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유지 위한 푸틴의 ‘공포정치’ 더욱 가속화될 듯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 집착할 가능성 커
(시사저널=채인택 전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끝이 안 보이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러시아 용병조직 바그너그룹의 반란이 그것이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자신의 심복이던 바그너그룹의 수장 예브게니 프리고진을 어떻게 처리할까. 과연 이번 충격으로 그는 정치적 리더십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BBC·가디언·뉴욕타임스 등을 종합하면 6월23~25일에 걸친 바그너그룹의 무장반란은 일단 봉합됐지만, 푸틴은 2000년 대통령이 된 이래 최대의 정치적 시련에 직면하고 있다.
푸틴의 '24년 고인물 권력'에 균열을 만든 이번 무장반란은 '외부의 적'인 미국 등 서방도, 지금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도, 러시아 야당도 아닌 '이너서클' 인물이 주도했다는 점에서 그 충격은 더욱 클 것이다. 푸틴은 내년 5월 대선을 앞두고 있다.
"배신" "반역" 강조해 내부 문제 인정한 푸틴
무장반란을 일으킨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의 창설자이자 지휘관이다. 지난해 2월24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이래 부족한 병력을 교도소 죄수 등을 대상으로 모집한 용병으로 보충해 왔으니 푸틴에겐 기특한 인물이다. 푸틴과 같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으로 오랫동안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권력 내부 인사다.
그런 프리고진은 최근 들어 충분한 실탄을 공급하지 않는다며 러시아 국방부를 비난하면서 공식 지휘부인 세르게이 쇼이구 국방부 장관, 발레리 게라시모프 총참모장 등과 대립해 왔다. 중요한 것은 프리고진이 러시아군 공식 지휘부를 향해 강한 독설을 하는 동안 푸틴은 별다른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급기야 프리고진은 6월23일 "러시아 국방부가 우리 바그너그룹을 공격했다"며 휘하 병력을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빼내 러시아 본토로 이동시키고 총구를 거꾸로 돌렸다. 러시아 당국은 프리고진의 반역 혐의를 조사한다고 밝혔지만 뒷북에 지나지 않았다.
프리고진은 바그너그룹이 6월24일 러시아 남부에 있는 인구 113만의 대도시인 로스토프나도누를 점령하고 러시아군을 이루는 8개 군관구의 하나인 남부군관구의 사령부를 비롯한 군 기지 상당수를 점령했다고 밝혔다. 이어 M4 고속도로를 따라 수도 모스크바에서 200㎞ 떨어진 지점까지 병력을 이동시켰다. M4는 러시아 남부 크라스노다르에서 군사도시 로스토프나도누와 보로네슈를 거쳐 수도 모스크바로 연결되는 1517km의 고속도로다. 프리고진은 쇼이구 등 러시아 국방부 핵심의 교체를 요구했다. 이는 외부 세력이 러시아 정부의 근간을 뒤흔드는 것으로, 푸틴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았다.
프리고진이 대도시 로스토프나도누를 점령하고 병력을 M4 고속도로를 타고 북상시켜 보로네슈를 지나고 모스크바 남쪽 200km까지 접근하자 푸틴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 나섰다. 푸틴은 6월24일 연설에서 바그너그룹의 행동을 '무장반란' '반역'으로 정의하고 "가혹한 대응"을 경고했다. 이 연설에서 푸틴은 '배신'이란 말을 세 차례, '반역'을 두 차례, 그리고 '대동란(大動亂)'을 한 차례 언급했다. 2만5000명 정도의 바그너그룹은 고속도로를 거침없이 달렸고, 헬기 3대와 수송기 1대 등을 격추했다. 반면 러시아군은 바그너그룹의 테크니컬(화물칸에 기관포를 장착한 소형 트럭) 2대와 기갑차량 1대, 트럭 2대 등만 무력화했을 뿐이다.
눈에 띄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의 군사력을 책임지는 쇼이구와 게라시모프가 미디어에 나타나지 않고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들이 무장반란 사태에 대응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거나, 국방 등 핵심 사안에선 푸틴의 입만 바라볼 정도로 정권 구조와 시스템이 경직됐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결국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의 6월25일 중재로 프리고진은 회군하고 벨라루스로 망명을 떠나는 대신 러시아는 그를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 용병들이 3km 이상의 긴 대형을 유지하며 모스크바로 고속 진군한 '무장반란'치고는 싱거운 결과였다.
눈여겨볼 점은 전선을 무단 이탈한 바그너그룹이 점령한 로스토프나도누에선 시민들이 '무장반란군'에 환호를 보냈다는 사실이다. 루카셴코의 중재를 받아들인 프리고진이 도시를 떠나는 자리에도 시민들이 몰려와 그와 셀카를 찍었다. 푸틴도 누리지 못한 대중적 인기다. 전직 바그너그룹 지휘관인 마라트 기비둘린은 CNN에 "러시아 국민은 프리고진을 전쟁 영웅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거친 욕을 내뱉으며 실탄을 요구하는 동영상은 2000년 이후 애국주의 교육을 받고 그런 분위기의 사회에서 살아온 러시아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의미다. 푸틴이 새로운 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지금까지 푸틴은 이권 분배나 상호 충성 경쟁 유발 등의 방식으로 자신의 이너서클만 효과적으로 관리하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대중의 정서와 반응도 염두에 둘 수밖에 없게 됐다.
'21세기 차르' , 합법적으로 철권통치 휘둘러
푸틴은 대통령에 처음 오른 2000년 이후 러시아 정치에서 '대체 불가의 지도자'로 군림해 왔다. 현재 그와 대적할 만한 인물은 야당에선 물론이고 정권 내부에서도 찾을 수 없다. 러시아는 현재 6년 임기의 대통령을 국민이 직선으로 선출하는 제도를 운영한다. 하지만 푸틴은 모든 대통령선거에서 대승을 거둬왔으며, 평상시에도 높은 인기를 누려왔다.
1999년 총리에, 그해 12월31일 전임 보리스 옐친의 사임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에, 2000년 5월 대통령에 각각 취임한 푸틴은 지금까지 높은 지지를 받아왔다. 대통령이 된 이래 '푸틴이 아니면 러시아를 통치할 사람이 없다'는 소리를 들으며 최고 89%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특히 러시아 민족주의나 '강한 러시아' 정책을 앞세울 때 지지율이 유난히 높았다. 2014년 5월 크림반도를 합병하고 러시아 민족주의를 자극할 당시 지지율은 85.9%로 치솟았다. 같은 해 9월 미국과 유럽의 경제제재가 시작되자 87%로 더욱 올라갔다. 그 후 2015년 6월 역대 최고인 89%까지 치솟았다.
연금 개혁을 시도했던 2018년과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 처했던 2021년 역대 최하로 떨어졌을 때의 지지율도 59%였다. 과거 소련과 러시아 정치인들은 항상 '국가적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로 국민에게 위기감을 조장하고, '서구 세력이 러시아를 포위하고 해치려 한다'며 전통적인 배타주의와 대외 공포심을 활용해 왔다. 여기에 강대국에 대한 향수와 러시아 민족주의가 결합해 대외적으로 공격적인 경우 지도자에 대한 지지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왔다. 이번 무장반란 사태로 푸틴이 오히려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욱 집착할 가능성이 큰 이유다.
아울러 소련이 무너진 직후 들어선 보리스 옐친 대통령 시절의 경제적·정치적 혼란과 자존심 손상도 푸틴에 대한 반사적인 지지를 부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푸틴이 1999년 옐친 치하에서 총리를 맡았을 당시 지지율이 불과 31%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금 서구의 경제제재 등에도 러시아 국민의 일상생활은 옐친 정부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윤택하다. 옐친 당시에는 매일 아침 우유와 달걀, 베이컨을 식탁에 올리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현재는 식료품을 비롯한 생필품이 슈퍼마켓에 쌓여 있다. 이와 함께 푸틴에 대적할 만한 정치적인 맞수나 강력한 야당이 없다는 점도 높은 지지율을 만드는 데 한몫했다. 선거 때면 행정 조직의 적극적인 독려도 푸틴이 높은 득표율로 당선하는 데 일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푸틴은 러시아 대통령으로서 국정 전반에 걸쳐 강력하고 포괄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다. 물론 러시아는 형식적으로 내정은 총리가 맡고 대통령은 군 지휘권, 계엄령·비상사태 발령권, 국민투표 실시권, 총리 및 내각 요직의 지명과 임면권, 두마(하원) 해산권, 의회에서 가결한 법률 거부권과 대통령 명령 발령권 등 굵직한 권한을 가지는 이원집정제 국가지만, 대통령은 실질적으로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두른다. 현재 러시아 총리를 관료 출신으로 연방 국세청장을 지낸 미하일 미슈스틴이 맡고 있다는 사실은 대통령과 총리의 권력 관계를 잘 보여준다. 푸틴이 합법적으로 철권통치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푸틴이 '21세기 차르(제정 러시아의 황제)'로 불리는 것은 그의 정적이나 적, 또는 비판자를 허용하지 않는 집요한 성격과 함께 헌법상 권한과 행사하는 권력이 실제로 차르 못지않기 때문이다. 이를 바탕으로 푸틴은 자신에게 도전하려는 세력을 가차 없이 누를 수 있는 힘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무장반란 사태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푸틴의 무기가 될 것이다.
정적 암살과 의문사, 숙청 다시 재연될 수도
러시아에선 푸틴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2000년 이래 암살이 사실상 일상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거물급도 예외가 아니다. 주지사와 제1부총리를 지낸 거물급 반푸틴 정치인 보리스 넴초프는 2015년 2월 모스크바 중심지인 크렘린궁 근처에서 저녁 시간에 총격을 받고 숨졌다. 넴초프는 우크라이나 돈바스 전쟁 개입에 반대해 푸틴의 눈 밖에 났다. 2020년 8월엔 야권 정치인인 알렉세이 나발니가 홍차를 마신 후 독극물 중독으로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다 독일 베를린의 샤리테 병원으로 후송돼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나발니는 소련·러시아의 비밀공작기관이 개발한 노비촉에 중독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귀국한 후 체포돼 지금까지 수감돼 있다.
과거 소련 비밀공작기관에선 암살을 '능동적 시책'이라는 뜻의 '악티브니 메로프리야차'로 불렀다. 수법도 노비촉이나 방사성물질을 이용한 독살과 총격, 창문으로 던지기, 자살 위장 등으로 다양하다. 암살 공작은 러시아에선 물론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도 이뤄진다. 암살 대상도 기업인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미국 USA투데이는 '러시아에선 이미 2014년부터 2017년 사이 크렘린과 가까운 러시아 비즈니스맨과 올리가르히 38명이 의문스럽거나 수상한 상황에서 숨졌다'고 보도했다. 지난해에도 크렘린과 관련 있는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 분야의 주요 인물 최소 24명이 연쇄 의문사했다. 미국 시사지 '애틀랜틱'은 지난해 12월 이를 '러시아 급사 신드롬'이라고 불렀다.
우크라이나 침공 등 푸틴의 결정에 부정적인 의견을 입 밖으로 내는 사람이 주 대상으로 보인다. 지금껏 푸틴에게 대들었던 사람들은 조용히 사라져왔다. 프리고진의 바그너 무장반란이라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한 푸틴이 비판자의 입을 막기 위해 또 어떤 능동적 시책에 나설지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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