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 중국 싫어하는 이유, ‘민주당만 빼고’ 다 안다 [+영상]
● 文이 추천한 ‘짱깨주의의 탄생’
● 냉전기 소련이 美에 맞선 동력
● 공산주의 지탱한 ‘소프트 파워’
● 인텔리를 설레게 한 이데올로기
● 보편적 이념 없는 ‘부유한 제국’
● 모든 반중감정이 ‘혐중’은 아냐
지난해 6월 9일 문재인 전 대통령이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쓴 서평의 한 문장이다. "책 추천이 내용에 대한 동의나 지지가 아닙니다"라고 전제를 단 그는, 이 책을 통해 "중국을 어떻게 볼 것이며 우리 외교가 가야할 방향이 무엇인지, 다양한 관점을 볼 수 있다"고 했다. 익숙한 관점을 다시 돌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언론이 전하는 것이 언제나 진실은 아닙니다."
문재인이 도전하고자 하는, 언론이 전하는 '통념'이 무엇인지는 도발적인 책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다. 한국인들은 중국에 대한 혐오감정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잘못됐다는 것이다. '짱깨주의의 탄생'에 대한 출판사 소개를 보면 그 점은 더욱 분명해진다. 출판사에 따르면 이 책은 "혐오로 확산된 중국 담론의 편견과 오해를 바로 잡고, 한국 사회에 비판적 중국 담론이 왜 필요한지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반중감정이 넘실거리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듯하다. 6월 26~27일 한국갤럽이 서울경제신문의 의뢰로 수행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정부가 '중국과 협력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응답한 의견은 5.1%에 불과했다.
친미반중 여론은 젊은 세대에서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한미동맹을 강화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20대와 30대는 각각 44.8%, 45.8%가 '그렇다'고 답했다. 반면 중국과 협력을 강화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각각 2.9%, 2.6%만이 긍정적인 답을 했다. 50대와 60대의 경우도 절대적인 수치만 보면 중국과의 협력 강화를 크게 바라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6.9%, 7.1%라는 긍정 답변은 20대, 30대의 두 배 이상이다.
대체 왜 한국인은 이렇게 중국을 싫어하게 된 것일까. 특히 청년층은 왜 이럴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론조사 자료를 분석해서 대답하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깊은' 대답을 얻기 위해 다른 방법을 택해보자.
필자는 1983년생이다. 이미 생일을 넘겼기에 만으로도 40세다. 그래도 아직 '젊은 필자' 소리를 듣고 있다. 진보 언론에 오래도록 글을 써왔기도 하다. 나의 또래와 마찬가지로 필자 역시 중국에 우호적이지 않다. 물론 청년들의 반중감정이 인종주의적, 혐오주의적 외양을 띠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그 점은 매우 우려스럽다.
청년들이 중국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를 더듬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오늘날 대한민국 국민들, 특히 청년들에게, 중국을 좋아할 이유는 없다. 반면 싫어할만한 이유는 많다. 따져보면 어렵지 않은 일이나, 야당 및 야권 지지 세력과 언론은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니콜라이와 레이몬드
크게 돌아가 보자. 냉전은 어떻게 지속될 수 있었을까. 객관적으로 볼 때 소련이 미국에 비해 열세가 아니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국은 태평양과 대서양 양쪽에서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국력의 기본인 생산력에서도 소련을 늘 앞섰다. 제2차 세계대전 초중반까지 미국이 지원해준 군사 물자가 없었다면 소련은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을 지경이었다. 미국의 과학과 기술은 소련에 뒤쳐진 적이 없었다. 소련보다 먼저 원자폭탄을 개발했다. 다만 최초의 인공위성 발사만은 소련에 밀렸는데, 그 후 미국은 온 국력을 쏟아 부어 달에 사람을 보내 깃발을 꽂고 말았다.그러므로 냉전이 미국의 승리로 끝났다는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정말 놀라운 건 소련이 그 오랜 기간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 원인을 규명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역사학의 한 분야를 차지하는 주제지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소련의 힘은 소련이 지닌 군사력이나 경제력 등 소위 '하드 파워'에서만 비롯하지 않았다. 소련이 지닌 '소프트 파워' 또한 중요했다.
21세기에 태어나고 자랐거나 20세기의 마지막 시대에 태어난 이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소련은 막강한 소프트 파워를 지닌 나라였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을 지탱하는 가장 크고 중요한 방파제였기 때문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자본주의 사회인 미국과 달리, 소련은 모든 노동자가 해방된 평등한 세상을 지향하는 일종의 이상 국가였고, 그 점이 많은 이를 설레게 했다. 자발적인 충성과 복종을 불러왔고 그것은 소련에 큰 힘이 됐다.
영화 '백야'를 떠올려 보자. 소련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세계적인 발레리노 니콜라이는 비행기 불시착으로 인해 다시 한 번 소련에 떨어지고 만다. 그런 그를 감시하고 회유하기 위해 붙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미국 출신 탭댄서인 레이몬드. 흑인인 레이몬드는 월남전에 참전했지만 여전한 흑인 차별에 절망해, 소련이 주장하는 평등한 해방 세상의 꿈을 믿고 자유진영에서 공산진영으로 넘어온 자발적 협력자였다.
이런 사례는 영화에만 있지 않다. 우리의 역사만 봐도 흔한 일이었다. 시인 김수영은 '허튼 소리'라는 시에서 이렇게 자조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는 / 제일이지만 / 이북에 가면야 / 꼬래비지요." 분단 이후 수많은 지식인, 예술가, 과학자, 문인들이 자발적으로 경계선을 넘어 북으로 향했던 현실의 반영이다.
그들의 월북, 혹은 소련행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라는 이념이 지닌 매력을 빼고는 설명되지 않는다. 이는 현실성과 무관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현실성이 없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일 수 있다. 모든 사람이 해방된 세상,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서로 평등한 나라, 땀 흘려 일하는 자들이 웃을 수 있는 그런 유토피아는, 지식인과 인텔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힘이다.
소련은 러시아를 중심으로 주변국들을 포섭하거나 강제로 정복해 만들어낸 체제다. 요컨대 소련 역시 제국이었다. 제국은 물리적인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지배에 적극 충성하거나, 적어도 납득할 수 있게 해줄만한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 제국의 중심에서 혜택을 보는 이들 뿐 아니라 변방에 있는 자들, 더 나아가 제국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도 보편적으로 호소력을 지닐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산주의가 소련 제국에 준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공산주의라는 이상은 자본주의의 현실 속에서 불만을 품은 이들 중 일부에게 거부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가왔다. 공산주의는 러시아가 아니라 독일 출신의 지식인 카를 마르크스가 당대 최고의 선진국이던 영국에서 확립한 19세기의 첨단 사상이었다. 자본가의 지배를 들어 엎기 위한 노동계급의 혁명을 이야기했지만, 동시에 모든 사람이 고통으로부터 해방된 아름다운 미래를 논하기도 했다. 그런 이념이 있었기에 소련이라는 제국은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에 맞서 40여 년이 넘는 시간을 버텨냈다.
‘돈으로 혼내주는' 습성
오늘날 우리는 미‧중 갈등이 수면 위로 드러난 시대에 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신냉전 시대'를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런 발언들이 때로는 성급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있다.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없거나 무시할만해서가 아니다. 소련과 달리 중국은 '제국'으로 성립할만한 중요한 요건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소련과 달리 보편적 설득력을 지니는 이데올로기가 없다.중화인민공화국, 중국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공산국가다. 하지만 중국을 원론적 의미의 공산국가라 생각할 사람은 지구상에 단 한 명도 없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의 이상 대신, 돈 놓고 돈 먹기로 점철된 자본주의 천국이 된지 오래다.
물론 중국은 개혁 개방 정책을 추진한 덕분에 오랜 가난에서 벗어났다. 수억 명의 인구가 절대 빈곤에서 벗어나 최소한 끼니 걱정은 하지 않게 됐고, 그보다 많은 수천만 명의 중산층이 탄생해 막강한 소비력을 과시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오늘은 공산주의의 이상과 거리가 멀다. 정 반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유진영에 속해 있던 대한민국이 걸었던 길, 개발독재를 통한 빈곤 탈출의 경로를 고스란히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
중국이 자본주의 제국 중 하나가 됐다는 것은 대외적 행태를 볼 때 더욱 분명해진다. 오늘날의 중국은 다른 나라의 환심을 돈으로 사는 나라다. 물론 상대적 빈국의 호감을 얻고자 할 때면 세상 모든 나라가 돈을 뿌린다. 하지만 중국의 그것은 미국이나 서유럽 국가들의 그것뿐 아니라 소련의 그것과도 사뭇 다르다. 중국은 돈으로 호감을 사려 할뿐 아니라, 자신들이 볼 때 만만하고 약한 나라가 말을 듣지 않으면 '돈으로 혼내주는' 습성을 보이고 있다.
혁명의 논리가 계급해방만 있는 건 아니다. 민족해방의 논리도 있다. 선진국이던 독일의 공산주의자들은 전 세계 노동계급이 단결해 단번에 혁명을 일으키고 세상을 뒤엎기를 원했다. 후진국이던 러시아의 혁명가 레닌은 일단 러시아에서 혁명을 하고 그것을 차차 주변에 전파해야 한다는 소위 '일국사회주의론'을 펼쳤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 노동계급이 아닌 농민을 중심으로 혁명을 해도 무방하다는 논리를 창안하기에 이르렀다. 일본이라는 외세와 맞서 싸우는데 공산주의의 교리와 공식이 대체 뭐가 그리 중요하냐는 것이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친숙한 좌파의 기본 사고방식이다. 계급해방 뿐 아니라 민족해방도, 아니 어쩌면 민족해방이 계급해방보다 우선 과제일 수 있다. 이런 논리를 연장해보면 일본의 노동계급과 연대 투쟁하는 것보다 중국 자본의 힘을 빌려 반일운동을 하는 게 더 '진보적'이며 '좌파'의 세계관에 부합하는 일이 된다. 공산주의 운동이 전파되는 과정에서 발생한 역사의 아이러니다.
문제는 민족해방의 논리를 전적으로 수용한다 해도 오늘날 중국의 행태를 납득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중국은 티베트와 신장위구르를 무력으로 점령하고 통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두 지역은 중국의 일부라 볼 수 없었다. 문화, 종교, 역사, 언어가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을 틈타 티베트와 신장위구르를 병합했다. 반대자들이 볼 때는 '민족말살정책'을 펴고 있다는 비판이 충분히 가능할 정도로 체계적으로 해당 지역을 '동화'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민족해방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해방을 통해 극복해야 하는 압제자에 더욱 가까운 나라가 돼 있는 것이다.
中 체제 지지할 이유 찾기 어려워
대체 중국의 이념은 무엇인가. 중국은 어떤 이데올로기를 근간으로 세계 제국이 돼 미국과 패권 경쟁을 하고, 더 나아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를 대체하고자 하는가. 이 의문에 답하기 위해 필자는 다양한 자료를 조사했으나 똑 부러지는 답변을 찾기 어려웠다.21세기의 중국은 20세기의 소련보다 잘 사는 나라다. 사실상 소련을 완전히 봉쇄하고 경제적으로 숨이 넘어갈 때까지 기다릴 수 있던 미국의 전략은 현재 통용될 수 없다. 미국과 중국은 경제적으로 서로 촘촘히 얽혀 있고, 성난 언어를 주고받지만 조심스럽게 '디커플링'을 진행할 따름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중국은 소련보다 '부유한 제국'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중국은 소련과 다르다. 19세기에 만들어지고 20세기에 전 세계를 열병에 휩싸이게 한 공산주의 같은 어떤 보편적 이념이 중국에는 없다. 중국의 이데올로기 생산 유포 기구인 공자학원에서 만든 여러 문건을 보더라도 의문은 해소되지 않는다. 중국인이 아닌 사람들, 중국인 중에서도 경제 개발의 혜택을 입고 있는 중상층이 아닌 이들이, 시진핑이 절대 권력을 쥔 중국 체제를 지지해야 할 이유를 도저히 찾아볼 수가 없다.
반대로 한국인들이 중국에 호감을 갖지 못할 이유는 많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는 한한령을 통해 중국 정부의 자기중심적이고 예측불가능한 정책의 피해를 입었다. 실제로 여론조사의 추이를 보면 한국인들의 반중 감정은 한한령 이전과 이후 큰 차이를 보인다. 이전까지는 다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넘어갔고, 옆 나라인 중국이 잘 살게 되면서 우리도 혜택을 보니 나쁘지 않다는 의견도 상당했다. 중국이 그 돈으로 우리의 뺨을 때리는 현실을 경험하니 입장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항에서도 꾸준히 반중감정을 규탄하는 이들이 있다. 국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불과 지난해까지도 정권을 맡았던 더불어민주당이다. 그들이 대중 일반에 퍼진 반중감정을 상대하기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논리가 그리 많지는 않다. 야권은 이 글을 시작할 때 인용했던 것처럼 '반중감정은 곧 혐오발언'이라는 식으로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뷰파인더'를 꾸준히 읽은 독자라면 알고 계실 것이다. 필자는 정치적 올바름에 민감한 사람이다. 보수적 성향이 강한 독자층의 기대를 종종 배신하면서 정치적 올바름, 특히 여성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애쓰는 편이다. 하지만 국내에 퍼져 있는 반중감정에 '혐오'라는 낙인을 쉽게 찍고 매도하는 일각의 움직임은 납득하기 어렵다. 일부 반중감정에 혐오표현이 묻어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나, 반중감정 그 자체를 모두 혐오발언으로 매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대체 '중국몽'이란 무엇일까
한한령이 불러온 한파를 겪으며 한국인들은 중국을 두려워하고 싫어할만한 이유를 얻었다. 반면 중국을 좋아해야 할 이유는 단 하나도 얻지 못했다. 한국의 뒤를 이어 경제성장의 박차를 가하고 있던 개발도상국 중국으로서는 굳이 그런 노력을 해야 할 이유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중국은 미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의 지위를 노린다.중국이 우리에게, 중국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인가. 경제적 필요를 이야기하기엔 이미 우리는 '쓴맛'을 봤다. 최근 한국의 대미수출액이 대중수출액을 앞질렀다는 사실 역시 짚어둘 필요가 있다. 하물며 중국은 문화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우리에게 모범이 되는 나라라 보기 어렵다. 혹은 전 세계가 나아가야 할 어떤 바람직한 이상을 제시하고 있지 못함은 물론이다.
대체 '중국몽'이란 무엇일까? 2017년 베이징대에서 "한국도 작은 나라지만 책임 있는 중견국가로서 그 꿈에 함께 할 것"이라며 중국몽에 동참하겠노라 선언했던, 2022년에는 '짱깨주의의 탄생'을, 2023년 6월 25일에는 '1950 미중전쟁'을 추천한 문재인 전 대통령의 솔직한 의견이 문득 궁금해진다.
노정태
● 1983년 출생
● 고려대 법학과 졸업, 서강대 대학원 철학과 석사
● 前 포린 폴리시(Foreign Policy) 한국어판 편집장
● 저서 : '불량 정치' '논객시대' '탄탈로스의 신화'
● 역서 : '밀레니얼 선언' '민주주의는 어떻게 망가지는가' '모던 로맨스'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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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정태 경제사회연구원 전문위원·철학 basil8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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