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 화폭에 담긴 ‘애정 어린 시선’
떠나온 이가 도착해 만나게 된 두 작품이 있다. 엘리자베스 키스가 1920년에 그린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과 김현철의 2021년 작품 <제주바다>다. 두 작가가 담아낸 세계는 파라다이스일까, 아니면 그저 현실을 외면한 신기루일까.
목판화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에선 시리도록 푸르른 달빛의 색채가 선연하게 화면을 채운다. 그 중심에 서울의 동대문(흥인지문)이 있다. 우아하고 고고하다. 엘리자베스 키스(1887~1956)가 생전에 남긴 100여점의 다색 목판화 중 최고의 수작으로 평가받는다. 키스의 그림을 특별하게 하는 건 ‘평범함’이다. 작품이 밋밋하다는 뜻이 아니다. 그림을 찬찬히 보면 동대문의 문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뒷모습이 보인다. 저 멀리 궁궐 옆쪽에 옹기종기 모인 가옥에서는 불빛들이 새어나온다.
키스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 목판화 100여점 중 최고
풍경화적 기법에 대한 찬사와 호평은 일정 부분 화가의 재능과 테크닉에 기댈 수 있다. 특정한 삶의 터전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인물을 그려낸 그림은 이와 다르다.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람에 대한 존중이 담길 때 누군가에게 명작이 된다. 키스의 또 다른 작품 <아기를 업은 여인>(1934)에서는 한국 어머니에 대한 이해가, <민씨가의 규수>(1938)에서는 여성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한 애처로움이,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서 온 사람>(1939)에서는 중하층 한국 남성의 일상에 대한 관찰이 세심하게 배어 있다.
키스는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나 아일랜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1919년 일본의 옆 나라 조선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뒤 자연 풍경에 반하고 서울에서의 생활을 이어가며 한국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그 일상에 마음을 빼앗겼다. 그는 1920년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을 완성했다. 처절한 만세삼창이 울려퍼졌지만 결과는 참혹했던 3·1운동 이듬해였다. 그러나 키스의 그림 속 조선인은 그저 평온하다. 곱게 색동 한복을 입은 아이들은 천진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장기를 두는 노인들은 한가로워 보인다. 결국 키스의 시선에 애정이 확인된다고 해도 그 또한 식민지 조선에 잠시 머물다 가는 타자임을 실감한다. 누구나 이국적인 장소에 머물게 되면 감정의 변이를 겪는다. 낯섦은 두려움과 함께 새로움이라는 흥분을 일으켜 어떤 현상을 왜곡시키기도 하고 현실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기도 한다. 키스의 그림이 서양과는 다른 동양의 미를 간직한 조선을 이상향으로 바라보며 식민지 조선의 일상에 낭만을 과하게 얹었다는 비판이 가능한 지점이다.
키스의 그림이 서늘한 현실에서 비켜나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그가 현실을 외면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키스는 회고록에서 “죄수들은 오히려 당당했고 그들을 호송하는 일본 사람들은 초라해 보였다”고 적었다. 그가 목격한 건, 부끄럼 없이 떳떳했던 한국인의 고귀한 삶의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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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철 ‘제주바다’ 청량한 물빛·모래 질감 그대로
“이 그림을 서울 집에 걸어두면 제주에 못 가도 참을 수 있겠구나.” 어느 여행자는 블로그에 <제주바다>를 보고 이런 감상을 남겼다. 적극 동의한다. 2년 전 여름 서귀포에서 있었던 ‘섬에 든 달과 물과 돌’ 전시에서 김현철의 그림을 처음 만났다. 여러 작품 중 <제주바다>에 유독 시선이 머물렀다. 처음에는 3m가 넘는 길이(높이는 91㎝)에 압도당했지만 이내 편안해졌다. 청량한 물빛의 파랑과 에메랄드빛 푸르름과 촉감이 느껴지는 듯한 모래의 색감에. 이어 혼미해지기까지 했는데 정확한 이유를 찾지 못했다.
서울로 돌아와 도돌이표 같은 바쁜 일상이 또다시 시작됐다. 복잡한 생각들이 얽힌 어느 날, 비스듬하게 반쯤 누워 거실 창으로 서울의 흔한 풍경을 바라보다가 <제주바다>가 떠올랐다. ‘그래 여백이야.’
2021년 작인 <제주바다>는 진하고 청명하다. 푸른 안료를 동양화법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색감이 주는 효과다. 동양화를 전공한 작가는 1990년대부터 20년 동안 진경산수의 화법과 정신을 탐구하다 우연한 계기로 2010년 제주로 갔다. 산수에 대해 오래도록 연구하며 여러 곳을 유람한 그였지만 제주의 자연은 그의 화풍을 변화시켰다. 작업실을 나와 직접 제주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갇혀 있던 시야가 열렸다.
<제주바다>의 단정함은 수평선에서 온다. 여백은 선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김현철이 펼쳐낸 바다는 분명 실재하는 공간이지만 비현실적이기도 한다. 작가노트를 읽었다. 궁금증이 풀렸다. “그림 속 넓게 펼쳐진 바다의 수평선을 최소한으로 마감해 여지를 남겨둔다. 실제로 존재하는 대상들을 애써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감상자 스스로 공간을 채울 수 있다.” 과감히 비워진 바다 안에는 최소한의 선만이 자리한다. 화면을 통해 느껴지는 독특한 질감의 정체는 삼베로 만든 아사천이다. 화면 뒷면을 채색하는 배채 기법을 구사해 청색의 안료가 겹겹이 예민하게 스며들었다. 그가 펼쳐놓은 바다에서 짙고도 옅음이 동시에 느껴지는 이유다.
엘리자베스 키스의 <달빛 아래 서울의 동대문>과 김현철의 <제주바다>에는 생략된 이야기가 존재한다. 근대 시기 영국에서 동양의 작은 나라로 온 엘리자베스 키스와 육지에서 가장 먼 남쪽의 섬으로 간 김현철은 이색적이고 이국적인 정취를 캔버스에 담았다. 두 화가가 그려낸 낯선 공간을 향한 애정에는 거짓이 없다. 타자화된 두 화가의 그림 속 시선은 현실에 대한 외면이 아닌 이곳에 사는 이들에게 보내는 찬사임이 틀림없다. 여름이다. 떠나는 이들이 만나게 될 풍경에 한껏 마음이 들뜬다.
미술 칼럼니스트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소심하고 예민한 기질만 있고 재능이 없단 걸 깨달았다. 모네와 피카소보다 김환기와 구본웅이 좋았기에 주저 없이 한국 근현대미술사를 전공했다. 시대의 사연을 품고 있는 근대미술에 애정이 깊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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