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의 링 최강자 저본타 데이비스…사각의 감옥에 갇히다

박강수 기자 2023. 7. 2. 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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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강수의 스포츠 인사이드]세 체급 제패, 통산 29승 무패, 27번이 KO인 ‘복싱의 얼굴’ 저본타 데이비스의 희망과 절망
저본타 데이비스가 2023년 4월22일(현지시각) 미국 라스베이거스의 티모바일 아레나에서 열린 계약체중 136파운드(61.68㎏) 논타이틀 12라운드 복싱 경기에서 라이언 가르시아를 꺾은 뒤 기뻐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당연한 얘기겠으나, 쌈박질과 복싱은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미국의 작가 필립 로스는 소설 <휴먼 스테인>(2000)에서 이렇게 썼다. 작중 ‘복싱의 맛’에 흠뻑 빠진 고등학생 소년이, ‘위험한 쌈박질’로부터 아들을 떼어놓으려는 부모를 설득하는 대목이다.

“길거리에서 붙을 땐 그게(거칠게 구는 일) 중요해요. 하지만 링에서는 아니에요. 길에서 그런 애들이랑 붙으면 기절할 정도로 얻어맞을 거예요. 링에서도 그럴까요? 시합 규칙이 있는데? 글러브를 꼈는데? 절대로, 절대로 그렇게는 안 돼요. 제 몸에 펀치 한 번 꽂지 못할걸요.”

복싱 체육관이 구원한 데이비스

소년은 권투가 “체스 게임이랑 비슷하다”고 말한다. “권투는 머리로 하는 거예요”라고도 한다. 단순 과격한 주먹다짐이 아니라 냉철한 전략게임이라는 것이다. 사각의 링 위에는 숨을 곳이 없고, 몰래 귀라도 깨물지 않는 한 마땅한 속임수도 없다. 스텝 한 번, 잽 한 번에 상대의 수와 패를 읽어가며 매 라운드 공략법을 모색해야 한다. 두려움과 흥분으로 뒤집힐 듯 맥동하는 혈류가 머리를 덥혀 판단을 흐리지 않도록 애쓰는 일이 중요하다. 분노는 빈틈을 만들고, 이는 곧 과녁이 될 뿐이다.

복잡한 설명이 아니지만, 소년은 결국 설득에 실패한다. 길바닥의 불량한 객기와 링 위의 지엄한 패기 사이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다는 항변이, 어른들에게 먹혀들지 않았다. 이 작품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 한 개인의 파국적 사정을 그리는데, 앞의 언쟁은 그 오해와 불통의 분기점 노릇을 한다. 이 이야기를 다시 떠올린 건 ‘탱크’ 저본타(저본테이) 데이비스(28)를 이해해보기 위해서다. 그는 2023년 4월 링 위에서 승리의 포효를 내지르며 자신의 시대를 선포했고, 약 두 달이 흐른 지금 구치소에 있다.

데이비스는 미국 메릴랜드주 볼티모어 태생의 복서다. 키 166㎝에 양팔을 벌린 ‘리치’ 길이는 171㎝. 같은 체급(라이트급) 선수 중에서도 아담한 편인데, 아담하다는 표현보다는 다부지다는 말이 어울린다. 데이비스가 자란 볼티모어 서부의 샌드타운윈체스터 지역은 미국 내 범죄율 최상위권을 다투는 볼티모어에서도 특히 치안이 불안한 동네였다. 마약중독자이던 부모는 각각 수감(아버지)과 가출(어머니)로 데이비스를 돌보지 못했고, 어린 데이비스는 위탁가정을 거쳐 할머니 손에 컸다.

장소와 상대를 가리지 않고 어려서부터 숨 쉬듯 싸움을 벌였던 데이비스가 삼촌 손에 이끌려 복싱 체육관을 찾은 건 그의 나이 7살 무렵이다. 링 위에서 주먹의 ‘다른 쓰임’을 배운 데이비스는 비로소 머물 자리를 찾은 기분이었다고 돌아본다. 그는 “언제나 체육관에 있느라 거리에서 날뛸 시간이 없었다”고 말한다. 오후 2시에 학교가 끝나면 제일 일찍 체육관으로 달려가 개장 시간(4시)까지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는데 한 번은 기다리다 잠들어 옆집에서 마약중독자로 신고가 들어온 적도 있다.

그는 성실했고 그 이상의 재능이 있었다. 입문하자마자 모든 스파링 상대를 쓰러뜨렸고, 곧 아마추어 무대(206승15패)를 평정했다. 2013년 프로로 전향한 뒤 데뷔전 상대를 케이오(KO)로 박살 내는 데 걸린 시간은 단 1분29초. 이후 데이비스는 2017년 국제복싱연맹(IBF) 슈퍼페더급 챔피언을 시작으로 세 체급(라이트급, 슈퍼라이트급)을 제패했다. 통산 전적은 29승 무패로 이 가운데 27번(93%)이 KO승이다. ‘커리어 무패’를 자랑하는 동시대 강호들도 별수 없다. 데이비스와 함께 링에 오르면 어김없이 첫 패배가 새겨진다.

승리한 “복싱의 얼굴” 감옥행

가장 최근 그 목록에 오른 이름은 라이언 가르시아(24)다. 그 역시 데이비스를 만나기 전까지 23승 무패였고, 정규 챔피언벨트는 없지만 950만 명(2023년 6월28일 기준 1037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어를 거느린 슈퍼스타였다. 몇 년간 무성했던 설왕설래 끝에 성사된 승부를 두고 세계의 복싱팬들은 과거 ‘플로이드 메이웨더 대 매니 파키아오’(2015년), ‘카넬로 알바레스 대 겐나디 골롭킨’(2017·2018·2022년)을 잇는 ‘꿈의 대결’이라며 들떴고, <이에스피엔>(ESPN)은 “복싱을 구원할 한판”이라고 추켜세웠다.

2023년 4월22일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뚜껑을 연 대결은 데이비스의 7라운드 KO승리로 결판났다. 데이비스는 “나야말로 진정한 복싱의 얼굴”이라고 부르짖었다.

여기까지가 ‘저본타 데이비스 희망 편’이다. 가르시아와의 경기 약 2주 뒤 역시 결판이 난 ‘절망 편’에서 그는 승리자가 아니었다. 데이비스는 5월5일 90일 가택연금형(3년 집행유예)을 받았다. 2020년 11월 뺑소니 사고로 부상자 네 명을 내고 기소된 사건의 처분이다. 징역을 면했으나 6월1일 무단으로 거주지를 이탈해 호텔 등에 투숙한 사실이 발각되면서 결국 남은 형기를 구치소에서 보내게 됐다. 이 밖에도 데이비스는 시민 폭행, 전 여자친구 폭행 등으로 체포되거나 기소된 전력이 수두룩하다.

데이비스의 목젖 아래에는 ‘Blessed’(축복받은)라는 글자 타투가 있다. 그의 고향 볼티모어에서는 수많은 청년이 마약에 빠지거나 총에 맞아 죽는다. 데이비스를 길러낸 업턴체육관에도 수감되거나 총격을 당해 숨진 동료, 후배가 즐비하다. 이 참혹한 환경에서 그는 기회를 잡았고 마침 재능도 있었기에 두 주먹만으로 ‘볼티모어의 별’이 됐다. 그가 스무 살에 새긴 ‘축복’은 이 행운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이었을 것이다. 실제 데이비스는 꾸준히 볼티모어에서 자선활동을 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볼티모어 아이들의 희망도 흔들려

2019년 인터뷰에서 데이비스는 “작은 실수 하나가 삶을 영원히 망쳐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많은 짐을 지고 위대함을 향해 나아가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도 그런 일에 휘말리지 않고 고개를 쳐든 채 강하게 버티는 것이야말로 나에게 동기부여가 된다”고 했다. 멋진 말이지만, 그가 명실상부 링 위의 최강자가 된 지금 이 문장은 무색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길거리 싸움꾼과 링 파이터 사이 분별을 잃은 듯한 데이비스의 행보에, 팬들의 실망은 커진다.

무엇보다 데이비스가 다시 길을 잃으면, 그 별을 바라보고 걷던 볼티모어 아이들의 희망도 함께 흔들릴 것이다. 이것이 훗날 그 스스로 가장 아파할 패배일지도 모르겠다.

박강수 <한겨레> 문화부 스포츠팀 기자 turner@hani.co.kr

*스포츠 인(人)사이드는 동서고금 스포츠 선수 관찰기로 4주마다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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