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한 상상, 일상적 현실… 회화의 언어로 풀어내다 [박미란의 속닥이는 그림들]

2023. 7. 1.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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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정, 신비롭게 울부짖는 회화의 물성
삶서 마주하는 이미지·이야기·단어서 영감
말이나 글로써 온전히 전할 수 없는
감정의 색채·상상된 촉감, 시각이미지로 전달
화면 가득 채도 높은 보색의 강렬한 대비
세찬 듯 섬세한 붓의 묘사 … 미묘한 감정 호소

#신화적 세계를 유영하는 아이처럼

우리는 마음속에 어릴 적 생각들을 감추고 산다. 너무나 꾸밈없이 순수하여 때로 짓궂은 충동과 욕망으로 가득한 그런 아이의 얼굴을. 님프의 형상을 차용한 인물들이 정수정(32)의 화면 위를 떠다닌다. 알 수 없는 표정과 몸짓들 주위로 신비로운 풀숲이 우거진다. 알몸으로 자유로이 뛰놀던 자연의 정령들은 종종 그 초목에 기대어 쉰다.
극락조 (2023)
신화적 화면을 장악한 요정들은 우리 내면에 사는 아이의 분방한 호기심을 닮았다. 정수정은 삶 속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이미지와 이야기, 단어들을 재료 삼아 상상했던 풍경을 펼쳐 낸다. 수집된 소재들은 그림 안에 자리 잡는 방식에 따라 서로 새롭게 관계 맺는다. “여자의 뒷모습이 담긴 사진을 보았을 때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 또한 보고 있지 못하는 것은 어떤 것일지” 상상하며, 작가는 주관적 언어로서 세상을 이해하고 공감한다. 그러한 앎이 오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아이는 개의치 않는다.
오아시스 (2019)

#물감에 실린 감정들, 처절하게 아름답도록
정수정은 “갑작스러운 고래의 떼죽음, 이유 없이 불타오른 신체, 빅풋의 발자국 등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로부터 작업의 소재를 발견한다. 신비한 상상과 일상적 현실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상반된 동시에 끈끈히 연결된 불가분의 관계를 띤다. 그가 그리는 환상적 장면들은 날마다 겪어 내는 풍경의 단편들을 재구성하고 재배치한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처럼 “일상에 기반한 상상”들을 회화의 언어로 풀어내는 행위는 타인과의 정서적 교감을 위한 노력이다. 말이나 글로써 온전히 전할 수 없는 감정의 색채, 상상된 촉감을 시각 이미지로서 전달하는 것이다. 사각형의 화면 위에 놓인 이미지가 보는 이에게 전달하는 직관적 인상에 관한 고민이 거듭된다.
이빨이 있는 정물화 (2023)
자신의 작업이 “결국 회화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시간의 결과물”이라는 그는 회화라는 매체가 지닌 표현의 가능성에 유난한 관심을 기울인다. ‘이빨이 있는 정물화’(2023)는 고전 미술 속 정물화의 양식을 의식하며 그린 그림이다. 입속 내밀한 어둠에 거주하는 이빨들이 과일의 속내를 가득 메운다. 가장 단단하면서도 무엇보다 예민한 몸의 일부를 꺼내어 보이는 일의 두려움과 생경함을 연상하며 만든 도상이다. 전형적인 정물화에서 과일과 같은 대상의 묘사는 얼마간 관습적인 방식으로서 목격된다. 정수정은 익숙한 그리기에서 벗어나 그리는 대상과 도구의 관계를 재고한다. 유화 붓의 모(毛)가 지닌 성질에 따라 달라지는 붓질의 양태를 실험함으로써다. 물성을 실어 나르는 붓의 실낱들을 감각하면서, 도구의 무게와 재료의 점성을 존중하면서.

화면은 유채의 차지고 습윤한 질감을 탁월하게 드러낸다. 채도 높은 보색의 강한 대비와 세찬 듯 섬세한 붓의 묘사가 두드러진다. 색채의 사용과 물감의 점도, 붓질의 속도에 따라 회화가 매개하는 정서의 질감이 달라진다. 당혹스럽도록 소란하며 애틋하리만치 성실한 장면들. 화면은 세상을 향하여 미묘한 감정을 호소한다. 여린 마음결로 울부짖듯이, 처절하게 아름다운 목소리처럼. 누군들 그 비명을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폭포가 냇물과 맞닿는 순간…

현재의 중력과 관계 맺는 회화

‘교미’(2021)는 프레임에 결합하지 않은 대형 캔버스 위에 그린 회화다. 2021년 SeMA 창고에서 연 개인전 ‘매사냥’에서 처음 선보였고, 최근 일민미술관에서 진행된 단체전 ‘히스테리아: 동시대 리얼리즘 회화’(2023)에 재차 출품했다. 작가가 충무로 소재의 작업실을 오가며 목격한 인공 시냇물의 풍경으로부터 영감을 얻어 제작한 작품이다. 거세게 쏟아지는 폭포가 이내 잔잔한 냇물이 되어 흐르는 서사적 광경을 하나의 화면 안에 담아 보고자 했다.
교미(2021) 일민미술관 전시 전경
해당 작품은 전시 장소의 천장 또는 난간에 상단부를 고정하여 걸개그림처럼 늘어뜨리는 형태로 설치된다. 그림의 지지체인 천의 무게를 가시적으로 드러내기 위하여 선택한 방식이다. 폭포의 형상을 배경 삼아 습기 어린 물감 줄기가 빗물처럼 화면을 타고 내린다. 회화의 허리춤에 검은 새들이 날아들고, 그 한편에 고양이 한 마리가 숨어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외친다. 화면 곳곳에 이름 모를 버섯과 풀 포기들이 자라난다. 폭포는 하류에 이르자 전시 공간의 바닥 수평면을 따라서 고이듯 천천히 흘러간다.

정수정은 “물리적으로 큰 화면을 마주했을 때 역동적인 힘을 스스로 제한하지 않아도 되는 용기”가 생긴다고 고백한다. 신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화면과 상호 작용하는 순간에 관심을 가지는 태도다. “오른팔과 몸의 힘을 화면에 그대로 흡수시키는 듯한 느낌이라서” 화면 안에 꿈틀하며 부유하는 미지의 가능성들을 “스스로 낳아 함께 뒹굴며 격한 소통을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다.

‘교미’라는 작품명은 상상의 여지를 다각도로 제공한다. 붓은 제 끝자락에 물감을 머금고 수분(受粉)하듯 화면 위에 뱉어 낸다. 붓과 캔버스의 뒤엉킴은 보이지 않는 상상을 잉태하여 고유한 시각적 환영으로서 낳아 낸다. 거대한 화면을 크게 가로지르는 작가의 팔이 그 환영과 짝을 짓는다. 그림과 공간은 하나의 몸이 되고, 그리는 이와 보는 이의 시선이 교류한다. 폭포가 냇물과 맞닿는 순간, 회화의 시간과 현실의 장소는 무척 긴밀하게 관계 맺는다.

#불가능한 상상을 현존하는 물성으로…

회화의 힘

“저는 그림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회화의 힘을 믿고 있습니다. 역사가 오래된 미술관에 설치된 작가 미상의 고전 회화 및 온라인에서 이미지로 접할 수 있는 모든 회화가 가진 구상적 힘과 실험의 결과물을 분석해 보며, 제 생각을 담은 작업으로 바꾸어 보기도 하고 연구해 봅니다. 구상 회화를 통해 드라마틱한 형태와 색감, 장르적이며 연극적인 희곡의 한 장면을 지속해서 시도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정수정의 연극 무대에 초청받은 배우들은 어떠한 서사의 전달이나 논리적 설득을 목표하지 않는다. 화면과 화면, 전시와 전시를 넘나드는 모호한 이야기는 이어질 듯 끊어지고, 연결될 듯 부서진다. 마치 꿈처럼, 한 장 쓰다 만 희곡처럼. 회화의 물성을 빌려 기록된 장면들은 무형의 상상을 손에 잡히는 부피로서, 무게를 지닌 실체로서 변환해 낸다. 회화의 힘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도저히 불가능한 공상으로 하여금 실재하는 현실의 몸을 갖도록 하는 일.

회화를 마주하는 순간 낯설거나 익숙한 색채의 배열로부터 마음의 율동을 감각하면 충분하다. 수많은 형상 위에 나의 내밀한 기억을 투영해 보는 일. 그러다 때로 마음속에 잠든 아이를 깨워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아이는 어른이 된다. 불온한 장난기를 마음 깊이 묻어둔 채 조금 더 사회적인 성인으로서 거듭난다. 그러나 이따금 꿈속에서 고개를 드는 앳된 소망들, 통제할 수 없는 감정들, 꼬리 물고 이어지는 불가능한 상상들, 비밀스러운 바람들…. 정수정의 회화가 누구의 마음을 두드리는 데 성공했다면 그래서일 것이다. 유년의 신화적 세계를 외쳐 부르는 익숙한 아이의 목소리 때문에.
소년 (2021), 정수정 작가. 에이라운지 갤러리 제공, ⓒ류동현
#‘영 크리에이티브스’ 정수정

정수정은 가천대학교 회화과 학부 및 영국 글래스고 예술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8년 레인보우큐브에서 첫 개인전 ‘스윗 사이렌’을 열었고 2020년 ‘OCI 영 크리에이티브스’에 선정되어 주목받았다. 갤러리밈(2019), OCI미술관(2020), SeMA 창고(2021), 에이라운지 갤러리(2021)에서 개인전을 선보인 한편 서울시립북서울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하이트컬렉션 등 주요 기관 단체전에 참여하면서 어느덧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는 회화 작가 중 하나로서 자리매김했다. 7월23일까지 인사동 소재 갤러리밈에서 정수정과 이재석의 2인전 ‘비막’을 관람할 수 있다. 연말인 12월15일에는 서울 부암동의 에이라운지 갤러리가 정수정의 여섯 번째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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