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살고 싶은 의욕을 잃었을 때 왜 시를 읽는가 [여여한 독서]
〈다시 돌아 나올 때의 참담함〉
안정옥 지음
지혜 펴냄
〈스미기에 좋지〉
김복희 지음
봄날의책 펴냄
이 지면에 소개하려고 한동안 역사책을 읽었다. 메모도 해가며 열심히. 그러다 어느 날 책을 덮었다. 뉴스를 보며, 적당히 좀 하라고 뇌던 끝이었다. 책에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그저 내가 무엇을 열심히 하고 싶지가 않아졌을 뿐.
이제까지 나는 열심히 살려고 애썼다. 유유자적, 일필휘지를 동경하지만 그건 애당초 내 능력 밖임을 알기에 몸으로 때우는 열심을 지향했다. 한데 그러기가 싫어졌다. 다들 너무 열심인 것이, 너무 기를 쓰고 끝장을 보려 드는 세상이 버겁다 못해 무서웠다. 사람의 일이란 좋고 싫음이든 옳고 그름이든 100퍼센트란 없건만 요즘은 ‘전부 아니면 전무’식으로 몰아붙이고 여차하면 뿌리를 뽑으려 드니, 하!
하지만 한숨을 쉬는 건 그만두련다.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 이럴 땐 잠시 세상을 등지고 하염없는 문장에 나를 맡기는 것도 한 방법. 하염없기로 치면 시만 한 것이 없다. 마침 얼마 전 도서관에서 발견한 시집이 있다. 그날 신간 코너에는 시집이 무려 세 칸이나 차지하고 있었다. 세종도서, 우수콘텐츠 등에 선정된 도서가 들어온 날이었다. 처음엔 유명한 출판사, 낯익은 이름에 눈이 갔으나 문득 다른 선택이 하고 싶어졌다. 세간의 기준이 아니라 오로지 내 안목으로 새로운 시를 만나자. 빽빽한 시집들의 책등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제목이 끌리는 두 권의 시집을 골랐다.
먼저 안정옥의 〈다시 돌아 나올 때의 참담함〉. 제목 때문에 펼쳤는데 첫 페이지에 적힌 시인의 말이 좋았다. “산산이 흘어지려는 마음의 그런 순간들을 붙잡아둘 수는 없나/ 그래도 아직 나는, 나를 믿고 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 어깨에 손을/ 얹어줘야지 그게 내가 가진 전부지.” 끄덕끄덕, 짧은 말에 담긴 그득한 마음을 알 것 같다. 한 편 한 편 쉬운 듯 쉽지만은 않은 시구들을 다 읽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앞에 실린 시를 보는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내가 왜 갑자기 시집을 찾았는지 알 것 같다. 나도 미처 몰랐던 내 “한 치 속 아픔”을 위로받고 싶어서. 시인의 언어를 빌리면, “내 뜻 없이 이 사람과 저 사람이 합해 내가 되는 이곳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어서. 그러나 그럴 수 없음을 알기에 낯선 언어로 그 부당하되 당연한 삶을 납득하고 위로받고 싶어서였음을 비로소 알겠다.
시는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나
시집을 다 읽고 뒤표지에 적힌 작가 소개를 보니 시인은 1990년부터 꾸준히 시를 발표해온 중견 작가다. 이런 시인을 이제야 알다니 민망한 한편 뿌듯하다. 일흔이 넘어서도 여전히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는 시인이 있다는 게 고맙고, 이제라도 이런 시인을 알게 돼서 기쁘다. 민망하고 고맙기는 두 번째로 고른 〈스미기에 좋지〉를 쓴 김복희 시인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 시집으로 그를 처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이미 시집 세 권에 산문집까지 펴낸 인정받는 작가다. 미안해서 그의 첫 시집을 찾아봤다. 어려웠다.
사실 〈스미기에 좋지〉도 이해하기 쉽진 않다. 그래도 애매한 언어들로 분위기를 잡다가 끝난다는 느낌을 주는 이즈음의 시들과 달리 그의 시는 분명한 시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처음엔 막막하지만 읽다 보면 왜 그렇게 썼는지 이해가 되고, 엉뚱하게 느껴졌던 비유며 시적 장치들이 수긍이 되면서 시를 읽는 게 즐거워진다. 안정옥의 시어가 내 안에 쌓였던 슬픔을 건드려 흐르게 한다면, 김복희의 시어는 내 안의 상상을 건드려 꽃처럼 흐드러지게 한다.
〈스미기에 좋지〉에는 신, 혼, 귀신 같은 말들이 자주 나온다. 모두 있지만 없는 존재들이다. 생각 속에만 있을 뿐 실제로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는 않는 무형의, 그래서 어떤 점에선 무력한 존재들, 존재하지만 존재감은 없는 존재들이다. 김복희는 스스로는 제 존재를 말하지도 드러내지도 못하는 이들을 떠올리고, “떠올린 모든 것에게 그림자를 만들어”준다. 그의 시 쓰기는 보이지 않는 것에 “스미기” “씌기”다. 그렇게 씐 시어는, 부재가 곧 부질없음은 아니며 때론 ‘없음’이 가장 큰 성취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시집의 여러 시가 스미기에 좋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새'란 시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내가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면 이 시로 그림책을 만들고 싶을 만큼 아름다운 한 편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그 이야기는 예술적 상상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넓히고 풍요롭게 하는지, 우리를 어떻게 위로하고 살 만하게 하는지, 끝 간 데 없이 추락하는 이 세상에서 시가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는지 말해준다.
세상을 등지고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알았다. 참기 힘든 폭력과 무례, 비애와 언어도단들 사이에서 그래도 여전히 언어의 힘을 믿고, 언어의 힘에 기대는 사람들의 간곡함을 믿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려 애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서른의 시인과 일흔의 시인은 젊으면 젊은 대로 늙으면 늙은 대로, 인생은 저마다의 슬픔으로 절망스럽다는 걸 보여준다. 그 절망을 보태는 세상의 비정함 또한 새삼스럽지 않다는 것도.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은 세상의 무도함에 쉬 꺾이지 않는다. 시를 읽는 마음도 다르지 않지. 그만 일로 무너질 것 같으면 사람이 그토록 긴 세월 왜 시를 노래하며 살았겠는가. 열심히 살고 싶은 의욕을 잃고 손발을 어디 두어야 할지 모를 때, 시인의 가르침에 기댄다. 가만히 스미도록.
(…)
다섯 밤, 열 밤 자면 끝난다는 것,
다른 아침이 온다는 것,
백일은 생시보다 짧고
하루는 상심보다 길다는 것,
슬픔은 삼인칭이며
기쁨은 무인칭이라는 것,
너와 나 사이에 놓을 우리를
나는 가르친다
(김복희, '교안 만들기' 부분 인용)
김이경 (작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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