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손'은 라면값을 잡았을까?
선한 의지가 종종 나쁜 결과 초래하기도
정부의 '보이는 손'이 국내 식품 가격을 억누르고 있습니다. 물가 안정을 위해 서민들을 위한 선한 정책을 내세운 정부가 시장에서 결정되는 가격에 손을 댄 것입니다.
'보이는 손'이 작동하는 방식은 간단합니다. 지난달 18일 추경호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방송에서 라면 가격 인하 발언을 했고, 지난달 26일 농림축산식품부가 제분업계를 소집했죠. 소집 직후 CJ제일제당이 식품의 원자재인 소맥분 가격을 5% 내리자 라면회사들도 라면 가격 인하를 발표하고 나섰습니다.
여론은 호의적입니다. 이번 달부터 라면 가격이 내려가니 물가 부담이 줄어들 것이란 기대감이 커지고 있죠. 내 월급 빼고 모든 것이 오른다는 요즘, 라면값 50원이라도 아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선한 의지가 종종 나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가장 빠르게 반영된다는 주식 시장을 볼까요. 추 부총리 발언 직전 43만8000원에 거래되던 농심의 주가는 39만원 선까지 하락했습니다. 삼양식품은 11만4300원에서 10만7000원으로, 오뚜기는 44만1500원에서 39만2500원으로 뚝 떨어졌죠.
라면값을 얼마나 아낄 수 있을지도 미지수입니다. 당장 서민의 물가 부담이 줄어들 것 같이 보이지만, 복잡한 유통구조를 보면 물가 부담이 얼마나 줄지는 장담할 수 없어서죠.
일례로 농심은 신라면의 한 봉지의 가격을 1000원에서 950원으로 50원(6.9%) 내렸는데, 라면을 한 봉지만 사는 소비자가 얼마나 될까요. 보통은 대형마트에서 라면 5봉지를 묶은 '번들 제품'으로 사는 경우가 많고, 번들 제품의 가격은 유통사와 제조사의 협상에 따라 달라집니다. '번들 제품'의 할인 폭은 라면 회사의 판매 전략과 유통사의 협상력에 의해 좌우되는데, 할인 폭을 줄이거나 라면 한 봉지를 더 끼워 행사가 중단될 수 있습니다. 소비자가 체감하는 할인폭은 크지 않을 수 있는 셈이죠.
정부가 라면 가격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소비자 입장에선 더 싼 값에 라면을 살 선택권이 있습니다. 대형마트 자체브랜드(PB) 라면은 개당 400~500원 선입니다. 신라면, 진라면, 삼양라면 등의 가격이 부담이라면 절반 가격대에 라면을 먹을 수 있는 것이죠. 물론 값비싼 라면도 있습니다. 뒤늦게 라면 시장에 뛰어든 하림은 2021년 2200원짜리 봉지면인 '더미식라면'을 팔고 있죠. 굳이 정부가 시장에 개입하지 않더라도 소비자가 스스로 부담을 줄일 방법이 있는 셈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업의 자율성을 해친다는 점입니다. 라면과 함께 제과, 제빵 회사들도 정부 눈치를 보기 시작했죠. △해태제과 아이비 오리지널 △롯데웰푸드의 '빠다코코낫', '롯샌', '제크' △SPC의 식빵, 크림빵, 바게트 등도 가격 인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13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죠. 2010년에도 정부의 압박에 라면과 제과 업계가 일제히 가격을 내렸습니다. 국내 식품업계엔 정부가 언제든지 시장에 개입할 수 있다는 주홍글씨가 새겨진 것이 다시 한번 확인 된 것입니다.
'우물 속 개구리'라는 지적을 받던 식품업계는 최근 해외에서 잇단 성과를 내고 있습니다. CJ제일제당의 비비고 만두는 전 세계에서 1조4000억원 가량 팔리고, 라면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농심 미국 법인은 3번째 공장 증설을 검토하고 있습니다. 파리바게뜨와 뚜레쥬르도 미국 매장을 100개 안팎으로 내며 시장에 안착하고 있죠. 세계 식탁을 향해 뻗어가는 국내식품 회사의 발목을 정부의 '보이는 손'이 잡은 셈입니다.
[주간유통]은 한주간 유통·식음료 업계에서 있었던 주요 이슈들을 쉽고 재미있게 정리해 드리는 콘텐츠입니다. 뉴스 뒤에 숨겨져 있는 또 다른 사건들과 미처 기사로 풀어내지 못했던 다양한 이야기들을 여러분께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안준형 (why@bizwatch.co.kr)
ⓒ비즈니스워치의 소중한 저작물입니다. 무단전재와 재배포를 금합니다.
Copyright © 비즈워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