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증명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다고? [세상에 이런 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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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A는 직장 상사로부터 은밀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이를테면 A의 사례에서 괴롭힘 사실에 대한 증명책임은 A에게 있다.
그럼에도 우리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모든 증명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다고 했다.
A에게는 증명책임 문제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었지만 B에게는 전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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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A는 직장 상사로부터 은밀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욕설에 가까운 비난이 가해졌고 부당한 업무 지시도 여러 차례 있었다. 참다못한 A는 결국 노동청에 신고했지만, 노동청 조사에서는 아무것도 밝혀지지 않았다. 상사는 그런 적 없다며 잡아뗐고, A에게도 괴롭힘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었다.
노동자 B는 공장에서 일하다 희귀질환에 걸렸다. B는 공장 안에서 인적이 드문 특수한 공간에서 일했고 고약한 냄새를 수시로 맡았다. B는 자신의 병이 산업재해라고 생각하여 근로복지공단에 보상 신청을 했다. 조사에 나선 공단은 회사가 제출한 자료를 살펴보았을 뿐 자체적인 성분분석이나 노출평가는 하지 않았다. B가 작업한 특수 공간에 대해서는 조사 자체를 하지 않았다. 회사가 제출한 자료에도 해당 공간에 대한 작업환경 측정 기록은 없었다. 결국 B는 공단으로 부터 산재 불승인 통보를 받았다.
고약한 냄새 정체도 노동자가 증명해야
증명책임이라는 법률용어가 있다. 다소 오해가 있는데, 이것은 ‘어느 쪽이 증명해야 하는가’라기보다는 ‘결국 증명되지 못한 사실에 대해 어느 쪽에 불이익을 줄 것인가’의 문제다. 이를테면 A의 사례에서 괴롭힘 사실에 대한 증명책임은 A에게 있다. 그래서 소송에서 괴롭힘 사실이 증명되지 못할 경우, 법원은 괴롭힘 자체가 없었다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물론 A로서는 억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증명책임이라는 것이 대개는 어느 쪽에서 증명하는 것이 옳은가 혹은 용이한가에 맞게 꽤 합리적으로 분배되어 있다. A 사건도 그랬다. 괴롭힘이 이어지는 동안 A는 상사의 욕설을 녹음하거나 부당한 업무 지시에 관한 서류를 모아둘 수 있었다. 반면 회사나 상사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스스로 괴롭힘이 없었음을 입증하기에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있고, 그것을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부당한 면이 있다.
하지만 B의 경우는 달랐다. 노동자가 업무상 질병을 이유로 산재보상을 받으려면, 작업환경의 유해성 등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공장에서 맡았던 고약한 냄새의 정체를 알 방법이 B에게는 없었다. 이미 퇴사한 B로서는 직접 공장에 들어가거나 회사에 작업환경 관련 자료를 요구할 수도 없다. 더욱이 B가 일한 공간에서는 노출평가 자체가 실시된 적이 없다지 않는가. 그래서 B로서도 공단의 조사 결과에 기댈 수밖에 없었고, 설령 그 조사가 부실하게 이루어졌더라도 재조사를 요구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 법원과 헌법재판소는 모든 증명책임이 노동자에게 있다고 했다. 노동자가 증명하는 것이 옳지도 않고 용이하기는커녕 가능하지도 않은데, 계속 이 원칙이 고수되고 있다. 다행히 법원은 몇 차례 “근로자에게 책임 없는 사유로 사실관계가 규명되지 않은 사정에 관하여는 근로자에게 불리하게 인정할 수 없다”라고 함으로써 이 원칙을 다소 완화하려 했다. 2017년 대법원에서도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 나왔다. 하지만 여전히 ‘증명책임은 노동자에게’ 원칙이 기계적으로 적용되는 사건이 더 많다.
결국 나는 A에게는 소송 포기를 권했지만 B에게는 그러지 못했다. A에게는 증명책임 문제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었지만 B에게는 전혀 그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스스로도 전혀 납득되지 않는 문제를 어떻게 납득시킬 수 있겠는가. B에게는 대신 같이 싸워보자고 했다. 그렇게 또 한 명 아픈 노동자에게 힘겨운 법정 싸움을 권했다. 병마랑 씨름하는 것만 해도 서럽고 고단한 노동자들에게 참 지독한 싸움이다.
임자운 (변호사)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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