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봉준이 국가유공자여야 하는 역사적이고 법적인 이유
[이찬수 전 보훈교육연구원장]
전봉준, 김개남, 손화중 등 동학혁명 지도자를 '국가유공자'로 서훈하라는 탄원, 시위, 그와 관련된 기사가 면면이 이어지고 있다. 아직 국민적 관심의 대상까지는 못 되고 있지만, 이러한 요구의 의미는 적지 않다.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제4조, 이하 '국가유공자법')에 의하면, 국가유공자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를 위시해 '국가사회발전 특별공로자'에 이르기까지 모두 18개 범주로 구분된다. 그 가운데 국민에게 가장 익숙한 언어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이다.
'국가유공자법'에 의하면, '순국선열'은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인하여 순국한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2020년 기준으로 유족포함 887명)이다. 그리고 '애국지사'(愛國志士)는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로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 국내외에서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사실이 있는 자로서, 그 공로로 건국훈장·건국포장 또는 대통령 표창을 받은 자를 말한다."(2020년 기준, 유족포함 7,338명) 이분들을 이른바 독립유공자라고 한다.
'국가보훈기본법'에서는 '독립유공자'와 함께, 전쟁에서 국가를 지킨 분들을 '호국유공자'로, 4.19혁명이나 5.18민주화운동에 희생적으로 참여한 분들을 '민주유공자'로 인정하고 서훈하고 지원하며 그 정신을 기린다.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와 같은 독립유공자 및 수많은 호국 및 민주유공자가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가운데 '독립유공자'와 관련하여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가 있다. 그것은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 전후(前後)"의 시점을 언제로 보느냐, 특히 '전'(前)을 어디까지 잡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 시점에 따라 독립유공자의 대상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늘 해석을 필요로 하는 애매한 시대 규정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의 관례상으로는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일본군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을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의 기점으로 잡고 있다. 이 사건을 '전후한' 반일 독립운동에 대한 희생적 가담자라면 독립유공자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1894년 9월(음력 8월)에 일어난 2차 동학운동의 일환으로 벌어진 반일 의병 활동을 '국권침탈 전(前)'의 영역에 포함시킬 수 있는 것일까. 현재까지는 여기에 포함되지 못하고 있지만, 추후 밝혀진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국권침탈 전'의 시점이 분명해진다.
가령 1894년 3월에 벌어진 제1차 동학농민혁명은 기본적으로 반봉건적 성격이 강한 국내적 봉기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에 봉기한 2차 동학혁명은 청일전쟁을 벌이며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에 저항하며 벌인 반일, 반제 운동이었다. 2차 동학혁명을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하다가 그 반대나 항거"로 볼 수 있다는 것은 <건건록>(蹇蹇錄)고 같은 당시 일본 외교문서에서 확인되고 있다.
<건건록>은 이토 히로부미 내각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츠 무네미츠(陸奧宗光, 1844-1897)가 동학혁명이 발생한 1894년부터 일본군의 조선 파병, 조선 내정 개혁 문제, 청·일 전쟁,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구미 각국과의 교섭 등을 상세히 기록해둔 책이다. 이에 의하면, 무츠 무네미츠는 당시 주조선공사 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공모해 경복궁 점령을 위한 은밀한 계획을 세웠고, 1894년 7월 23일 오토리의 지휘에 따라 일본군이 경복궁으로 몰려들어왔다. 그리고 이틀 후에 조선에서 일본은 청국과 전쟁을 벌였다. 조선이 청국으로부터 독립하도록 돕다가 청일전쟁이 벌어졌다는 일본의 공공연한 입장(현재의 일본인 다수가 이렇게 생각한다)과 달리, 청국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 경복궁을 점령했고(이른바 갑오왜란), 전쟁에서 승리해 조선에 대한 청국의 간섭을 배제한 뒤 조선을 완전 점령하겠다는 숨은 목적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일본의 경복궁 점령 사건은 일제의 의한 국권침탈의 노골적 시작이고, 그 뒤 동학군이 의병으로 전환해 항일 전쟁을 했다는 사실은 "일제에 의한 국권침탈에 반대하며 저항"하는 행위에 부합하는 사건이었다는 뜻이다. 그 과정에 희생당한 동학군이 국가유공자법에 따른 순국선열의 범주에 해당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재까지 국가보훈부는 동학농민혁명은 기본적으로 조선의 탐관오리를 비판하며 봉건체제를 바꾸기 위한 국내적 저항운동이지, 일본에 대한 항거로서의 독립운동으로까지 보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세는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하 '동학농민명예회복법', 2004년 제정)과 충돌한다. 이 특별법에서는 법 설립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봉건제도를 개혁하고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사람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고 계승·발전시켜 민족정기를 북돋우며,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와 그 유족의 명예를 회복함을 목적으로 한다." 동학혁명이 반봉건 운동일 뿐만 아니라 일제로부터의 국권수호 운동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1894년 9월 2차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에 대해서는 "1894년 3월에 봉건체제를 개혁하기 위하여 1차로 봉기하고, 같은 해 9월에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제2조)라고 명시하고 있다.
국권 수호를 위해 "2차로 봉기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농민 중심의 혁명 참여자"라는 규정은 '국가유공자법'의 독립유공자 규정인 "일제의 국권침탈을 반대하거나 독립운동을 위하여 일제에 항거...한 이"와 다르지 않다. 두 법을 모두 존중하고자 한다면, 동학군 중 항일 의병 활동을 한 이를 독립유공자에서 배제해야 할 이유가 없어진다. '국가보훈기본법', '국가유공자법', '동학농민명예회복법' 간의 충돌을 막고 법률의 일관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라도 "일제의 국권침탈 전후"의 시기와 사례를 명확히 하고, 2차 동학농민혁명군 중에 항일 의병활동으로 이어간 이들을 발굴해 독립유공자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한다. 그래야 '국가보훈기본법'에 담긴 독립, 호국, 민주의 논리적 일관성과 순환적 연결고리까지 제대로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동학농민혁명은 일제로부터의 독립운동의 시원이라고 할 수 있다. 나아가 동학운동이 계급 차별을 극복하고 만인평등을 내세웠다는 점에서는 민주주의 운동의 시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척왜척양(斥倭斥洋)을 내세운 반외세 운동이기도 하고, 일본이 조선을 사실상 강점하기 시작한 상황인 만큼 사실상 항일 독립전쟁으로서의 면모도 분명하다. 동학농민혁명은 독립, 호국, 민주유공자의 개념을 모두 포함하면서 이들 세 가치의 상호연결과 순환을 가능하게 해주는 시원적이면서 상징적인 사례이다. 보훈의 민주적 가치를 주권회복 및 독립운동의 정신과 연결시킬 수 있는 사례인 것이다.
이렇게 동학농민혁명의 경우를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한반도에서 독립, 호국, 민주는 서로 다른 영역이 아니며, 독립이든 호국이든 민주든 억압, 침략, 독재로부터의 해방 운동이고, 자율성과 주체성의 확립을 위한 운동이라는 논리를 구체화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동학농민혁명은 독립-호국-민주를 연결시키는 한국적 보훈의 논리를 확보하고 보훈 철학도 정립하는 데 크게 기여할 역사적 사례일 수 있는 것이다.
현재 국내의 보훈 업계에는 세 가지 가치의 '접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보훈의 시점에 대한 명시적 공감대가 없는 탓에 보훈의 가치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한국 사회에서 갈등이 지속되어오고 있는 데에도 이러한 논리의 부재 및 가치의 연결성에 대한 공감대의 부족이 놓여 있다. 독립-호국-민주의 연결고리를 확보해야 보훈의 목표인 국민통합과 국가발전의 이념도 논리적 설득력을 확보하게 된다.
전봉준(1855-1895.03)은 물론 김개남(1853-1894.12), 손화중(1861-1895.03) 같은 동학혁명 지도자가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더욱이 전봉준에 대한 법정 신문 기록인 '전봉준공초'(1895)에서도 전봉준은 일본 군대가 "야반에 왕궁을 격파"하는 일을 벌였기에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의병을 규합해 일본군과 싸우"려 "다시 봉기"했다는 내용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조선을 사실상 점령한 일본에 대항해 무장 투쟁을 주도했다가 친일 내각 하의 일본 영사관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은 사실이야말로 "일제의 국권침탈에 반대"하거나 "항거"한 명백한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전봉준 같은 위인부터라도 국가유공자로 서훈해야 한다. 더 망설일 이유가 무엇인가.
[이찬수 전 보훈교육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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