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용훈의 한반도톡] 한반도의 오늘을 만든 7월…4일, 7일, 27일

장용훈 2023. 7.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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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멈춰 세운 정전협정·첫 남북회담과 성명·한반도 새 질서 선언 모두 7월에
1953년 판문점에서 열린 정전협정 조인식 (서울=연합뉴스) 오는 27일은 한반도에 전쟁의 총성이 멈추고 불안한 평화가 시작된 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더욱이 올해는 11년 만의 남북정상회담과 사상 첫 북미정상회담이 잇따라 개최되면서 '종전선언'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지고 있다. 사진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유엔군 수석대표 윌리엄 해리슨 중장(왼쪽 앉은 이)과 북한측 수석대표인 남일 대장이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있는 모습. 2018.7.25 [F. Kazukaitis 촬영·미국 국방부 제공] photo@yna.co.kr

(서울=연합뉴스) 장용훈 기자= 7월이다. 장마가 시작되고 본격적인 무더위를 예고하는 7월이지만, 7월은 한반도에서 총성이 멈추고 대화가 시작되고 전 지구를 상대로 외교가 시작된 역사를 가졌다.

6·25전쟁을 그린 영화 '고지전' 속에서 전투를 이어가던 주인공은 싸우는 이유를 묻는 말에 "너무 오래돼서 잊어버렸다"고 답한다. 지루하게 이어지던 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개전 초기 일진일퇴를 주고받은 뒤 교착국면에 들어갔고 1년 뒤인 1951년 7월부터 정전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은 2년 넘게 이어졌고 전쟁 개시 3년 만인 7월 27일 판문점에서 서문과 5조 63항으로 구성된 전문, 11조 26항의 부록으로 구성된 정전협정에 서명하면서 전쟁의 총성은 멈췄다.

유엔군 총사령관과 북한군 최고사령관 및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체결한 '군사 정전에 관한 협정'은 현재까지도 효력이 이어지고 있으며 불안정하지만, 한반도의 평화를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

군사분계선으로부터 2㎞씩 완충지대로서 비무장지대(DMZ) 설치, 군사정전위원회의 구성과 정전협정 감시, 북방한계선(NLL) 명시 등 현재의 한반도 분단체제 구성 요소들은 정전협정에서 시작됐다.

정전협정은 '정전'이라는 불안정한 상황을 '종전'이라는 안정적 상황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정치적 논의도 규정했다.

협정의 제4조 60항은 "한국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3개월 이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 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한다"고 명시했다.

이 조항에 따라 1954년 4월 26일부터 6월 15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다루는 정치회담이 열렸다.

이 회담에는 미국, 소련, 영국, 프랑스와 연합군으로 참전했던 16개국 중 15개국, 중국과 북한이 참가했으며 남한에서는 변영태 외무장관, 북한에서는 남일 외무상이 각각 참석했다. 그러나 회담은 합의를 보지 못하고 서로 견해 차이만 확인한 채 결렬됐다.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과 북측의 박성철 부주석 (서울=연합뉴스) 1973년 6월 14일 영빈관을 나서는 박성철 평양측 남북조절위원장 대리를 환송하는 이후락 서울측 조절위원장. << 연합뉴스 DB >> 2009.10.31 photo@yna.co.kr

이 회담 이후 대화 없이 대결만 존재하는 남북관계가 이어졌고 1971년 8월 20일 이산가족 문제를 풀기 위한 적십자 파견원 접촉을 계기로 남북 간 첫 회담이 성사될 수 있었다.

이 움직임은 당시 남북한 최고위 당국자들 간의 특사교환으로 이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오른팔'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냈고 김일성 주석은 박성철 부주석 등을 서울로 내려보냈다.

이후 대화는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라는 평화통일 3대 원칙에 합의한 '7·4공동성명'으로 결실을 봤다.

물론 당시 남북간의 대화는 한계가 명확했다. 출발 자체가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빼려고 했던 미국의 입장,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총서기의 정상회담 개최 등 '데탕트' 무드 속에서 떠밀려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1974년 박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 발생하자 남북관계는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7·4남북공동성명의 정신은 노태우 정부의 남북기본합의서, 김대중 정부의 6·15공동선언, 노무현 정부의 10·4선언, 문재인 정부의 판문점 선언의 근간으로 이어졌다.

유엔 동시가입 후 악수하는 안북한 대사 (서울=연합뉴스) 1991년 9월17일 유엔본부에서 안보리가 끝나 남북한 유엔가입이 확정된 뒤 노창희 대사(오른쪽)가 북한 대표부 박길연 대사에게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어 악수하고 있다. 2011.9.15 << 연합뉴스DB >> jobo@yna.co.kr

한반도의 오늘을 만든 7월의 세 날 중 4일과 27일이 분단구조 속에서 평화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의 날이었다면 7일은 분단구조에 갇혀 진영논리에 매여있던 대한민국의 외교를 전 지구적 범위로 넓힌 날로 기억된다.

1988년 7월 7일 서울올림픽 개막을 두어 달 앞둔 상황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북한과 적대관계 청산을 선언했다.

노 대통령은 "우리는 남북간에 화해와 협력의 밝은 시대를 함께 열어가야 합니다. (중략) 남과 북이 함께 번영을 이룩하는 민족공동체로서 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것이야말로 번영된 통일조국을 실현하는 지름길인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이 선언으로 남북한은 총리를 수석대표로 하는 1989년 예비회담을 시작으로 남북고위급회담을 개최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할 수 있었다.

7·7선언은 단순히 남북관계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의 외교질서를 바꾸는 계기가 됐다.

노태우 대통령은 "북한이 미국, 일본 등 우리 우방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협조할 용의가 있습니다"라고 선언하면서 자유주의 진영에 갇혀있던 한국의 외교는 사회주의 진영으로까지 지평을 넓힐 수 있었다.

그리고 남북한은 1991년 9월 제46차 유엔총회에서 유엔 동시 가입국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의 우방인 미국, 일본은 북한과 대화와 접촉을 시작했고 한국은 북한의 혈맹인 중국, 러시아를 필두로 사회주의 진영과 수교를 이어갔다.

7·7선언이 만든 이 외교 질서와 동북아시아의 역학관계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셈이다.

다시 7월이다. 정전 70년, 한미동맹 70년을 맞는 올해 7월은 어떠한 질서를 만들어갈지 주목된다.

jyh@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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