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한데 멋있기까지…부채 선물로 여름 생색 제대로 [ESC]

한겨레 2023. 7. 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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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박효성의 욕망하는 공예]박효성의 욕망하는 공예 부채
김현주 디자이너의 한지 부채 ‘숲에서 부는 바람’.

수박 크기만 한 크기에 먹으로 대나무가 그려진 부채를 선물 받았다. 작년 여름의 일이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시서화에 조예가 깊은 친구가 직접 그린 소중한 선물이라 부채질하며 쓰기보다 고이 모셔두고 감상만 했다. 그러다 갑자기 더위가 찾아왔던 5월 말, 선풍기는 꺼내지 못했고 에어컨 청소도 아직이라 부채를 집어 들 수밖에 없었다. 근데 웬걸, 손이나 종이 따위로 부채질했던 것과 달리 대나무 부채는 힘차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며 일찍 찾아온 더위를 단숨에 날려버렸다. 옛 물건이라 기능은 기대하지 않았던 부채의 재발견이다. 요즘은 손 가까운 곳에 두고 열이 오른다 싶으면 슬슬 부치는 통에 부채는 이제 애장품에서 애용품으로 위상이 바뀌었다.

사치품·뇌물로도 활용되던

부채는 바람을 일으킨다는 의미인 ‘부'와 대나무 도구라는 뜻의 ‘채’로 이루어진 순수한 우리말이다. 역사 기록을 살펴보면 <삼국사기>에서 부채의 가장 오래된 흔적을 찾을 수 있고 고려 때 우리말 사전 격인 <계림유사>에서 한자 ’선’(扇)을 부채로 표기했다. 더위가 시작되는 음력 5월5일 단오에는 선비들이 서로 부채를 선물하는 풍습이 조선 말기까지 성행했다. 부채는 임금에게 진상해야 했으므로 귀하고 멋스럽게 만들어졌고 임금도 이 부채를 신하들에게 하사하며 ‘단오선’ 풍습이 오래 유지될 수 있었다. 시원하게 여름을 나라는 의미와 함께 부채가 일으키는 맑은 바람처럼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기를 바라는 의미가 담겼다고 한다. 하지만 부채를 화려하게 만드는 데 공을 많이 들이고 장식으로 꾸미는 데 열중한 나머지 사치품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태종 때부터 있었다. 성종은 진상하는 부채에 주칠(붉은 물감)을 하면 사치스럽고 실용 가치가 없다고 했고, 영조는 부채의 장식에 주석을 사용하는 것을 금했다. 진귀하게 만든 부채가 뇌물로 악용되기도 했다.

부채는 단순히 바람을 일으켜 더위를 식히는 데만 쓰이는 것이 아니다. 조선 시대 남성의 손에서 떨어질 새 없이 다양한 역할을 했는데 바른 몸가짐과 체면을 중시했던 터라외출 시 여러 상황에서 얼굴을 가릴 때 사용하고, 풍류를 즐기며 춤사위를 펼치는 여흥의 도구가 되기도 했으며 부채의 면 위에 서화를 그리고 시를 쓰며 예술적 취향을 표현하기도 했다. 그러니 부채는 여름뿐만 아니라 계절에 관계없이 자신의 맵시와 지위를 뽐내는 증표였고, 온갖 규제 속에서도 권세가들의 부채는 화려한 바람을 일으켰다.

부채의 종류는 크게 둥근형의 ‘방구 부채’와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접부채’(쥘부채)로 나뉜다. 조선 시대에 유행하며 제작기술이 뛰어났던 접부채는 중국과 일본으로 수출됐다. 부챗살의 수가 많고 가늘수록 명품으로 인정받고 큰 부채를 선호하는 세태로까지 이어지자 실용적이고 튼튼한 합죽선이 나왔다. 합죽선은 20·30·40·50살 등 용도에 따라 살의 수를 규제해 제작했는데 왕가에서는 50살 합죽선을, 사대부는 40살 합죽선을 사용했다. 여성들은 합죽선을 쓸 수 없어 주로 방구 부채를 썼다.

스튜디오 워드의 한지 꽃 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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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테리어 소품까지 가능한

섬세한 기술과 화려한 기교로 명품 부채를 만들었던 장인들의 솜씨는 예나 지금이나 귀하다. 왕의 여름 선물을 만들어야 했으니 오죽할까. 지금은 각종 냉방 기기는 물론이고 작은 손선풍기에까지 자리를 내주었지만.

명품 중의 명품으로 여름 최고의 선물이었던 부채는 여전히 제 역할을 충분히 해낼 수 있는 멋진 공예품이다. 시원한 여름 풍류를 선물로 마련할 수 있는 부채들이 현대 공예가의 손길로 근사하게 만들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먼저 국내 최초로 색 한지를 만든 신풍한지의 안치용 장인과 ‘스튜디오 워드’의 최정유, 조규형 디자이너가 협업한 꽃 부채가 근사하다. 대나무 살로 꽃 모양을 만들고 곱게 물을 들인 한지로 만들었다. 손잡이가 긴 것은 화병에 꽃처럼 꽂아둘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또 서촌에 위치한 ‘호호당’에서 판매하는 방구 부채는 보자기 포장까지 완벽해 선물로 더할 나위 없다. 남원에서 50년 이상 부채를 만든 최수봉 공예가의 대나무 부채는 튼튼하고 대찬 바람이 특징이다.

호호당의 방구 부채.

김현주 디자이너가 선보이는 한지 부채 ‘숲에서 부는 바람’은 이름부터 신선하다. 숲을 걸으며 느낄 수 있는 선선한 바람을 표현하고자 부채 모양도 나무를 형상화했다. 김현주 작가는 직접 염색한 고운 한지와 직접 다듬은 손잡이에 촘촘한 대나뭇살을 이어 단단하고 시원한 바람을 일으키는 부채를 만들었다. 사용하지 않을 때는 단독으로 세울 수 있도록 손잡이를 제작해 인테리어 소품으로도 손색이 없다. 온하루의 ‘단오 부채’는 선면에 사용한 한지에 그려진 문양이 특별하다. 풍요와 부, 다산을 의미해 생활용품에 두루 사용됐던 포도 무늬, 조선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사군자와 모란 무늬, 고대 직물에서 많이 사용되며 길상을 의미하는 보상화 무늬를 담았다. 특히 보상화무늬는 고려 시대 봉서리탑 안에서 발견된 ‘금’ 직물 유물을 바탕으로 재해석해 의미가 있다.

온하루의 단오 부채.

전통 부채의 명맥을 잇고 있는 장인들의 진귀한 부채를 만날 수 있는 전시도 전북 전주에서 열리고 있다. 전주부채문화관에서 7월4일까지 열리는 ‘전주단오부채전’에서는 국가무형문화재 선자장(부채 만드는 장인)과 이수·전수자 13인의 작품을 통해 기품 넘치는 부채의 멋을 확인할 수 있다. 선자장 김동식 장인의 합죽선을 비롯해 낙죽장(불에 달군 인두를 대나무에 지져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장인) 이신입 장인의 섬세한 장식이 새겨진 부채는 아름다운 전통 기술의 정점을 보여준다.

청년에게는 푸른 부채, 노인에게는 흰 부채가 선물로 제격이었고, 임금은 신하에게 풍경과 꽃·새 등이 그려진 부채를 내렸다고 한다. 누군가가 건강한 여름을 보내길 바라는 마음을 부채의 바람에 담아 여름 생색 제대로 내보자.

글 박효성 리빙 칼럼니스트

사진 각 브랜드 제공

잡지를 만들다가 공예를 만나 사랑에 빠졌다. 우리 공예가 가깝게 쓰이고 아름다운 일상으로 가꿔주길 바라고 욕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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