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 자기 땅 소작인에 기부하고 서울서 아이스크림 파는 남성의 얼굴 [청계천 옆 사진관]

변영욱기자 2023. 7. 1. 11:0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백년사진 No. 25
▶100년 전 신문에 실린 사진을 통해 오늘을 생각해 보기 위해 동아일보 사진부에서 매주 토요일 연재하고 있는 [백년 사진] 코너입니다. 이번 주 고른 사진은 1923년 6월 26일 자 동아일보에 실린 사진입니다. 모자를 쓰고 멜빵 바지를 입은 중년의 남성과 앳띤 얼굴의 청년 한 명이 카메라를 응시하며 서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일까요? 제목은 아이스크림입니다. 100년 전 이 땅에 처음 들어온 아이스크림에 관한 이야기일까요? 사진에 붙어 있는 설명을 읽어보았습니다.

[아이스크림]서 늘한 소리 일다. 그러나 이것을 외치고 다니는 사람은 비지땀을 흘린다. 제 등골에 땀흘리지 않고 남의 힘으로 만든 것만 빨아먹는 생활이 양심에 부끄럽다 하여 자기 소유의 전답을 소작인에게 기부하고 맨 손으로 나선 강택진씨는 땀을 흘리는 첫 생애로 이 아이스크림 장사를 시작하였다. 사진은 포풀러 그늘에 아이스크림 통을 놓고 손님을 기다리는 강씨일다 (향하여 바른 편)


▶자기 힘으로 일하지 않고 남의 힘으로 만든 것을 착취해서 사는 생활이 양심에 부끄러워 자신의 논밭을 소작인에게 주고 장사를 시작했다는 강택진씨라는 설명입니다. 사진 왼쪽 젊은 청년에 대한 설명은 없어, 강택진씨의 지인인지 손님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스토리가 너무 흥미로을 것 같은데 이날 신문에는 더 이상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기자는 전화로 일할 수 없는 직업입니다. 취재기자가 인터뷰를 하고 필요한 사진을 찍어 달라고 할 때 찍는 사진도 있지만, 사진기자가 스케쥴을 챙겨 현장에 나가 사건과 행사를 기록하거나 이곳저곳 돌아다니다 재미있거나 스토리가 있는 인물이나 현장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사진기사라고 해서 사진을 위주로 하고 간략한 설명으로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사진도 분류하자면 일종의 사진기사라고 볼 수 있을 것 같구요. 사진기사라고 하지만 스토리가 부족한 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인터넷으로 ‘강택진 아이스크림’이라는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았습니다. 구글링을 통해 두 개의 기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https://www.yj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8470

https://www.yjinews.com/news/curationView.html?idxno=71968

▶ 두 개의 기사는 모두 경상북도 영주의 지역 언론에서 작성한 글입니다. 글에 따르면 강택진씨의 사연은 이미 2달 전 동아일보 지면에 소개되었다고 했습니다. 찾아보니 실제로 1923년 4월 26일자 동아일보 5면에는 강택진씨 부부의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지주들의 독한 손에서 죽어오던 조선의 소작인들도 근년에 이르러는 최후의 피와 힘을 다하여 각자의 권리를 세우며 로동이 보수를 완전히 얻기 위하여 완악한 지주들에게 반항하며 따라서 지주들도 시세를 깨닫고 양심에 찔리어 소작인들의 요구를 다소간 들어주는 모양이나 아직 시원한 것이 하나도 없음으로 소작인 운동은 점점 맹렬하여 가는 터인데 수월 전 경상북도 지방에서는 아직까지 꿈 가운데 있는 지주들에게 정문일침되는 사실이 있었다. 경상북도 영주군 풍기면 금계동에서 삼십여년 동안 지주의 호사로운 살림을 하던 강택진씨는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산 전부(토지 19000평)을 소작인 조합에 내어주는 동시에 ‘소작인에게 고함’이라는 글을 지어 그곳 소작회에 보내고 알몸으로 나선 일이다. .......강씨는 여러 해 동안 만주 상해 등지에서 돌아다녔으며 강씨의 맏아들은 고향에 있는 자기 형에게 부탁하여 보통학교에 다니며 지금은 자기 아내와 둘째아들(7세) 등 세 식구가 살아가는 터인데 방금 벌이 할 방법을 구하는 중이라 하며 강씨의 금년 나이는 32이라 한다.


▶경상북도 영주의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가 만주 상해를 돌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을 꾸고 귀국한 강택진 선생은 자신의 땅을 소작인들에게 넘겨주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영주 지역신문의 기사는 강택진 선생을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니면 1925년 향년 35세의 나이로 순국해서 일까요? 그에 대한 기록은 현재 인터넷에서 많이 검색되지 않습니다.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두 장의 사진만이 이후에도 강택진 선생의 생애를 증명하는 증거로 인용되고 있었습니다. 멜빵 바지와 콧수염, 이색적인 아이스크림 박스에 눈이 끌려 들여다 본 사진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네요. 강택진 선생의 사진에서 여러분은 어떤 게 보이시나요? 댓글에서 여러분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변영욱기자 cut@donga.com

Copyright © 동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