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조차 힘들었을 일”...돈·권력·명예가 모여드는 이곳, 한때는 모래만 있었다 [사-연]

한주형 기자(moment@mk.co.kr) 2023. 7. 1.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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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장에서 빌딩숲까지, 천지개벽 여의도 제방길을 걷다(5)
정부기록물과 박물관 소장 자료, 신문사 데이터베이스에 잠들어 있는 빛바랜 사진들을 열어 봅니다. ‘사-연’은 그중에서도 ‘길’, ‘거리’가 담긴 사진을 중심으로 그곳의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연재입니다. 거리의 풍경, 늘어선 건물, 지나는 사람들의 옷차림 등을 같은 장소 현재의 사진과 이어 붙여 비교해볼 생각입니다. 사라진 것들, 새롭게 변한 것들과 오래도록 달라지지 않은 것들이 무엇인지 살펴봅니다. 과거의 기록에 지금의 기록을 덧붙여 독자님들과 새로운 이야기를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 해당 장소에 얽힌 ‘사연’들을 댓글로 자유롭게 작성‘해 주세요.
뉴욕 맨해튼(위)과 여의도(아래)의 스카이라인. 초고층 건물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한주형기자]
여의도를 ‘한국의 맨해튼’이라고 하죠. 맨해튼 섬과 여의도는 비슷한 점이 여러모로 많습니다. 넓은 강의 하류에 위치한 섬이란 점이 그렇고, 허허벌판인 섬을 격자식으로 구획을 나누어 개발한 역사도 그렇습니다. 섬 중앙에 대규모 공원이 있고 마천루가 즐비한 모양새도 비슷하고, 금융과 미디어의 중심지라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오늘은 허허벌판 여의도가 대한민국의 ‘맨해튼’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대한민국의 금융 중심지를 넘어 동북아 금융허브로
1974년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으로 양택식 서울시장이 직을 내려놓고 후임으로 구자춘 시장이 취임합니다. 시장이 바뀜에 따라 시정에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구 시장은 취임 직후 “서울의 도시계획에는 철학이 없다”고 질타하며 강북에 쏠린 산업과 인구를 분산할 것을 지시합니다. 그에 대한 대안으로 서울을 3개의 핵으로 나누는 ‘3핵 도시구상’을 담은 ‘서울도시기본구상’을 제시합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4대문 안에 집중되었던 도심의 기능을 영등포, 여의도와 영동(강남)으로 분산하는 방안이었습니다.
한국거래소가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중구 명동에 위치해 있던 한국증권거래소의 전경(왼쪽)과 1963년 열린 한국증권거래소 개소식. [서울역사아카이브]
1920년 경성주식현물취인소가 들어선 이후 반세기동안 대한민국의 금융 중심지 역할을 곳은 명동이었습니다. ‘3핵 도시구상’이 서울 개발의 밑바탕이 되었던 1970년대 중후반을 거치며 금융 중심지를 명동에서 여의도로 옮기려는 계획이 진행됩니다. 먼저, 정부 주도 아래 금융기관들이 여의도에 입주하기 시작합니다. 1978년 증권감독원(금융감독원)이 여의도에 자리를 잡았고, 이듬해 한국증권거래소(한국거래소)도 이전하며 여의도 금융시대의 문을 엽니다. 1980년대는 거래 업무의 전산화가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빠른 전산거래를 위해서는 거래소 전산시스템과 지리적으로 가까이 위치해 있는 것이 유리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금융‧증권사들도 거래소가 위치한 여의도 일대로 속속 사옥을 옮겨옵니다.

여담이지만, 증권사들은 여의도 이전을 주저했다고 전해집니다. 바로 풍수 사상 때문이었는데요.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듯 바람이 많이 불고 모래섬이었던 여의도에 돈을 차곡차곡 쌓아야 하는 금융사들이 자리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주색(酒色)의 기운이 강해 망신살을 경계해야 한다’는 명리학적 해석이 1970년대 말 증권가에 공공연하게 떠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1984년 여의도 한국거래소 플로어의 모습(왼쪽)과 2000년 여의도 증권가의 한 객장에서 주식시황판을 살펴보는 투자자들. [서울역사아카이브·매경DB]
잠깐 딴 길로 새서, 거래소의 역사를 살펴본 김에 종합주가지수에 대한 이야기도 해 볼까요. 한국 증시에서 종합주가지수 산출이 시작된 것은 1964년입니다. 우량주의 주가 평균으로 지수를 산정하는 방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방식은 대표성이 부족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시가총액 방식의 코스피 지수가 1983년 1월 4일 탄생했습니다. 처음으로 코스피가 도입된 날 종가는 122.52였습니다. 1980년 경제 호황기를 거치며 주식 투자가 대중화되고 거래량이 급상승하며 코스피 지수는 1,000포인트(1989년)를 돌파합니다. 여의도 풍수론이 무색할 정도로 증권가가 호황을 누렸음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증권협회에서 대규모 부지를 매입하여 1985년 제1증권타운과 1994년 제2증권타운을 완공했고, 점차 ‘여의도 금융가’라는 말이 허상이 아닌 명실상부한 말이 되었습니다.
수정구슬 속 비치는 여의도 증권가의 야경. [한주형기자]
1997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수많은 여의도 개발계획이 고꾸라지기는 했지만, 여의도공원 일대 초고층 랜드마크 건설 계획은 꾸준히 진행됩니다. 노무현 정부와 이명박 정부를 거치며 여의도를 홍콩과 싱가포르 수준의 동북아 금융허브로 키운다는 밑그림을 담은 ‘동북아 금융허브 추진전략’이 시행됩니다. 그동안 미국 AIG그룹과 손잡고 서울국제금융센터(IFC)가 2012년 준공했고, 바로 옆 통일교 주차장 부지에도 2020년 파크원타워가 완공됩니다. 새롭게 등장한 여의도 초고층 빌딩에 증권사들이나 사모펀드, 자산운용사 등이 입주를 타진했습니다.
한국 방송산업의 메카
KBS 사옥 조감도(왼쪽)와 1976년 준공 당시 KBS 사옥과 여의도 전경. [국가기록원]
‘여의도 정가’, ‘여의도 금융가’라는 말 못지않게 관용적으로 쓰이는 말이 ‘여의도 방송가’라는 말입니다. 그만큼 방송산업은 여의도를 대표하는 산업 중 하나였습니다. 방송사들은 금융‧증권사보다 한 발 앞서 여의도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1970년대, 방송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자 KBS는 신사옥 건설을 계획합니다. 원래 예정지는 서대문구 연희동이었지만 정부의 공공건물 이용계획에 따라 여의도에 자리 잡게 됩니다. 부지 결정 과정에서 여의도개발계획의 영향이 크게 작용했던 것입니다. 현재 서여의도에 위치한 KBS 본관 건물은 원래 15층 이상의 고층으로 설계되었으나, 국회 일대 건물 높이 제한으로 지금의 층수로 낮추어 건축되었다 전해집니다.
여의도 방송가의 역사 중 대표적인 사건으로 1983년 KBS 일천만 이산가족찾기 생방송을 꼽을 수 있다. 6월 30일 120분의 방송이 나간 뒤로 KBS 사옥 앞과 여의도 광장은 이산가족을 찾는 벽보로 뒤덮였다. 이날부터 138일간 이어진 프로그램에서 총 10만 952건의 이산가족이 신청하고 5만 3536건이 방송에 소개됐다. 이를 통해 총 1만 189명의 이산가족이 상봉했다. [KBS 이산가족찾기 아카이브]
KBS 일천만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방영 직후인 1983년 7월 수많은 이산가족들이 KBS 본관에 벽보를 붙이고 있다. [정부기록사진집]
1976년 KBS가 여의도에 사옥을 건설한 이후 1980년 TBS(현 KBS2)이 중앙일보 서소문사옥을 나와 여의도에 터를 잡았습니다. 1983년에는 정동 경향신문 사옥에 있던 MBC도 동여의도에 방송 스튜디오를 완공하고 이전합니다. 한편, 1990년 노태우 정권은 방송제도개편안을 발표하고 민영방송신청자를 모집했습니다. 이때 주식회사 태영이 지배주주로 선정되었고, 그 해 말 서여의도에 위치한 태영 사옥에서 SBS가 개국합니다.

지상파 3사가 모두 모임으로서 여의도는 방송산업 관련 종사자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고, 미디어, 콘텐츠, 광고 등 관련 산업들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SBS가 2004년 목동으로, MBC가 2014년 상암으로 이전하여 KBS를 제외하고 이제 여의도에 남아 있는 방송사들은 없습니다. 방송사가 떠나가며 이와 협업관계에 있던 제작사 등이 함께 이전했고, 현재는 한때 빛나던 ‘여의도 방송가’의 위상을 상암 DMC 에 위임하게 되었습니다.

마치며
선유도에서 바라본 여의도 야경. [한주형기자]
한때는 제방의 방죽이었던 길을 걸어봅니다. 여의도를 한 바퀴는 10km 정도로 성인 걸음이면 2시간이면 충분히 돌아볼 수 있습니다. 여의도 개발은 서울 역사상 유래 없는 가장 큰 대규모 공사이자 쓸모없는 땅을 새로운 도시로 만드는 대표적인 사업이었습니다. 불과 70년 전만 하더라도 모래바람이 날리던 땅이었던 이곳. 그곳에서 누군가는 설계를 하고, 제방을 쌓고, 도로를 놓고, 건물을 올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도시계획이나 개발안들이 실행되기도, 때로는 폐기되기도 하면서 지금 여의도의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온전히 대한민국의 발전과 함께 ‘일궈낸 땅’인 여의도, 오늘은 섬 가득 빽빽한 마천루를 바라보며 이곳을 ‘일군 이들’에 대한 감사함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져봅니다.

<참고문헌>

ㅇ손정목, 「서울 도시계획 이야기2」, 한울출판사

ㅇ서울역사박물관, 「돌격 건설! 김현옥 시장의 서울Ⅱ」

ㅇ서울역사박물관, 여의도 100년사 기획전시 <모래섬, 비행장, 빌딩숲 여의도>

ㅇ서울역사박물관, [생활문화] 여의도 : 방송과 금융의 중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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