Arts)을 받았다.
박선아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연구소 책임연구원으로 현대 미국시의 모성시 연구로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뮤리얼 루카이저의 '어둠의 속도'를 번역했고, 주로 여성 작가들과 학자들의 저작을 번역하고 연구한다.

PADO 웹사이트(https://www.pado.kr)에서 해당 시의 영어 원문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국제시사·문예 매거진 PADO는 통찰과 깊이가 담긴 롱리드(long read) 스토리와 문예 작품으로 우리 사회의 창조적 기풍을 자극하고, 급변하는 세상의 조망을 돕는 작은 선물이 되고자 합니다.

박선아 한국외국어대학교 영미연구소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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