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최악 위기… 이대로라면 중국 시장 철수해야 [+영상]
● 美 “대체하지 말라” vs 中 “중국에 베팅하라”
● 新공급사슬 형성 속 압박당하는 韓
● 피인용지수 상위 1% 논문, 中이 美 제쳐
● 中 4000건 vs 韓 500건, 초격차 안심 못해
● 정부 주도 산학연 협력만이 살길
[+영상] 반도체 전쟁 중인 지금은 '이건희' 다시 읽을 때
"정부가 기업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 기업이 판단할 문제다."
5월 22일 기자간담회에서 나온 장영진 산업통상자원부 1차관의 한마디에 미국이 눈에 쌍심지를 켰다. 중국은 최근 미국 최대의 메모리 반도체 기업 '마이크론'의 중국 내 제품 판매를 금지하는 제재안을 발표했다. 심각한 보안 문제가 발견됐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은 부당한 경제적 강압이라 반발하며 한국도 반발에 동참하라는 요구를 내비쳤다. 구체적으로 마이크론 제품 판매금지 조치에 따른 빈자리를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한국 기업이 대체하지 말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 장 1차관의 발언은 미국에 '중국에서 퇴출당한 마이크론의 시장점유율을 한국 기업이 채워도 된다는 신호를 보낸 것'이라 해석됐다. 한국 정부는 "기업 스스로 대응 방안을 찾느라 고민이 클 것이라는 취지의 발언"이라 해명했다.
"미·중 분쟁에 끌려들어 간 한국"
미국과 중국의 압박은 한국이 처한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반도체를 둘러싼 양국의 패권 경쟁에서 한국 반도체가 샌드위치처럼 낀 모양새다. 미국 외교전문지 더디플로마트는 6월 3일 "중국의 마이크론 수입 금지로 한국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됐다"며 "한국 기업들은 마이크론을 대체할 중국의 주요 대안으로, 중국은 한국을 미·중 반도체 분쟁으로 더 깊숙이 끌어들였다"고 평가했다. 블룸버그 통신 역시 5월 28일 "미국은 한국의 최고 안보 파트너이고, 중국은 한국의 최대 통상 파트너"라며 "마이크론에 대한 중국의 결정 때문에 기술 접근과 국가 안보를 둘러싼 미·중 분쟁에 끌려들어 갔다"고 해설했다.
한국은 매우 곤혹스러운 상황이다. 반도체 핵심기술 보유국이자 패권국인 미국의 견제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미국 기술이나 장비 없이는 사실상 반도체 제조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주요 생산기지이자 시장인 중국을 버릴 순 없다. SK하이닉스가 생산하는 전체 D램 칩 중 절반이 중국에서 생산된다. 낸드 메모리칩 생산량의 30%도 중국서 생산된다. 삼성은 낸드 메모리칩의 40%를 중국에서 생산한다.
한국만 공급사슬에서 빠질 수도…
반도체는 전기가 통하는 도체와 전기가 통하지 않는 부도체 중간 영역에 속하는 물질이다. 어떤 특별한 조건하에서만 전기가 통한다. 반도체에 가해진 열이나 전압, 조사된 빛의 파장에 따라 전기가 통하는 정도가 조절된다.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고 불린다. 스마트폰이나 자동차, 컴퓨터 등 우리 생활에 필수적인 전자기기 모두에 핵심 소재로 쓰여서다. 반도체산업은 1970년대 미국에서 시작됐다. 1980년대 일본을 생산지로 활용하다 외교 분쟁으로 미국은 일본산 반도체 수입에 100% 관세를 부과했다. 이때 한국과 대만이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동아시아가 반도체 생산기지 역할을 하고, 미국이 팹리스(설계) 중심으로 장비와 소프트웨어를 생산하는 세계 반도체 공급사슬이 형성된 것이다.
반도체를 사다 쓰는 입장이던 세계 최대의 반도체 수입국인 중국은 이 체제에 반기를 들었다. 반도체가 산업의 쌀을 넘어 '미래 산업의 쌀', '국가경제 안보의 동력'으로 변모해서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며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 챗GPT발(發) 인공지능(AI) 붐, 4차 산업혁명 필수재 등의 이유로 반도체는 더 중요해졌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포천 비즈니스 인사이트'에 따르면 세계 반도체 시장규모는 2021년 약 5278억 달러(약 683조 원)에서 연평균 12.2% 성장률을 보이며 2029년 약 1조3807억 달러(약 1786조 원)로 커질 것으로 분석된다.
시진핑 국가주석은 '과학기술 자립화'를 강조하며 중국 반도체산업에 집중 투자하고 있다. 반도체 자급률을 2025년 70%로 올린다는 목표로 국가 차원에서 자국 반도체 기업을 지원하면서 세계 시장 점유율 확대에 공을 들이고 있다. 미국도 반도체 개발과 점유율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지난해 8월부터 반도체 산업육성법을 시행해 왔다. 520억 달러(약 67조 원)를 쏟아부어 반도체 생산공장(팹)의 자국 내 설립을 유도하는 등 자국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는 게 목표다.
이런 패권 경쟁 구도 속에서 기존 세계 반도체 공급사슬이 끊어지고 새로운 공급사슬이 형성되고 있다. 미국과 중국은 이 경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각자 협력국을 모으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3월 이른바 칩(Chip) 4로 알려진 미국 중심의 반도체 기술 연합을 결성했다. 한국의 칩4 합류 움직임에 중국은 "한국이 장기적 이익을 염두에 둬야 한다"며 경고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당시 "한국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끼었다"고 평가한 바 있다. 중국의 마이크론 규제에 따른 최근의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개발과 점유율 확대에 총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한국 반도체 기업들이 처한 정치 외교적 상황이 녹록지 않아지는 일이 반복되는 셈이다. 새로운 공급사슬 형성 움직임에 한국이 과거 일본처럼 일순간에 사슬에서 빠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유럽이나 일본 같은 경쟁자들도 떨쳐내야 한다. 한국 반도체가 '최악의 위기'에 빠졌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불안한 초격차 전략
반도체는 한국 경제성장을 이끌어 온 주축이다. 단일 수출 품목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반도체 수출 부진은 한국 전체 수출 부진으로 이어진다. 실제 5월 무역적자는 21억 달러(약 2조7163억 원)를 기록하며 15개월째 적자 행진을 이어갔다. 반도체 수출 부진이 전체 수출 부진으로 이어졌다. 5월 반도체 수출액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36.2% 감소했다. 반도체 수출 증가율은 지난해 8월 이후 10개월째 마이너스다.한국의 월간 반도체 재고지수 역시 처음으로 200을 웃돌았다. 재고지수는 일정 시기 재고량을 기준으로 지수화한 것이다. 통계청 국가통계포털(KOSIS)에 따르면 올 4월 반도체 재고지수(2020년=100)가 246.5를 기록했다. 1985년 관련 통계를 작성하기 시작인 이래 사상 최고치이자 200을 돌파한 것도 처음이다.
반도체가 수출 효자 품목이었다는 허울만 남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김형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차세대반도체연구소장은 "최악의 경우, 한국 반도체는 중국 시장에서 철수해야 할 것"이라며 "정부에서 뾰족한 정책을 산업계에 제시하는 것도 아닌 상황이라 미국과 중국의 무형 그리고 유형의 압박 속에서 한국 반도체 위기가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SK하이닉스는 지난해 중국 정부로부터 인텔 낸드플래시 사업부 인수를 승인받았다. 이에 따라 SK하이닉스는 다롄(大連)의 인텔 낸드플래시 생산공장 등을 인수했다. 그러나 최근 미·중 갈등이 심화되며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서 '철수설'까지 돌고 있다는 전언이다.
김 소장은 "한국은 미국 편에 설 수밖에 없고, 미국은 한국이 중국에서 비즈니스를 잘하도록 두진 않을 것"이라며 "한국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런 상황 속에 한국은 반도체 초격차 전략을 펼치고 있다. 세계 반도체 경쟁을 두고 '전시 상태'와 다름없음을 인식하고 생존 전략으로 첨단기술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거는 모습이다. 그러나 기술 경쟁력에서 높은 우위를 점하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다. 최근 20년간 연구 규모와 수준은 성장했지만 질적 성장이 더뎠다는 것이다.
10위 안에 한국 기업은 없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2월 발간한 '학술논문 데이터로 본 글로벌 반도체 기술 패권 경쟁'에 따르면 지난 20년간 한국은 반도체 분야 논문 출판 수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2000~2005년 6위, 2006~2010년 5위, 2011~2015년 4위, 2016~2021년 4위로 전반적으로 상승세를 보였다.그러나 논문의 질을 평가하는 척도 중 하나인 피인용지수 분석에선 순위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인용지수 상위 1%에 해당하는 논문 수 기준 순위는 2000~2005년 11위, 2006~2010년 9위, 2011~2015년 6위, 2016~2021년 6위로 나타났다.
특히 상위 국가들과 격차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은 2016~2021년 사이 피인용지수 1%가 넘는 논문을 4000건 발표했으나 같은 시기 한국은 500건 미만에 머물렀다. 이 기간 중국은 미국을 제치고 피인용지수 1%를 넘는 논문을 가장 많이 발표했다. 안세정 KISTI 글로벌R&D분석센터 책임연구원은 "한국이 글로벌 기술 패권 경쟁에서 살아남고 중장기적인 기술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전반적 연구 영역 포트폴리오 점검과 조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반도체 시장은 크게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 분야로 나뉜다. 국내 반도체업체는 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강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시장 중 55%가량이 시스템 반도체 시장이다. 이 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3%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삼성전자를 제외하면 1%도 채 안된다. 한국이 시스템 반도체 부문이 약한 탓에 수요 '업&다운'이 심한 메모리 반도체 분야 영향을 받아 해외 정세에 따라 수출이 크게 영향을 받는 구조인 것이다.
정부는 AI반도체 같은 시스템 반도체의 국내 기술력을 미국 대비 89% 정도로 분석하고 있다. 대만 TSMC 등에 비해 기술력이 뒤처지는 상태라 판단하고 있다.
또 '첨단 패키징' 분야에서도 뒤처진 것으로 분석된다. 반도체 제조공정은 칩을 설계해 웨이퍼에 조각하는 '전공정'과 반도체 제조사가 칩을 잘라 절연체로 감싸고 안정적 전원 공급을 위해 배선하는 '후공정'으로 나뉜다. 후공정에는 서로 다른 종류의 반도체를 연결하고 포장하는 패키징 과정도 포함된다.
전기차나 자율주행차 시대가 도래하며 차량에 들어가는 반도체 성능을 향상하기 위한 패키징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 이 분야도 후발주자다. TSMC와 미국 인텔은 이미 이 분야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후공정 전체로 놓고 봐도 대만과 중국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욜디벨롭먼트에 따르면 2021년 매출 기준 반도체 후공정 업체는 대만 ASE, 미국 앰코, 중국 JCET 순으로 나타났다. 10위 안에 한국 기업은 없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한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한국은 그간 '기업이 잘하는데 왜 정부가 세금을 투자해 연구해야 하냐'는 식으로 반도체산업을 민간 영역에 국한시켰다"며 "지금에서야 정부가 산업체를 돕고 싶지만 그렇게 협력을 한 적 없으니 쿵짝이 맞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범국가적 로드맵하에 산학연이 협력하는 것은 대만이 강점을 보인다. TSMC 내 실험설비들을 개방해 학계와 정부출연연구기관이 함께 연구했다. 이 과정에서 범국가적 로드맵을 그리고 20∼30년 후를 함께 준비해 왔다. 현재의 반도체 위기를 타파하려면 대만 같은 움직임이 필요하다.
한 가지 희망적인 사실은 윤석열 대통령도 국가가 나서야 할 때라는 데 공감한다는 점이다. 윤 대통령은 6월 8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반도체 국가전략회의'에서 "반도체산업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전쟁"이라며 "반도체산업은 산업 전쟁이고 국가 총력전"이라고 말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정부 주도로 산학연이 협력해 총성 없는 반도체 전쟁에 뛰어들 전력(戰力)을 증강할 때다.
고재원 매일경제 기자 ko.jaewon@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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