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서평생활] 책이 전통매체라면, 책방은 새로운 미디어
[슬기로운 서평생활] 작은 목소리, 빛나는 책장/ 쓰지야마 요시오 지음/ 돌베개 펴냄
[미디어오늘 장슬기 기자]
책은 생각보다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연결하는 미디어다. 보통의 미디어는 제작자가 콘텐츠를 만들어 해당 콘텐츠를 찾는 이들에게 전달한다. 물론 최근엔 기술 발전으로 실시간 쌍방 소통이 가능한 매체도 생겼다. 책에도 누군가가 제작한 콘텐츠를 전하는 기능이 있다. 출판은 아주 전통적인 매체다. 하지만 이와 무관하게 책 자체를 주고받는 관계가 존재한다. 책을 사고 팔거나 빌려주며 연결된다. 책을 같이 읽으며 소통하기도 하고, 단지 책을 모아놓은 공간이란 이유로 사람들이 모인다.
그런 면에서 책방은 또 하나의 미디어다. 최근 한국에 작은 책방이 꾸준히 주목을 받는 걸 보면 책방은 새로운 미디어다. 일본에서도 다르지 않다. 다음은 도쿄 오기쿠보의 서점 'Title' 책방지기인 쓰지야마 요시오씨가 쓴 <작은 목소리 빛나는 책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후쿠오카 신이치의 저서 <동적 평형>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를 구성하는 세포는 끊임없이 파기됐다가 만들어지며 빠른 속도로 교체된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 있는 '나'는 어제와 같은 사람처럼 보여도 세포 단위로는 결코 같지 않다. 서점도 마찬가지여서 겉보기엔 어제와 같은 서점처럼 보여도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다른 책들이 책꽂이에 들고 난다. 단 하루도 같은 날이 없다.”(14~15쪽)
어제 책방을 찾은 이들과 오늘 책방에 온 사람이 다르고, 내일의 책방은 오늘의 책방과 달라진다. 책방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책을 매개로 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아마 책방을 좋아하거나 책방지기를 꿈꾸는 사람들은 이런 연결과 소통을 선호한다. 책방지기는 각자에게 맞는 책을 찾아주려 하고, 고객들은 책방지기의 큐레이션을 기대한다. 그렇게 책방은 겉보기에 정적으로 보이지만 마치 유기체와 같이 변화하고 적응한다.
사람들은 책을 사기 위해서만 책방에 가지 않는다. 인터넷서점에선 책 할인이 되기 때문에 정가를 받는 동네책방은 상대적으로 가성비 떨어지는 곳이다. 대형 서점은 부담 없이 책을 둘러보고 올 수 있지만 책방 공간이 한눈에 들어오는 동네책방에서 구경만 하고 나오는 건 민망한 경험이다.
책방지기 입장에서는 지갑을 열어도 아깝지 않을만한 책을 준비해야 하고, 책방에 머무를 때 분위기와 느낌까지 책임져야 하는 부담이 있다. 사실 책방은 책 읽기보다는 책 구매를 좋아하는 이들의 공간에 가깝다. 저자는 '지금 읽고 싶은 책을 사는 게 아니다'란 글에서 “책장은 몸 바깥에 부착된 두뇌와 같아서 풍부하게 만들어두면 지식과 감정의 총량도 확장될 가능성이 있다. 살 수 있을 때 사놓고 아직 읽지 않은 책이라 해도 책장에 꽂혀 있는 것으로 충분히 제 역할을 수행하는 셈”이라고 했다.
책방이 가장 북적북적한 시간은 '저자와의 대화'나 '독서모임' 등 행사가 있을 때다. 활발하게 책을 매개로 한 소통이 이뤄진다. 평소에 한둘이라도 손님이 찾아오면 책 추천이나 책 거래가 이뤄진다. 책방을 꿈꾸는 사람들이 그리는 책방의 이미지다. 그러나 아무도 책방을 찾지 않을 때 책방지기의 일상이나 정서·생각 등은 책방지기들만 알 수 있다. 책 <작은 목소리 빛나는 책장>은 책방지기의 이러한 삶까지 보여준다. 책을 정리하고, 새 책을 진열하는 다소 지루한 일상의 반복이다.
코로나19가 찾아온 직후엔 그 적막을 더 무겁게 견뎌야 했다. 2020년 3월말 주말에 도쿄 도지사가 외출 자제를 요청했다. 저자는 이틀 모두 임시휴업을 결정했다. 자영업자들에게 불안이 찾아오던 그 시기,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다. 그렇게 찾아온 온기는 식지 않았다. 저자는 “누구를 위해 문을 열어야 하나 알 수 없었던 그 무렵과 달리, 지금은 Title이라는 서점으로 일부러 이렇게 책을 주문해주는 사람이 있다”며 “'커뮤니티'라는 말을 쓰지 않더라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손”이 “서점을 계속하는 힘”이라고 했다.
쓰지야마 요시오는 대형서점 리브로에서 20년 가까이 일하다 독립해 2016년 1월 도쿄 오기쿠보에 작은 책방을 열고 직접 책을 큐레이션하며 서평도 쓴다. 그가 대형조직에서 퇴사한 배경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이 책의 장점은 일본 책방지기의 사례지만 국적의 차이를 느끼기 어려울 만큼 책 전반의 내용이 한국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저자는 “대부분 조직이 사람을 관리하려는 성질이 있지만 매뉴얼을 벗어나는 개성적인 일은 관리와 거리가 멀다”며 “체계적인 시스템으로 접근하는 순간, 쭉쭉 뻗어나가던 작업이 갑자기 확 수축되는 경우를 그동안 수차례 목격했다”고 했다. 이는 많은 직장인이 자기 사업을 꿈꾸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면서 책방지기가 된 이후 어떻게 다른지도 비유를 통해 비교했다.
“프란츠 카프카의 <성>은 성에 고용된 측량기사 K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성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의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미로와 같은 소설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전에 쓰인 이야기지만 개인이 거대한 조직에 괴롭힘을 당하고, '책임자 부재', '담당자 부재'라는 말로 외면받는 모습은 마치 현대사회를 예언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며, 사건은 안갯속에 갇힌 듯 흐지부지되어버린다. 회사를 그만두고 혼자 서점을 운영하기 시작한 이유는, 모든 것이 나의 책임으로 귀결되는 지속 가능한 장소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이다.”(29~30쪽)
그가 책방을 차리고 지속하는 이유는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는 자유, 책임에서 오는 자유 때문이다. 그렇게 유지한 책방에는 그 책방 분위기와 느낌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모이는 행운이 따라온다. 그래서 한국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작은 책방이 계속 생겨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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