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쓸 일 만들지 마!" 거지방 열풍 속 씁쓸한 시대상
실질소득 줄고 지출 부담 커지자
무지출 챌린지, 앱테크에 이어
지출 내역 공유하는 거지방 열풍
MZ가 고물가 터널 지나는 방법
'거지방'이 유행이다. 다소 자극적인 명칭의 이 오픈채팅방은 '거지를 자처하는' 이들이 모여 지출 내역을 공유하고, 그 내용 하나하나를 지적하는 대화들이 주를 이룬다. '프랜차이즈 커피 대신 탕비실 인스턴트 커피를 마시라'고 조언하고, '택시 탈 일 만들지 않도록 일찍 일어나라'고 꾸짖는다. 언뜻 장난처럼 보이지만, 고물가 시대를 사는 젊은 세대들의 웃픈 현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오늘 늦잠 자서 아침에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비 1만원 나왔습니다." "교통비에 초록 지폐를 사용하다니…. 다들 아껴 씁시다!" "다음부턴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일찍 집에서 나오세요." "'나약한 정신에 소비가 깃든다'는 말 잊지 마세요."
# "외식하지 않고 집밥으로 끼니를 해결해서 오늘 하루 무無지출에 성공했습니다." "집밥 메뉴는 무엇이었나요?" "소비 조장일 수 있어서 노코멘트하겠습니다."
# "스타벅스 커피 한잔 마셔도 될까요? 기프티콘을 사용할 예정입니다." "기프티콘은 당근마켓에 파세요. 저는 인스턴트커피 들고 다닙니다." "인스턴트커피는 샀나요?" "회사 탕비실에서 수급합니다."
최근 카카오톡의 한 오픈채팅방에서 오간 대화다. 누군가 그날 지출한 내용을 공유하면 다른 이들이 그의 지출 내역을 평가한다. 쓸데없는 낭비라고 판단하면 비판이 쏟아지고, 온종일 한 푼도 쓰지 않았다고 하면 칭찬이 이어진다.
이 흥미로운 오픈채팅방의 정체는 '거지방'이다. 이는 지출 내역과 지출 계획을 공유하며 절제력을 기르는 채팅방을 뜻한다. 카카오톡 오픈채팅 검색창에 거지방을 입력하면 '거지방 원조' '거지방 1호점' '방송에 나온 그곳'이란 타이틀의 오픈채팅방이 좍 뜰 정도로 많다.
그중 1000명 이상의 참여 인원이 있는 거지방 하나를 선택해 입장했다. 일단 거지방에 입장하면 가장 먼저 할 게 있다. 공지사항을 읽은 후 규칙대로 해야 한다. 이곳의 규칙은 대략 이렇다. "닉네임 옆에 이번 달 지출금액을 적어라" "오늘 지출했던 걸 보내라" "사치 조장 사진(음식 사진), 유료 이모티콘은 소비를 조장할 수 있어서 가린다" "돈 자랑, 재산 자랑은 강퇴".
공지를 읽어내려가다 보니 '지출'과 '사치' 기준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에선 "병원 진료비, 약값, 끼니, 물까진 인간의 기본 존엄성을 위한 지출로 보지만, 간식과 필요 이외의 소비재는 사치로 간주"한다. 이모티콘은 무료로 받은 이모티콘만 사용할 수 있다. 사치 또는 위화감을 조성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번달 카드결제금액을 적어 닉네임을 수정하자 참여자간 대화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지출 내역과 지출 계획, 이를 평가하는 글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간간이 일상적인 대화까지 더해지면서 한순간 수백개의 대화가 쌓였다. 이런 대화는 밤낮, 휴일을 막론하고 계속 이어졌다.
오픈채팅 거지방이 이토록 활발하게 운영되는 이유는 뭘까. 이영애 인천대(소비자학) 교수는 "현생을 살며 욜로(YOLOㆍYou only live once)를 추구하던 젊은 세대가 경제적 어려움을 직접 겪으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이를 분석했다.
이 교수의 얘기를 더 들어보자. "젊은 세대가 욜로를 추구할 수 있었던 건 물가가 안정적인 상황에서 주식ㆍ코인 등으로 자산 증식의 재미를 봤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가가 계속 오르고 이자율이 상승하면서 투자금을 회수할 기회를 상실했다. 가처분소득이 감소하자 경제적 어려움을 직접 체감하면서, 당장 이를 극복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직면한 거다."
실제로 고물가가 이어지면서 지난해보다 생활이 더 빠듯해졌다는 이들이 많다. 긱워커플랫폼 뉴워커가 지난 5월 성인남녀 82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자. 전체의 88.4%가 지난해보다 생활이 더 빠듯해졌다고 대답했다. 지출 부담이 커진 항목 1순위는 '식비(72.6%)'였다. 식료품ㆍ비주류음료와 음식ㆍ숙박 물가상승률이 소비자물가를 훨씬 웃돈 게 응답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통계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전체 소비자물가상승률은 2월 5.5%(전년 동월 대비), 3월 4.4%를 기록한 데 이어 4월부터 3%대로 다소 안정세를 찾아가고 있지만 식품ㆍ외식 등 생활물가는 여전히 높다. 10%까지 치솟았던 가공식품 물가 상승률은 여전히 7%로 높고, 외식물가 역시 줄곧 7%대였다가 지난 5월에야 6.9%로 내려왔다.
물가는 오를 대로 올랐지만, 실질소득은 감소했다. 지난 1분기 소득 1~3분위 실질소득은 1년 전과 비교해 각각 1.5%, 2.4%, 2.1% 감소했다. 이러다 보니 생활에서 지출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는 이들이 81.0%에 달했다. 뉴워커에 따르면 '직접 요리해서 먹는다(46.1%)'는 이들이 가장 많았고, '지인ㆍ친구와의 약속 또는 모임을 줄인다(31.8%)' '구내ㆍ교내식당 등 저렴한 곳을 이용한다(31.2%)'는 응답도 있었다.
이렇게 달라진 경제 환경은 '거지방'의 등장을 부채질했다. MZ세대를 중심으로 아예 한푼도 쓰지 않는 '무지출 챌린지', 지출을 극단적으로 줄이는 '짠테크', 앱을 활용해 포인트 등을 모으는 '앱테크'가 한차례 휩쓸고 갔고, 그 바통을 거지방이 이어받은 거다.
이 교수는 "무지출 챌린지를 하고, 일하면서도 부수적으로 수입을 창출하는 앱테크 등을 하려면 소위 '갓생'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본인들의 스케줄과 소비 패턴을 체크하는 것으로 발전한 것"이라며 "더 강력한 제재 방법으로 거지방이 등장한 것 아닐까 생각한다"고 말했다.[※참고: 갓생은 신을 의미하는 'God'과 인생을 뜻하는 '생'의 합성어다. 부지런한 삶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거지방에 참여하고 있는 이들이 서로의 지출 내역을 지적만 하는 건 아니다. 서로의 처지를 위로하고, 같이 힘든 시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삼기도 한다. 이 교수는 "매번 참고 견디는 생활만 하긴 어렵다 보니, 그 안에서 다양한 정보 교류가 이뤄지고 있다"면서 "그런 과정들을 통해 감정적인 장벽이 허물어지고, 그것이 또 다른 형태의 커뮤니티가 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고물가의 그림자 속 MZ가 만든 거지방 열풍, 다음엔 또 어떤 웃픈 갓생이 등장할까.
김미란 더스쿠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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