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와 와인, 교황의 도시 아비뇽[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전승훈 기자 2023. 7. 1. 14:00
프로방스 여행(5) 아비뇽 교황의 궁전
10여 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새벽 4시쯤에 출발해 자동차를 타고 남부 도시 아비뇽까지 간 적이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김밥에 컵라면을 먹어가며 쉬엄쉬엄 13~14시간을 달려 저녁 해질 무렵에 아비뇽에 도착했다.
아비뇽의 성채를 지나 교황청 밑 도심 지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광장으로 올라오니 거대한 고딕건물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마침 세계 최대의 연극축제인 ‘아비뇽 페스티벌’ 이 열리던 7월이어서 교황청 앞 광장에서 밤늦게까지 현대무용과 마임 등 길거리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비뇽 교황청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궁전’이라고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그 말대로 아비뇽의 ‘팔레 데 파프(Palais des Popes, 교황의 궁전)’는 면적 1만5000㎡에 이르는 웅장하고 육중한 석조 건물이다. 성벽의 높이가 50m, 두께는 4m에 이른다. 뾰족한 탑과 망루가 세워진 성채가 그야말로 도시를 감싸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비뇽 교황청은 14세기 67년간(1309~1377년) 7명의 교황들이 살던 곳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병영으로 변모됐으며, 19세기에는 감옥으로도 사용됐다. 그래서인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미술품으로 화려한 로마 바티칸 교황청에 비해 아비뇽 교황청 내부에는 남아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 당시 ‘성상 파괴 운동’의 피해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황청 옆에 있는 아비뇽 대성당 입구의 성상은 아직도 머리 부분이 부서진 채 그대로 있다.
프랑스 제11대 왕 필리프 4세(1268~1314) 때 당시 교황청은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왕권과 대립했다. 필리프 왕은 교황의 양해 없이 프랑스 내의 교회에 ‘임시세‘를 부과했고, 이탈리아 로마 남동쪽 ‘아나니’에 있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급습해 3일 동안 투옥시켰다. 아나니는 보니파시오 교황의 탄생지며 별궁이 있던 곳이다. 교황은 시민들의 협력으로 구출됐으나 1년 후에 병사하고 만다.
아나니 사건 이후 왕권은 신장되고, 교황권은 쇠퇴하면서 교황청은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기게 된다. 1305년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1264~1314)가 교황이 된 이후로 교황청은 67년간 프랑스에 있게 된다. 아비뇽에 거주한 교황들은 클레멘스 5세에서 시작해 요한 1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이노센트 6세, 우르반 5세 그리고 그레고리오 11세까지 7대의 교황으로 이어지는데, 이로써 아비뇽은 제2의 로마로서 부각된다.
아비뇽 유수 시절 네번째 교황으로 재직했던 클레멘트 6세(재위 1342~1352)는 1348년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교황청 궁전을 건축했다. 교황청 안으로 들어가면 대연회실을 비롯해 기도실, 예배실, 회랑, 회의실, 주방 등 20여 개가 넘는 방을 관람할 수 있다.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가구는 대부분 사라지고 없는 데, 입장할 때 주는 태블릿PC를 빈 벽에 비추면 중세시대 모습을 3D 증강현실 기술로 실감 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교황의 예배당과 침실에는 13~14세기 이탈리아와 프랑스 화가들의 프레스코화 그림이 벽에 남아 있고, 바닥의 모자이크 타일도 오랜 세월에 퇴색된 채 남아 있다. 성 마르샬, 성 요한, 대강당의 벽화는 이탈리아 화가 마테오 지오바네티의 프레스코화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교황의 침실 벽의 프레스코화는 하늘색 배경 위에 포도 덩굴과 떡갈나무 잎사귀 그림이 섬유의 텍스타일 디자인처럼 새겨져 있다. 식물 사이사이로 새와 다람쥐가 묘사돼 있는 장면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의 틀은 밖으로 갈 수록 좁게 만들어져 있어 원근법을 활용한 장식으로 보인다.
벽체의 아랫부분은 커튼모양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바티칸 교황청의 내부 방들 아랫부분이 명암과 원근법을 활용한 그림으로 장식돼 입체처럼 보이는 눈속임을 활용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교황의 방에서 나오면 클레멘트 6세의 서재인 ‘사슴의 방(Chambre de Cerf)’으로 연결되는 좁은 복도가 있다. 이 벽에는 1343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화가에 의해 그려진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눈길을 끈다.
자연의 농장 안에서 사냥과 낚시, 과일따기 등 전원 속 즐거움을 그린 그림이다. 연못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흰담비를 이용해 사냥을 하고, 허브, 꽃이 피어 있는 숲 속에서 과일을 따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 방의 천정 밑에는 화려한 레임 밑으로 붉은색 배경에 낚시, 사냥, 동물들이 나오는 프리즈(frieze) 장식도 둘러싸고 있다. 교황청 벽화라면 바티칸의 ‘천치창조’나 ‘최후의 만찬’과 같은 성화를 떠올리는데, 아비뇽 교황청에는 전원 속에서 매우 세속적인 즐거움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 있어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밖으로 나오면 교황의 정원이 펼쳐진다. 요한 22세, 베네딕트 12세, 클레멘스 6세, 우르비노 5세 교황은 분수와 나무, 꽃이 있는 정원 가꾸기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요한 22세는 곰, 사자, 낙타, 멧돼지, 사슴, 토끼 등 방대한 동물을 우리에서 길렀고, 후계자들은 타조와 공작도 정원에서 보고 즐겼다고 한다. 베네딕트 12세는 정원에서 교황의 식탁에 오르는 채소를 기르게 했다고 한다. 양배추, 시금치, 양파, 콩, 가지, 단호박 등의 야채와 마조람, 보리약초, 파슬리, 황소반 등 의약용 약초도 길렀다고 한다.
아비뇽시는 옛 문헌을 참고해 베네딕토 12세와 클레멘스 6세의 상부 정원과, 우르바노 5세의 하부정원의 꽃과 나무, 분수 등을 복원하고 있다. 현재 정원에는 포도나무, 꽃, 채소, 향신료 허브 등 다양한 꽃과 나무가 자라고 있다.
팔레 데 파프 광장의 한쪽에는 프티팔레 미술관이 있다. 아비뇽 유수 기간인 1320년에 지어진 옛 대주교의 궁전이었다. 현재 이곳은 보티첼리, 비토레 카르파초 등 13~16세기 이탈리아 종교화, 교황청 유물 등 뛰어난 종교 예술 컬렉션을 보유한 아비뇽의 대표 미술관 중 하나다.
아비뇽 대성당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로쉐 데 돔 공원(Rocher des Doms)’이 나온다. 절벽으로 이뤄진 언덕 위에 만들어진 영국식 정원으로 아기자기한 연못도 있고, 인공 동굴도 있다. 공원의 정상 부근의 파노라믹 전망대에서는 붉은색 지붕이 모여 있는 아비뇽 시가지와 론 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둥근 탑 아래로 론강에 놓여 있는 생베네제교가 입체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언덕 위 전망대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오면 생베네제(Saint Benezet) 다리가 나온다. ‘아비뇽 다리 위에서’(Sur le Pont d‘Avignon)이라는 프랑스 민요로 유명한 다리다. 파리에서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쉬를 퐁 다비뇽 오니 덩스~, 오니 덩스~‘(아비뇽 다리 위에서 다함께 춤추자)하며 입에 달고 살던 동요였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열릴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며 춤을 추거나, 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부르는 노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며 ’강강술래‘ 를 부르던 것과 같이 프랑스인들에게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다.
생베네제 다리는 12세기 양치기 소년 베네제가 신의 계시를 받고 하나하나 돌을 쌓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베네제는 론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어야 한다는 강렬한 영감을 받고 계획을 실행하려 하지만 아비뇽 사람들은 비웃고 손가락질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베네자가 천사의 도움으로 서른 명의 장정들 힘으로도 들 수 없는 거대한 바위를 들어서 옮기는 종교적 기적을 보여주게 된다. 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가 사람들은 다리 놓기에 참여하게 된다. 1177년에 시작된 대공사는 1185년에 마침내 완성된다. 베네제는 이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아 생(Saint) 베네제라 불리게 된다.
바스텔라스 섬 쪽의 강변에 서서 아비뇽 구시가지를 바라보는 풍경이 기가 막히다.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교황청과 아비뇽 대성당에서 이어지는 생베네제 다리까지… 론강 물 위에도 아비뇽의 역사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치는 것이 포인트다. 석양에는 더욱 아름다워진다고 하는데, 푸른색으로 넘실 거리는 론강의 숨결만으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교황청 역사지구를 둘러보다가 지친다면 교황청 바로 뒷편 골목에 있는 5성급 호텔 라 미랑드에서 차 한잔 마시는 것도 좋다. 14세기 추기경의 궁전이었던 곳을 새단장한 호텔로, 창문으로 교황청 궁전이 내려다보이는 18세기 스타일의 앤티크 객실이 인상적이다.
1층엔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과 함께 분위기 있는 살롱 스타일의 카페가 있다. 이 곳 레스토랑의 19세기 키친에서도 호텔 셰프가 진행하는 쿠킹 클래스가 열린다. 프로방스의 미식과 요리를 직접 만들고 체험하면서,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파티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아비뇽 구시가를 걷다보면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건물을 발견한다. 프라이빗 호텔로 쓰이는 ‘라 디빈 코메디(La Divine Comédy)’의 정원에는 프로방스의 명물인 사이프러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거닐며 산책할 수 있다.
연못과 수영장, 대나무숲으로 구성된 프로방스의 정원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라 디빈 코메디’는 이탈리아 대문호 단테의 ‘신곡(神曲)’이다. 이 정원을 걷다보면 단테가 두루 여행했던 천국과 지옥의 진기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리라.
프로방스 보클뤼즈 지역의 중심도시인 아비뇽은 론(Rhone) 와인의 수도이기도 하다. 구시가지 골목길에 있는 ‘르 방 드봉 스와(Le vin devant Soi)’는 론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는 와인샵이다. 이 샵의 이름이 흥미롭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을 패러디해 ‘자기 앞의 와인’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자기 앞의 생’이 앞으로의 여생을 의미한다면, ‘자기 앞의 와인’은 내게 남은 여생에 즐길 와인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인가.
10여 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새벽 4시쯤에 출발해 자동차를 타고 남부 도시 아비뇽까지 간 적이 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김밥에 컵라면을 먹어가며 쉬엄쉬엄 13~14시간을 달려 저녁 해질 무렵에 아비뇽에 도착했다.
아비뇽의 성채를 지나 교황청 밑 도심 지하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광장으로 올라오니 거대한 고딕건물이 당당하게 서 있었다. 마침 세계 최대의 연극축제인 ‘아비뇽 페스티벌’ 이 열리던 7월이어서 교황청 앞 광장에서 밤늦게까지 현대무용과 마임 등 길거리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에는 아비뇽 교황청 내부까지 들어가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프로방스 취재길에 교황청에 들러 내부까지 꼼꼼히 둘러보았다. 아비뇽은 론 와인의 수도이자, 세계적인 축제의 도시이지만 세계사적으로는 ‘교황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 교황권과 프랑스 왕권간의 충돌로 교회가 대분열하고 ‘아비뇽 유수’가 벌어진 현장이었던 아비뇽 교황청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비뇽 교황청은 ‘세상에서 가장 큰 고딕 양식의 궁전’이라고 홈페이지에 소개돼 있다. 그 말대로 아비뇽의 ‘팔레 데 파프(Palais des Popes, 교황의 궁전)’는 면적 1만5000㎡에 이르는 웅장하고 육중한 석조 건물이다. 성벽의 높이가 50m, 두께는 4m에 이른다. 뾰족한 탑과 망루가 세워진 성채가 그야말로 도시를 감싸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비뇽 교황청은 14세기 67년간(1309~1377년) 7명의 교황들이 살던 곳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병영으로 변모됐으며, 19세기에는 감옥으로도 사용됐다. 그래서인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시대 거장들의 미술품으로 화려한 로마 바티칸 교황청에 비해 아비뇽 교황청 내부에는 남아 있는 것들이 거의 없다. 프랑스 대혁명(1789년) 당시 ‘성상 파괴 운동’의 피해를 많이 봤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황청 옆에 있는 아비뇽 대성당 입구의 성상은 아직도 머리 부분이 부서진 채 그대로 있다.
프랑스 제11대 왕 필리프 4세(1268~1314) 때 당시 교황청은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면서 왕권과 대립했다. 필리프 왕은 교황의 양해 없이 프랑스 내의 교회에 ‘임시세‘를 부과했고, 이탈리아 로마 남동쪽 ‘아나니’에 있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를 급습해 3일 동안 투옥시켰다. 아나니는 보니파시오 교황의 탄생지며 별궁이 있던 곳이다. 교황은 시민들의 협력으로 구출됐으나 1년 후에 병사하고 만다.
아나니 사건 이후 왕권은 신장되고, 교황권은 쇠퇴하면서 교황청은 로마에서 프랑스 아비뇽으로 옮기게 된다. 1305년 프랑스인 클레멘스 5세(1264~1314)가 교황이 된 이후로 교황청은 67년간 프랑스에 있게 된다. 아비뇽에 거주한 교황들은 클레멘스 5세에서 시작해 요한 12세, 베네딕토 12세, 클레멘스 6세, 이노센트 6세, 우르반 5세 그리고 그레고리오 11세까지 7대의 교황으로 이어지는데, 이로써 아비뇽은 제2의 로마로서 부각된다.
아비뇽 유수 시절 네번째 교황으로 재직했던 클레멘트 6세(재위 1342~1352)는 1348년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교황청 궁전을 건축했다. 교황청 안으로 들어가면 대연회실을 비롯해 기도실, 예배실, 회랑, 회의실, 주방 등 20여 개가 넘는 방을 관람할 수 있다. 내부의 화려한 장식과 가구는 대부분 사라지고 없는 데, 입장할 때 주는 태블릿PC를 빈 벽에 비추면 중세시대 모습을 3D 증강현실 기술로 실감 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교황의 예배당과 침실에는 13~14세기 이탈리아와 프랑스 화가들의 프레스코화 그림이 벽에 남아 있고, 바닥의 모자이크 타일도 오랜 세월에 퇴색된 채 남아 있다. 성 마르샬, 성 요한, 대강당의 벽화는 이탈리아 화가 마테오 지오바네티의 프레스코화 그림으로 장식돼 있다.
교황의 침실 벽의 프레스코화는 하늘색 배경 위에 포도 덩굴과 떡갈나무 잎사귀 그림이 섬유의 텍스타일 디자인처럼 새겨져 있다. 식물 사이사이로 새와 다람쥐가 묘사돼 있는 장면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롭다.
빛이 들어오는 창문의 틀은 밖으로 갈 수록 좁게 만들어져 있어 원근법을 활용한 장식으로 보인다.
벽체의 아랫부분은 커튼모양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바티칸 교황청의 내부 방들 아랫부분이 명암과 원근법을 활용한 그림으로 장식돼 입체처럼 보이는 눈속임을 활용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교황의 방에서 나오면 클레멘트 6세의 서재인 ‘사슴의 방(Chambre de Cerf)’으로 연결되는 좁은 복도가 있다. 이 벽에는 1343년 프랑스와 이탈리아 화가에 의해 그려진 화려한 프레스코화가 눈길을 끈다.
자연의 농장 안에서 사냥과 낚시, 과일따기 등 전원 속 즐거움을 그린 그림이다. 연못에서 그물로 물고기를 잡고, 흰담비를 이용해 사냥을 하고, 허브, 꽃이 피어 있는 숲 속에서 과일을 따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화롭기 그지 없다. 이 방의 천정 밑에는 화려한 레임 밑으로 붉은색 배경에 낚시, 사냥, 동물들이 나오는 프리즈(frieze) 장식도 둘러싸고 있다. 교황청 벽화라면 바티칸의 ‘천치창조’나 ‘최후의 만찬’과 같은 성화를 떠올리는데, 아비뇽 교황청에는 전원 속에서 매우 세속적인 즐거움을 표현한 그림이 그려 있어 사뭇 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밖으로 나오면 교황의 정원이 펼쳐진다. 요한 22세, 베네딕트 12세, 클레멘스 6세, 우르비노 5세 교황은 분수와 나무, 꽃이 있는 정원 가꾸기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요한 22세는 곰, 사자, 낙타, 멧돼지, 사슴, 토끼 등 방대한 동물을 우리에서 길렀고, 후계자들은 타조와 공작도 정원에서 보고 즐겼다고 한다. 베네딕트 12세는 정원에서 교황의 식탁에 오르는 채소를 기르게 했다고 한다. 양배추, 시금치, 양파, 콩, 가지, 단호박 등의 야채와 마조람, 보리약초, 파슬리, 황소반 등 의약용 약초도 길렀다고 한다.
아비뇽시는 옛 문헌을 참고해 베네딕토 12세와 클레멘스 6세의 상부 정원과, 우르바노 5세의 하부정원의 꽃과 나무, 분수 등을 복원하고 있다. 현재 정원에는 포도나무, 꽃, 채소, 향신료 허브 등 다양한 꽃과 나무가 자라고 있다.
교황청의 지붕으로 올라가면 뾰족탑과 요철 문양의 성채, 활을 쏘는 십자가 모양의 틈 넘어 아비뇽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인다. 교황청 오른편에 12세기에 세워진 아비뇽 대성당(노트르담 데 돔)이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아비뇽 대성당은 머리 꼭대기 돔 위에 4.5톤 무게의 황금빛 성모상이 햇빛에 비쳐 빛나고 있다.
팔레 데 파프 광장의 한쪽에는 프티팔레 미술관이 있다. 아비뇽 유수 기간인 1320년에 지어진 옛 대주교의 궁전이었다. 현재 이곳은 보티첼리, 비토레 카르파초 등 13~16세기 이탈리아 종교화, 교황청 유물 등 뛰어난 종교 예술 컬렉션을 보유한 아비뇽의 대표 미술관 중 하나다.
아비뇽 대성당 옆 계단으로 올라가면 ‘로쉐 데 돔 공원(Rocher des Doms)’이 나온다. 절벽으로 이뤄진 언덕 위에 만들어진 영국식 정원으로 아기자기한 연못도 있고, 인공 동굴도 있다. 공원의 정상 부근의 파노라믹 전망대에서는 붉은색 지붕이 모여 있는 아비뇽 시가지와 론 강이 한눈에 들어온다. 둥근 탑 아래로 론강에 놓여 있는 생베네제교가 입체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언덕 위 전망대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계단을 내려오면 생베네제(Saint Benezet) 다리가 나온다. ‘아비뇽 다리 위에서’(Sur le Pont d‘Avignon)이라는 프랑스 민요로 유명한 다리다. 파리에서 아들이 유치원에 다닐 때 ’쉬를 퐁 다비뇽 오니 덩스~, 오니 덩스~‘(아비뇽 다리 위에서 다함께 춤추자)하며 입에 달고 살던 동요였다. 아비뇽 페스티벌이 열릴 때면 수많은 사람들이 손을 잡고 둥글게 원을 만들며 춤을 추거나, 한 손을 맞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부르는 노래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빙글빙글 돌며 ’강강술래‘ 를 부르던 것과 같이 프랑스인들에게 강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노래다.
생베네제 다리는 12세기 양치기 소년 베네제가 신의 계시를 받고 하나하나 돌을 쌓아 만들기 시작했다는 전설을 갖고 있다. 베네제는 론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지어야 한다는 강렬한 영감을 받고 계획을 실행하려 하지만 아비뇽 사람들은 비웃고 손가락질만 할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베네자가 천사의 도움으로 서른 명의 장정들 힘으로도 들 수 없는 거대한 바위를 들어서 옮기는 종교적 기적을 보여주게 된다. 이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가 사람들은 다리 놓기에 참여하게 된다. 1177년에 시작된 대공사는 1185년에 마침내 완성된다. 베네제는 이후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성인품을 받아 생(Saint) 베네제라 불리게 된다.
프랑스 아비뇽은 프로방스에 위치한 보클뤼즈의 중심이다. 알프스에서 발원해 지중해로 흘러드는 론 강이 아비뇽 생베네제 다리 밑으로 흐른다. 생베네제 다리는 원래 22개의 아치로 이뤄진 길이 920m의 다리로, 당시 유럽에서 가장 긴 다리였다고 한다. 그런데 1226년 루이 8세가 아비뇽에 쳐들어온 전투 때 다리의 4분의 3이 파괴됐다. 이후 로마식 교각으로 겨우 재건했으나 17세기 초에 잦은 강의 범람과 홍수로 다리가 또 붕괴됐다. 현재는 4개의 아치만 남아 있다. 다리 중간 1,2층에는 생니콜라스 예배당과 생베네제 예배당이 있다. 강과 어부의 수호자인 성 니콜라스를 위한 예배당이자 천사의 계시를 받은 생베네제의 무덤이 있던 곳이다.
생베네제 다리가 끊긴 마지막 지점에 가면 론강 건너편에 바스텔라스 섬이 보인다. 야생적인 론강은 수세기에 걸쳐 수많은 섬을 만들어왔는데, 아비뇽 올드타운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한 바스텔라스섬은 면적이 700ha나 된다. 프랑스의 강 주변 섬 중에 가장 면적이 크다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 시간이 되면 자동차를 타고 다리를 건거나 배를 타고 바스텔라스 섬으로 건너가보자. 아비뇽 시민들이 와인 한병과 과일, 샌드위치를 싸들고 피크닉을 떠나는 장소다.
바스텔라스 섬 쪽의 강변에 서서 아비뇽 구시가지를 바라보는 풍경이 기가 막히다. 육중한 성벽으로 둘러싸인 교황청과 아비뇽 대성당에서 이어지는 생베네제 다리까지… 론강 물 위에도 아비뇽의 역사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이 비치는 것이 포인트다. 석양에는 더욱 아름다워진다고 하는데, 푸른색으로 넘실 거리는 론강의 숨결만으로도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교황청 역사지구를 둘러보다가 지친다면 교황청 바로 뒷편 골목에 있는 5성급 호텔 라 미랑드에서 차 한잔 마시는 것도 좋다. 14세기 추기경의 궁전이었던 곳을 새단장한 호텔로, 창문으로 교황청 궁전이 내려다보이는 18세기 스타일의 앤티크 객실이 인상적이다.
1층엔 미쉐린 1스타 레스토랑과 함께 분위기 있는 살롱 스타일의 카페가 있다. 이 곳 레스토랑의 19세기 키친에서도 호텔 셰프가 진행하는 쿠킹 클래스가 열린다. 프로방스의 미식과 요리를 직접 만들고 체험하면서, 각국에서 온 관광객들과 함께 와인을 마시며 파티를 즐길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아비뇽 구시가의 중심에는 시계탑 광장이라는 뜻의 ‘오를로쥬 광장’(Place de l‘horloge)이 중심이다. 오를로쥬 광장 왼편에는 아비뇽 시청사와 오페라 극장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프랑스의 대부분의 광장에는 꼭 있는 회전목마가 놓여 있다. 애잔한 배경음악의 영화에 나올 법한 회전목마다.
노천카페와 아이스크림 가게가 있는 광장 오른편에는 1968년 프랑스 학생운동에 뿌리를 둔 예술 영화관 유토피아(Utopia)가 있다. 자유분방한 분위기의 비스트로도 있다.
아비뇽 구시가를 걷다보면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건물을 발견한다. 프라이빗 호텔로 쓰이는 ‘라 디빈 코메디(La Divine Comédy)’의 정원에는 프로방스의 명물인 사이프러스 나무가 우거진 숲 속을 거닐며 산책할 수 있다.
연못과 수영장, 대나무숲으로 구성된 프로방스의 정원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다. ‘라 디빈 코메디’는 이탈리아 대문호 단테의 ‘신곡(神曲)’이다. 이 정원을 걷다보면 단테가 두루 여행했던 천국과 지옥의 진기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는 뜻이리라.
프로방스 보클뤼즈 지역의 중심도시인 아비뇽은 론(Rhone) 와인의 수도이기도 하다. 구시가지 골목길에 있는 ‘르 방 드봉 스와(Le vin devant Soi)’는 론지역에서 생산되는 다양한 와인을 테이스팅할 수 있는 와인샵이다. 이 샵의 이름이 흥미롭다.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소설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을 패러디해 ‘자기 앞의 와인’이라고 붙인 이름이다. ‘자기 앞의 생’이 앞으로의 여생을 의미한다면, ‘자기 앞의 와인’은 내게 남은 여생에 즐길 와인을 찾을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인가.
이 와인샵에서는 일정액의 카드를 구입하면 다양한 종류의 와인을 취향 껏따라 마실 수 있는 시스템이 눈에 띈다. 주인장은 지도를 펼쳐놓고 코트 뒤 론 부터 샤토 네프 뒤파프, 타벨, 바케라스, 지공다스, 에르미타쥬, 생조셉, 코트 로티, 콩드리유 등 론 지역의 명품 와인들의 포도 품종과 맛, 향기 등을 하나하나 설명해준다.
아비뇽 교황청에서 가까운 골목길에 있는 ‘라 푸르셰트(La Fourchette)’는 미슐랭가이드가 추천하는 아비뇽 10대 레스토랑 중 하나다. 입구부터 메인홀까지 레스토랑 벽면에는 아비뇽 페스티벌 포스터가 빼곡히 붙어 있다. 축제를 찾는 사람들에게 유명한 식당이기 때문이다. 1982년부터 40년 넘게 운영해온 이 레스토랑에서 맛볼 요리로는 프로방스 아비뇽식 소고기찜 요리인 ‘도브(Daube de Boeuf)’를 추천한다. 국물이 자작한 소고기 스튜요리로 마치 갈비찜과도 유사한데, 레드와인과 토마토, 올리브, 아티쵸크, 그리고 허브를 넣어 5~6시간 익혀내 부드럽게 씹히는 고기 맛을 느낄 수 있다.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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