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더라도 [편집인의 원픽]

2023. 7. 1.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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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에 깔린 많은 종이들 가운데 하나를 탁 집어 책상 위에 올려놓는 일. 흔히 언론의 역할로 불리는 어젠다 세팅(Agenda Setting·의제 설정)이 그와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에는 수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진다. 그 중에 뉴스 소비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가 뭘까. 고민과 취재를 거쳐 우리가 내놓는 기사(어젠다)는 독자에 말을 거는 일이다. 뉴스 수명이 갈수록 빨라지는 요즘, 조금이라도 더 많은 독자들과 나누고 싶은 세계일보만의 기사를 소개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보았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 사 이후 나 홀로 왔다’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 ‘굳세어라 금순아’를 흥얼거릴 수 있다면 당신은 베이비붐 세대일 공산이 크다. 1950년대 가수 현인이 부른 이 노래는 6.25 전쟁 당시 피난 과정에 누이동생을 잃어버린 오빠의 심정을 그렸다. 소설가 복거일은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6.25 전쟁의 기원과 주요 전투를 다루고 있는데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에 전쟁의 교훈을 알리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그는 “영웅적인 작전과 피난민들의 비극과 그들을 하나라도 더 구출하려 애쓴 사람들을 기억하는 일은 나이 든 세대의 몫으로 남았다”고 썼다.
초대 주한 미 8군 사령관으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지휘한 6·25전쟁 영웅 월턴 워커 장군의 손자 샘 워커 2세가 20일(현지시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세네카에 있는 자택에서 세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세네카=박영준 특파원
올해는 6.25 전쟁 발발 73주년, 정전 70주년이다. 정전협정 후 한·미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면서 한·미 동맹도 70년의 역사를 맞았다. 이제는 전쟁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보다 겪지 않은 사람들이 훨씬 많다. 젊은 세대에 6.25 전쟁은 1,2차 세계대전처럼 교과서에서 배운 ‘납작한’ 지식이 됐다. 세계일보는 한·미동맹 70주년 시리즈를 시작하며 첫 순서로 6.25 영웅 워커 장군의 손자 샘 워커 2세 인터뷰 “한·미 피로 지킨 낙동강 방어선…동맹의 초석”(6월26일자 박영준 워싱턴특파원) 기사를 실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이들의 희생을 기억하는 건 언론의 몫이기도 하다. 전쟁은 종결되지 않았고, 아직도 대한민국은 ‘적화 통일’을 도모하는 집단과 국경을 맞대고 있기 때문이다.   

◆“낙동강 전투 없었다면 인천상륙작전 없어”

초대 주한 미8군 사령관인 월턴 워커 장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사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서울을 함락시킨 북한 군이 남쪽으로 밀려오면서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느냐가 전세를 결정짓는 분수령이 됐다. ‘맥아더 사령관 계획대로 9월 인천에서 보란 듯이 도박(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끌때까지만이라도 버틸 수 있느냐가 관건’ 이었다.(‘콜디스트 윈터’ 데이비드 핼버스탬) 이 책에 따르면 워커 장군은 부대가 낙동강 근처에 자리를 잡자 이렇게 당부했다. “이제 더 이상 후퇴는 없다. 누가 뭐래도 방어선을 뒤로 늦추거나 조정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 끝까지 싸우자. 하나로 뭉쳐서 굳게 맞서야 한다. 우리 중 누군가가 죽어 넘어지더라도 우리는 함께 싸우다 죽을 것이다.”
월턴 워커 대장.  샘 워커 2세 제공
당시 워커 장군의 ‘현지 사수’(stand or die) 의지는 낙동강 방어선을 지킨 동력이 됐다.
워커 장군의 손자 샘 워커 2세는 세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백선엽 장군이 이끈 한국군과 할아버지가 지휘한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 공격을 견뎌내지 못했다면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한국이 지금 세계 경제의 리더가 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그들이 북한 공격을 막아냈기 때문에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상륙할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워커 장군은 그가 세운 공로만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콜디스트 윈터’의 저자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와 부산방어전은 그 뒤에 일어난 큰 전투들에 가려 미국인들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그 힘든 기간에 워커는 훌륭한 장교로서 자신의 몫을 다했다. 워커는 부하들에게 절대 비굴하게 달아나지 말고 군인답게 싸우다 죽으라고 명령했고 자신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고 썼다. ‘부산을 점령하려는 인민군을 마지막 순간까지 저지한 군인이 되겠다’던 워커 장군은 1950년말 경기 의정부로 향하던 중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교통사고를 낸 한국군을 사형에 처하라고 지시했지만 워커 장군의 유족이 선처를 호소해 중형을 면했다고 한다.  
1950년 8월, 최후 방어선인 낙동강전선에서 월턴 워커 장군(가운데)이 참모들과 작전을 숙의하고 있다. 육군대학 전사연구실 제공
◆“이름모를 소년, 소녀들을 위해 싸웠다.”

6·25 전쟁에 참전한 유엔군은 연인원 기준으로 195만7616명에 달한다. 이 가운데 미군이 178만9000명으로 가장 많다. 대개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 어떻게 전쟁이 났는지 알지 못한채 전장에 투입됐다. 참혹한 전쟁을 치른 이들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간 뒤에도 깊은 상흔이 남았다. 19살에 미 해병 7연대 소속으로 인천에 도착한 살바토레 스칼라토는 세계일보 기자와 인터뷰에서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전했다. 전쟁 중 어느 마을에서 손이 잘려나간 소년을 만나 의료 시설이 있는 보육원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꼬마가 (남은)팔로 제 목을 꼭 감싸 안았다. 그리고 고통스러워서 비명을 질렀다. 소년을 의사에게 맡긴 뒤 보육원을 나섰다가 주머니에 소년의 (잘린) 손이 있다는 걸 알고 다시 돌아갔는데 이미 소년은 숨진 상태였다. 벙커에 돌아와 한참을 울었다. 내가 이 나라에 싸우러 온 이유는 소년, 소녀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나의 (전투에 임하는)태도가 바뀌었다.”

복거일 책에는 황초령 아래 얼어죽은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1해병연대 1대대 소속이었던 윌리엄 홉킨스 대위의 회고다. 중공군에 쫓겨 피난민들이 달아나던 와중에 어떤 남매가 손을 잡고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조금 있다가 소녀 혼자 추위에 떨면서 오빠를 찾아 길을 거슬러 왔는데 눈 속에 넘어지더니 일어서지 못했다. 홉킨스 대위는 소녀를 벙커 안으로 데려와 뜨거운 차와 C레이션(전투식량)을 줘서 원기를 차리게했지만 후위 작전을 맡은 부대 소속이라 소녀를 데리고 있을 처지가 못되었다. 안타깝지만 소녀에게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가라고 했는데, 그는 다음날 황초령 아래 도로 옆에서 소녀의 주검을 보았다.  

2021년 4월 미국 하와이 국립태평양기념묘지에서 거행된 ‘전쟁포로·실종자의 날‘ 행사장에 참석한 적이 있다. 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200여명의 ‘잊히지 않을(never forgotten)’ 이름이 불러진 뒤 헌화의 행렬이 길게 이어졌다. 6.25 전쟁에서 전사한 3만3000여명과 7800명이 넘는 실종자는 왜 한·미 동맹을 ‘혈맹’이라고 부르는 지 실감케 한다.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위해서든, 이름모를 소년 소녀들을 위해서든 그들의 희생을 가치있게 만드는 일은 우리가 기억하는 것이다. 비록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더라도.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  세계일보 자료사진
P.S. 취재한 박영준 특파원에게 물었습니다.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샘 워커 2세를 인터뷰한 이유는. 
 
“인터뷰를 준비, 진행하면서 6.25 전쟁의 결정적인 순간과 한·미동맹 역사와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워커 2세와 그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과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에 잘 알려져 있지만, 인천상륙작전을 가능하게 한 6.25전쟁의 결정적 순간인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지휘한 워커 장군의 업적과 그 아들 샘 워커 장군, 샘 워커 2세의 한국
 
복무까지 이어지는 역사가 한·미동맹 70주년의 의미를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워커 2세가 인터뷰에서 각별히 밝힌 소회가 있다면. 
 
“그는 줄곧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한국에서의 군 복무와 한국에 대한 존경과 희생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감사하다고 수차례 말했다. 한국에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워커힐 호텔이나 관련한 기념 행사에 초대를 받았던 기억들을 소중하고 뜻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샘 워커 2세는 한국에서는 워커 장군의 낙동강 방어선 전투에 대한 평가가 이뤄지고 있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데 대해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다.”
 
-미국에서는 6.25 전쟁이 ‘잊혀진 전쟁’으로 불리는데.
 
“참전 용사들에 그런 평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 지 물어봤다. 워커 2세는 동의한다고 말했고, 참전 용사 살바토레 스칼라토 역시 그렇다고 말했다. 그 원인은 미국에서 6.25 전쟁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다는 인식이 있었다. 가장 인상적인 답변은 미 워싱턴 링컨기념관 인근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에서 열린 6·25전쟁 73주년 기념행사에서 만난 주한미군사령관 출신 존 틸럴리 한국전참전용사기념재단(KWVMF) 이사장이 “많은 미국인이 6·25전쟁을 기억한다. 잊힌 전쟁이 아니라 ‘기억된 승리’다”라고 답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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