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도 오세훈도 무지개를 막을 수 없다…을지로 덮은 ‘퀴퍼’
“사랑은 혐오를 이긴다고 하잖아요. 아무리 반대세력이, 오세훈 서울시장이, 홍준표 대구시장이 성소수자들을 막아도 사랑이 이길 겁니다.”
연인과 함께 ‘제24회 서울퀴어퍼레이드’(서울 퀴퍼)에 참가한 김연웅(28)씨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여성가족부 폐지와 성소수자를 지우는 혐오 정책을 펼쳤지만, 경찰이 소신을, 시민이 신념을 지키면서 퀴어퍼레이드가 열리게 됐다”며 “서울광장이 아니라 을지로에서 개최된 게 아쉽지만, 일반 시민들과 접촉면을 넓히는 계기가 되는 것 같기도 하다”고 했다. 이날 서울 퀴퍼가 열린 을지로 2가 일대엔 김씨처럼 사랑하는 연인, 친구와 온 이들이 가득했다.
성소수자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자신의 존재감과 자긍심을 드러내는 서울 퀴퍼가 1일 오전 11시부터 서울 중구 을지로 2가 일대에서 열렸다. 서울 퀴퍼는 코로나 기간을 제외하고 지난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줄곧 서울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열렸지만, 올해는 서울시의 서울광장 사용 불허 조처로 을지로 일대에서 열리게 됐다. 그러나 최고 34도에 이른 날씨도,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도, 혐오세력도 성소수자와 엘라이(지지자)들을 이기지 못했다. 무지개 도심이 열렸다. 다시, 사랑이 이겼다.
이날 서울 퀴퍼에 참가한 이들은 국적,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연대와 지지의 뜻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했다. 직접 그린 무지개색 티를 입고 온 이자엽(19·예명)씨는 “입시 때문에 지금까지 퀴퍼에 와보지 못했다. 대학에서 직접 배웠던 퀴퍼의 의미를 현장에서 느낄 수 있어 설레고 들뜬다. 묘한 연대감이 생긴다”고 했다. 12살 딸과 함께 현장을 찾은 변상우(48)씨는 “4∼5년 전부터 딸에게 이성애만이 아닌 다양한 사랑의 형태가 있다는 걸 가르쳐주고 싶어 함께 서울 퀴퍼에 참여하게 됐다”고 했다.
이날 처음으로 부스를 차린 청소년 성소수자 단체들은 여전히 학교 현장에서는 성소수자 권리가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김다희(17)양은 “아직도 우리나라에서는 청소년이 퀴어 당사자라고 생각도 못 하고 있어 가시화가 어려운 상황이다. 학내 성소수자 동아리에 대해선 부원 색출 움직임이 있기도 하다”며 “이런 상황에서 성적 지향을 이유로 학생을 차별하면 안 된다는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이 일어 이에 대한 반대서명을 받고 있다”고 했다.
서울시의 서울광장 사용 불허 조처에 분노해 퀴퍼에 참가한 시민도 있었다. 원연희 채식평화연대 대표는 “올해 처음으로 단체에서 함께 서울 퀴퍼에 참여하게 됐다. 축제를 통해 자유롭게 권리의 문제를 말하는 것은 집회·시위의 자유인데, 지지는 못할지언정 광장 사용을 막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성소수자 부모모임 부스에서 ‘프리허그’ 행사를 진행했던 정은애 운영위원은 “오세훈 서울시장이 (성소수자들을) 밀어냈지만, 우리는 지지 않는다”며 “미워해도 소용없다. 어디든 가고, 마음껏 사랑할 것”이라고 했다.
‘피어나라, 퀴어나라’라는 슬로건으로 열린 이 날 행사장에는 성소수자 및 연대 단위 부스 58개가 차려졌다. 미국·독일 등 각국 대사관도 부스를 설치했다. 특히 7년째 국가기관으로서는 유일하게 서울 퀴퍼에 참여하고 있는 국가인권위원회는 올해 최초로 연대발언에 나서기도 했다. 염형국 인권위 차별시정국장은 “인권위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순 없지만, 현재 우리 정부의 성소수자 정책은 딱히 없다. 관련해 어떠한 정책도 찾을 수 없다고 말해도 된다”며 국회에서의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했다.
서울 퀴퍼는 지난달 22일부터 이달 9일까지 열리는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 행사 중 하나다. 서울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조직위)는 온라인퀴어퍼레이드, 레인보우 굿즈전, ‘제23회 퀴어영화제’ 등의 행사를 준비했다. 서울퀴어문화축제는 지난 2000년에 처음 시작됐으며, 연간 15만여 명이 참석하는 국내 최대의 민간축제다.
이날 오후 3시 취재진과 만난 양선우 조직위원장은 “서울 퀴퍼는 도심에서 하는 게 중요하다. 도심에서 성소수자가 보이지 않으면 내 주변에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라며 “비록 광장에서 진행되진 못했지만, 도심에서 축제를 열게 됐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어 “매년 (서울 퀴퍼 개최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내년에 다시 서울광장으로 돌아간다는 약속도 할 수 없다”면서도 “어디서든 도심에서 꼭 축제를 열 것”이라고 했다. 주최 쪽은 이날 행사에 5만여명이 참가한 것으로 추산했다.
고병찬 기자 kic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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