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주인을 먹으려 든 개와 자격 없는 주인의 싸움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 2023. 7. 1. 10:03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프리고진 vs 푸틴, 깡패영화 방불하는 그들의 사정

프리고진은 푸틴의 개였다. 유기견을 주워다 사냥개로 키웠다. 앉으라면 앉고 물라면 무는 충성심과 용맹함, 자신과 같은 상트 페테르부르크 출신이라는 점을 눈여겨봤을 것이다. 자신의 어두운 기질과 통하는 음험함을 감지했을 수도 있다.

어둠의 사냥개 프리고진은 어둠의 존재로 남아있어야 했다. 푸틴의 권력 운용은 여러 마리의 개를 두고 서로 견제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푸틴만 그러는 게 아니라 이는 독재자들의 교과서에 가깝다. 확실한 2인자가 등장해 자신의 권력이 그에게 새면 안 되기 때문이다.

프리고진은 푸틴이 집안에 들이거나 행사에 선보이는 개가 아니었다. 담장 밖에 풀어놓고 은밀하고 거친 사냥에 쓰는 도구였다. 대신 사냥감을 좀 뜯어먹어도 묵인해 주는, 그런 대상이었다.


그런데 이 개가 달라졌다. 음지에서 나와 집안의 개들을 물어뜯고, 주인을 향해 짖고, 주인까지 잡아먹으려 든 것이다.

강형욱 훈련사의 방송을 꾸준히 보는 사람은 알겠지만, 흉폭해질 수 있는 대형견을 여러 마리 키우는 견주는 개들 간의 서열을 정리해 주고 싸움이 붙으면 떼어놓고, 반항하는 개를 제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사고가 난다. 주인이 개에게 물릴 수도 있다.

이번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일은 정치학적 고담준론으로 해설할 수도 있지만, 깡패들의 세계를 다룬 영화나 「동물의 왕국」처럼 보는 게 더 어울릴 수도 있다.

프리고진은 이번 반란에 이르기까지, 푸틴을 직접 비난하는 것만큼은 삼갔다. 푸틴을 비난하는 듯한 말을 해 놓고도 푸틴의 또 다른 개, 쇼이구 국방장관을 욕한 거라고 둘러댔고, 심지어 이번에 모스크바로 부대를 진격시키면서도 자기는 쇼이구를 치려 한 거지 푸틴의 권좌를 노린 건 아니라고 했다.


푸틴을 몰아내고 자기가 대통령 하려고 한 게 아니라는 말은 진심으로 보인다. 프리고진이 동원할 수 있는 무력은 그 정도가 못 되었고, 정치적 그릇도 그 정도는 아니었다. 쇼이구 국방장관 등 푸틴 주변의 권력엘리트들과 싸워서 자기 밥그릇을 지키려는 게 모스크바 진격의 주목적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리고진의 반란은, 단지 밥 주는 주인의 손을 문 정도가 아니라 주인을 잡아먹으려 했던 것으로 해석되는 정치적 파장을 낳았다. 프리고진은 푸틴 통치의 근본적 약점을 드러냈고, 푸틴의 권력을 받치는 기둥에 깊은 균열을 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푸틴이 주장해 온 정당성을 부정했고, 앞으로의 전쟁 수행에 큰 장애를 초래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실패는 푸틴 권력의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

푸틴은 프리고진과 내통한 자들을 색출하고 바그너그룹의 돈줄을 죄는 등 상황 정리에 나섰다. 도로의 포트홀을 땜질하는 것과 비슷하다. 땜질을 끝내면 당장은 괜찮아 보이겠지만, 땅속 흙이 대규모로 쓸려나간 터라 언제 거대한 싱크홀이 입을 벌릴지 모른다. 이제 푸틴은 자신의 크렘린이 권력의 싱크홀 속으로 무너져 내릴까 봐 밤잠을 설치게 될 것이다.

포트홀(위)과 거대 싱크홀(아래)

한때의 충견, 존재 자체로 푸틴에 위협이 되다

「피에 젖은 땅: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의 유럽」을 쓴 미국의 역사가 티모시 스나이더는 프리고진이 푸틴에 대해 존재론적 위협을 제기한다고 갈파했다. 프리고진은 푸틴이 하는 일을 그대로 하며, 푸틴의 자산을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한 지렛대로 갖다 썼다는 것이다.


스나이더는 자신의 블로그 겸 뉴스레터에서 이 점을 설명했는데, 매우 인상적인 통찰을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푸틴의 러시아 국가와 프리고진의 바그너 그룹은 광물 채굴로 유지되는 체제이며, 대규모의 PR조직과 군사조직의 뒷받침으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같은 속성을 지닌다.

푸틴의 체제, 특히 그의 권력 엘리트들이 포진한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는 시베리아 등 변방의 천연가스와 석유를 식민지 수탈하듯 채굴함으로써 유지된다. 그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러시아인들이 지배층에게 불만을 표출하지 않도록, 푸틴은 크림반도, 시리아, 아프리카 등에서 전쟁을 끊임없이 만들어 사람들의 눈과 귀를 외부의 적에게 돌린다.

그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 게 프리고진의 바그너 그룹이다. 그런데, 바흐무트 공방전을 거치면서 문제가 생겼다. 바흐무트는 푸틴이 올 들어 유일하게 거둔 전과나 마찬가지다. 그걸 프리고진이 날름 자신의 성과로 가로챘다. 스나이더는 이렇게 썼다.

이달 초, 바흐무트에서 철수하겠다고 국방부를 위협하는 프리고진 / 출처 : 영상 캡처


"바흐무트 전투는 끔찍하게 비용이 많이 들면서도 전략적으로는 의미 없는 일이었지만, 러시아가 2023년에 거둔 유일한 전과였으므로 푸틴의 미디어에 의해 일종의 스탈린그라드 또는 베를린으로 포장되어야 했다. (2차 대전 당시 소련군이 독일군을 상대로 영웅적인 승리를 기록한 곳들) 그런데 프리고진이 이걸 가져갔다. 그는 (바흐무트에서 우크라이나 군을 이겼다는) 거짓된 영광을 자기 앞으로 돌려놓았다. 심지어 바그너 그룹 부대를 우크라이나에서 철수하면서 말이다."

스나이더의 총평은 이렇다.

"프리고진의 바그너 그룹은 푸틴의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 일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전쟁에 관한 푸틴의 거짓말을 폭로하다


프리고진의 거친 입은 푸틴이 공들여 만든 (그러나 거짓인) 우크라이나 침공 정당성 주장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푸틴은 나치 잔당에게 장악된 우크라이나가 나토(NATO)와 함께 러시아를 위협하므로 '특별군사작전'을 벌여 평정하는 거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프리고진은 반란 직전 텔레그램 영상 메시지에서, 우크라이나에선 아무 일도 없었고 나토의 위협 운운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정권이 돈바스와 크림(크름) 반도에 대규모 공격을 하려 했다는 건 거짓말이며, 무리하게 일으킨 전쟁에서 러시아군이 승승장구하기는커녕 곳곳에서 패퇴하고 있다고 진실을 공개했다.

프리고진이 그 영상에서 '푸틴은 거짓말쟁이'라고 말한 건 아니다. 그는 쇼이구 국방장관이 스스로를 돋보이게 하려고 거짓 명분을 만들어 푸틴을 속인 결과 이 엉터리 전쟁이 나게 된 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문제는, 프리고진의 의도가 뭐였든 간에 프리고진 입에서 나온 말의 표현과 내용이 푸틴의 전쟁 서사를 정면으로 부정했다는 점이다.

프리고진은 또한 정치적으로 매우 민감한 발언을 일삼아 푸틴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배부른 엘리트의 자식들이 호화생활을 소셜미디어에 자랑할 때 가난한 집 자식들은 산산조각 난 시신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네놈들이 고급가구로 치장된 사무실에서 살이 찌는 동안 전장에 나온 청년들은 총알이 없어서 죽어나간다 등등의 발언들을 계속 쏟아냈다. 푸틴의 국정홍보기구들은 러시아군이 이기고 있다고 선전했지만, 프리고진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병사들의 참혹한 시신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이런 발언들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푸틴에게 위험했다. 푸틴은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 등 부유한 대도시들의 백인 러시아인들은 가급적 놔두고 변방과 소수민족 거주지역 청년들을 주로 징집했다.

프리고진은 극심한 여론통제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진실'을 러시아 국민에게 전해주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인기가 점점 높아져갔다. 정치적 야심이 있나 싶을 정도로 발언은 더 과감해졌다. 나중엔 푸틴을 조롱하는 것으로 해석되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영화 「달콤한 인생」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프리고진은 푸틴에게 모욕감을 줬다. 모스크바 진격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도, 푸틴은 프리고진 제거에 나섰을 것이다.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우크라이나 전쟁이 잘 풀렸다면 푸틴과 프리고진의 사이는 먹이 주는 주인과 음지의 사냥개로 잘 유지됐을지 모른다. 초기 침공에 투입된 러시아 정규군이 우크라이나를 재빠르게 제압하고 젤렌스키 정권을 무너뜨렸다면 프리고진의 바그너 부대는 우크라이나에 대규모로 투입되지 않았을 것이고, 투입됐더라도 제한적이고 비공식적인 역할에 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러시아 정규군의 초기 무능으로 전력 손실이 심해지자, 푸틴은 실전경험이 많고 사기가 높은 바그너 그룹 부대들을 정규군처럼 투입해야 하는 상황으로 몰렸다. 실제로 그들은 바흐무트 일대 공방전에서 실력을 발휘했고, 우크라이나 군에 상당한 손실을 입히며 바흐무트를 일시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그 사이에 러시아 정규군은 추가징병한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궤멸적 타격을 입은 부대들을 재편했다. 부대 간 협동전술 운용도 개선했다. 하지만 태생적으로 무뢰배인 바그너 그룹 부대들은 이런 틀에 들어오지 않았고 통제를 따르기는커녕 걸핏하면 정규군과 충돌했다. 이런 군사적 이유까지 겹쳐, 푸틴은 바그너 그룹을 국방부 통제 하에 두기로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게 올해 초부터 벌어진 상황이다. 프리고진이 부쩍 과격한 발언과 미디어 노출을 늘린 것도 이때쯤부터다. 프리고진은 지난 2월경 푸틴을 면담해 쇼이구 국방장관 쪽으로 기운 그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으나 설득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프리고진이 떠난 뒤 크렘린 궁의 고위급회의에 참석해 건재를 확인한 쇼이구 국방장관, 지난 26일 크렘린 / 출처 : AP


그냥 앉아서 바그너 그룹을 뺏길 것인가, 아니면 싸워서 밥그릇을 지킬 것인가. 프리고진은 힘으로 쇼이구 국방장관을 누르면 푸틴도 어쩔 수 없이 자기 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한 것 같다. 푸틴은 여전히 프리고진을 자신의 사냥개 중 한 마리라고 생각했겠지만 프리고진은 이미 각성한 프랑켄슈타인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군부 인사가 아닌 프리고진이 군부를 향해 짖는 게 어느 정도까지는 군을 긴장시키고 질책하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프리고진은 점점 통제불가능한 존재가 되어갔다.

월스트리트저널 등의 보도에 따르면, 프리고진은 당초 우크라이나 국경 근처에서 러시아 군부 고위관계자들을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연방보안국에 정보가 새고 말았다.

프리고진은 반란 준비가 충분치 않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렸다. 그래서 자신은 남부 거점에 남은 채 선봉대만 모스크바행 고속도로로 올려 보냈다가 타협안이 나오자 그마저도 되돌린 것으로 보인다. 복잡한 속사정을 모르는 일부 부대원들이 '왜 이대로 물러나느냐'고 반발했다는 뉴스가 나왔지만, 프리고진 입장에선 무모한 전투를 벌여 자멸을 재촉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미 해군 전쟁대학교의 나우니할 싱(Naunihal Singh) 교수는 1950년부터 2000년까지 세계 각지에서 벌어진 군사쿠데타를 연구했다. 그에 따르면, 독재정권은 쿠데타 발생 가능성에 대비해 정보수집과 통제를 철저히 하게 마련이므로, 쿠데타 세력은 미리 완벽한 준비를 할 수가 없다. 정보가 새어나가기 때문이다. 쿠데타는 소수 선도집단의 과감한 선제행동으로 시작되지만, 그 선도집단은 면밀한 계획을 갖추지 못한 채 동조하는 세력이 많을 거라는 '믿음'으로 돌격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그너 그룹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모스크바로 진격을 시작했을 때, 바그너 그룹에 동조하고 행동을 같이 한 정규군 부대는 없었다. 싱 교수의 연구결과를 소개한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본 드렐(David Von Drehle)은 '자신의 기치에 호응하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현실에, 고속도로를 달리는 프리고진의 마음은 무겁게 가라앉았을 것'이라고 썼다.

타협안을 받아들이고 로스토프를 떠나는 프리고진. 시민의 셀카 요청에 응하고 있지만 표정이 침통하다. 24일 / 출처 : AP

시진핑·김정은이어도 이렇게 진압했을까?

그렇다면 푸틴은 반란 사태를 잘 해결한 것일까?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대규모 유혈사태는 없이 반란군을 쫓아 보냈으니까. 하지만....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 아래 주소로 접속하시면 음성으로 기사를 들을 수 있습니다.
[ https://news.sbs.co.kr/d/?id=N1007250162 ]


이현식 D콘텐츠 제작위원 hyunsik@sbs.co.kr

Copyright ©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