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개’로 일본에 보내진 청나라 공주···일제의 스파이로 조각난 삶[책과 삶]
인종학살 힘러의 마사지사 케르스텐
수용소 면제 ‘허위 명단’ 장사 벌인 바인레프
·
스트롱맨·가짜뉴스 판치는 지금
자기기만적 삶 살았던 3인 통해
“선·악 구분하는 능력”을 되묻다
부역자: 전쟁, 기만, 생존
이안 부루마 지음|박경환·윤영수 옮김|글항아리|464쪽|2만5000원
가와시마 요시코는 ‘동방의 마타하리’ 또는 ‘만주국 잔다르크’라고 불렸다. 청 제국의 공주였지만 일본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는 청나라 숙친왕의 열네 번째 딸로 태어나 둥전으로 불렸지만 청 제국이 와해되며 일본인 가와시마 나니와에게 보내진다. “너는 중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 너는 중국과 일본 사이의 가교가 될 것이다.” 그렇게 가와시마 요시코로서의 삶이 시작됐다. 이후 그는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화려하고 떠들썩한 삶을 산다. 요시코는 혼란스러운 젠더 표현으로도 유명했다. 남장을 한 크로스 드레서였으며, 군복을 입거나 남자 양복을 입고 사교계와 댄스홀을 휩쓸었다. 일본군 장교와 연인 관계를 맺었고, 개인 비서 역할을 하는 지즈코라는 일본 여성을 “내 아름다운 아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일본이 만주에 세운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마지막 황제’ 푸이를 돕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일본으로 보내졌던 요시코는 일제와 대중이 원하는 이미지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거울에 비친 허상이었을 뿐이다. 허상은 깨지기 마련이다. 전쟁이 끝난 후 중국에서 부역자로 몰려 처형당한다. 그의 삶은 사후에도 대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요시코가 청 황실의 공주라는 ‘고귀한 혈통’을 타고났다면, 펠릭스 케르스텐은 ‘마법의 손’을 타고났다. 통통한 몸에 대식가였던 케르스텐의 두툼하고 힘 있는 손은 수많은 귀족과 권력자들의 고통을 치유하는 힘을 발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아수라장 와중에도 케르스텐은 고객들로부터 두둑한 보수를 받으며 “행복을 폭식”했다. 그의 고객 가운데엔 독일의 나치 친위대 SS의 수장 힘러도 있었다. 만성적인 위경련으로 고통받던 힘러의 개인 마사지사가 되어, 고통을 다스리며 ‘심복’에 가까워졌다. 나치의 다른 권력자들도 케르스텐 덕분에 좀 더 편안한 상태에서 ‘인종청소’를 벌일 수 있었다. 하지만 전쟁 말기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는 살길을 도모해 진영을 바꾼다. 힘러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유대인을 수용소에서 구해내고, 수감자들을 석방하려는 시도도 했다. 힘러가 극심한 복통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순간, 그는 ‘마법의 손’을 이용해 힘러를 설득했다.
프리드리히 바인레프는 ‘고귀한 혈통’도, ‘마법의 손’도 타고나지 않았지만 남들보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다. 그 두뇌를 탁월한 거짓말을 지어내 남들을 속이고 조종하는 데 이용했다. 유대인이었던 바인레프는 같은 유대인을 속여 돈을 받아내는 동시에, 나치 수뇌부도 속였다. 바인레프는 부유한 유대인들에게 돈을 받고 수용소에 가지 않을 수 있는 ‘명단’을 만든다. 나치 고위 장교와의 인맥을 활용해 열차 세 대에 유대인을 나눠 싣고 안전한 나라로 이송해주겠다는 계획이었다. 애초에 나치 장교와의 인맥도, 기차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허위 명단을 이용해 막대한 부를 쌓았다. 명단 속 유대인 대부분이 수용소에 보내지고,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가 ‘나쁜 거짓말’만 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수용소장을 설득해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를 한동안 멈추기도 했다. 바인레프는 자신이 수많은 유대인의 목숨을 구했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영웅으로 추앙받기도 한다. 하지만 전후 조사관들이 내린 결론은 달랐다. “바인레프는 유대인들을 밀고했고, 나치 친위대의 보안 기구인 SD에 협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분열된 삶을 살았던 3인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이들의 삶
“도덕적 판단은 선악의 정도를 따져야”
아시아에 대해 전문적 연구와 저술활동을 해온 이안 부루마는 <부역자: 전쟁, 기만, 생존>에서 사실과 거짓, 엇갈리는 진술과 날조된 증거가 뒤섞인 이들의 삶의 퍼즐 조각을 역사의 파편 속에서 건져올린다. 이들을 독일어로 ‘호흐슈타플러’로 부른다. 사기꾼, 허풍쟁이, 협잡꾼쯤으로 번역되는 호흐슈타플러는 강한 도덕적 질타를 불러일으키면서도 모순투성이의 삶을 산 이들을 일컫는다. 분열된 정체성, 사실과 거짓을 구분하기 어려운 행적, 부역자와 저항자의 경계선에 애매하게 걸쳐 있는 세 사람은 이 말에 들어맞는다. 세 사람의 인생 자체로도 각자 하나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롭지만, 부루마는 단순히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위해 이들의 삶을 복원하지 않았다. 부루마는 그들의 불확실하고 다양한 정체성 속에서 현재와의 연결고리를 찾는다. “나는 극심한 사회 정치적 분열의 시대에 이 책을 쓰고 있다. 개인의 정체성이 점점 더 가변적이고 뒤섞인 형태를 띠는 한편, 집단적인 정체성이 강요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정치적 논의가 있어야 할 자리에 끊임없는 음모론적 상상이 쏟아져 나오고, 사람들은 물리적으로 서로 다른 장소에 살 뿐 아니라 개념적으로도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산다.”
부루마는 이들의 삶에 대해 사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대신 이들에 대한 다양한 증언들과 역사적 사실들을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판단을 맡긴다. “역사를 새로 쓰는 것은 끊임없는 과정”이라는 그의 말과 같이, 세 사람의 삶도 전쟁의 전과 후,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다양하게 변주된다. 서로 다른 사진을 모아 전체 형상을 완성시키는 모자이크 그림처럼 그가 역사의 흔적 속에 찾아낸 조각들을 통해 마침내 전반적인 그림이 완성된다. 그 가운데는 선과 악, 부역과 저항, 사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다. 하지만 선악은 언제나 함께한다는 양비론을 펼치는 건 아니다. “악한 일들이 선한 의도로 행해질 수도, 악한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다. 도덕적 판단은 선악의 정도를 따져야 한다.”
숙친왕의 딸이었지만 일본에 ‘수양딸’로 보내져
남장을 하고 일본 장교와 연인 관계
거짓과 사실이 뒤섞인 삶을 한 분열되고 조각난 삶
세 사람 중 우리에게 가장 친연성이 있는 인물은 가와시마 요시코일 것이다. 같은 동아시아인으로서 일본 제국주의 전쟁에 휘말린 ‘비운의 인물’이다. 숙친왕은 중화민국을 무너뜨리고 청 제국을 되살릴 꿈을 안고, 대동아공영권(사실은 일본이 지배 세력이 되는 것)을 꿈꾸던 가와시마 나니와와 친분을 쌓았다. 숙친왕은 예닐곱에 불과했던 둥전을 가와시마의 ‘수양딸’로 보내면서 이 같은 편지를 보낸다. “자네에게 노리개를 하나 선물로 보내네.” 노리개, 혹은 꼭두각시로서의 삶이 시작되던 순간이었다. 양부와 요시코의 관계는 착취적이었다. 요시코를 개인 비서처럼 부렸을 뿐 아니라 성적으로 착취했다는 증언도 나온다. 요시코는 “내가 이런 고통을 겪는 이유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여자에게 말썽만 일으킨다”란 말을 남기기도 했다. 요시코는 남장 여자로도 유명세를 떨쳤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자 복장을 하며 사교계를 누볐다. 때론 일본 전통 기모노 의상을 입기도 했다. “나는 의사들이 제3의 성에 대한 경향이라고 부르는 것을 갖고 태어났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본 입장에서 청나라 황실의 피가 흐르는 요시코는 선전을 위해 내세우기 좋은 인물이었다. 요시코는 기꺼이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 화려한 춤을 췄다. 하지만 전쟁이 끝으로 향할수록 요시코의 쓸모가 떨어지고, 요시코가 점점 통제불능이 되면서 골칫덩이로 취급받고 버려졌다. 둥전으로 태어나 가와시마 요시코로 살았던 그는 죽기 직전 ‘중국인 반역자 진비후이’가 되었다. 1947년 시작된 재판에서 만주의 중국 영토를 정복하기 위해 사적으로 군대를 조직한 죄, 푸이를 괴뢰국 황제 자리에 앉히도록 도운 죄, 상하이사변을 일으키도록 도운 죄, 중국의 군사기밀을 빼돌린 죄, 일본의 선전 선동 내용을 퍼뜨린 죄, ‘사무라이 정신’에 오염되어 남자 군사 영웅처럼 행동한 죄 등의 혐의로 기소됐다. 놀라운 것은 그 혐의가 대부분 요시코를 소재로 쓰인 소설 <남장의 여인>, 선전 영화 <만몽건국의 여명> 내용에 기반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요시코 스스로 만들어내고 기꺼이 동조했던 신화가 이제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다. 요시코는 총살 형에 처해진다. 하지만 그는 사후에도 자유롭지 못했다. 요시코가 아직 살아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고, 최근까지 일본에서 드라마, 영화, 만화의 소재가 된다.
네덜란드 훈장까지 받은 케르스텐···
전후에도 나치와 관계 유지
영적 지도자 행세 한 바인레프···
“권력과 돈, 성적 욕망을 위해 사람들 밀고”
케르스텐과 바인레프의 경우, 전후 과거청산을 두고 벌어진 사실과 거짓의 치열한 진실게임을 잘 보여준다. 바인레프는 전통 유대교에 지식을 갖춘 학자로서 ‘영적 지도자’ 행세를 하며 추종자들을 만들었다. 허언증에 있어서 그는 요시코 못지 않았다. 요시코가 일본이 그에게 투영한 이미지를 투명하게 받아들였다면, 바인레프는 그 스스로 허구의 세계를 만들어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그는 전쟁 동안 네덜란드인들이 나치에 협조하고, 유대인 학살을 방관했음을 지적하는 등 네덜란드의 반유대주의를 공격하며 오히려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 했다. ‘네덜란드의 드레퓌스’로 불리기도 하고, ‘관료사회의 체 게바라’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은 엉뚱한 데서 드러났다. 그는 ‘유대인 명단’을 만들 때부터 젊은 여성들을 따로 모아 신체검사를 하며 성폭력을 저질렀다. 전후에도 영적 지도자, 학자 행세를 하며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성폭력을 저질렀다. 1970년 네덜란드 정부는 바인레프에 대한 공식 보고서를 의뢰하기로 했고, 6년간의 광범위한 조사 결과 “권력과 돈과 성적 만족에 대한 그의 욕망” 때문에 “사람들을 밀고했고, 나치에 협력하며 심각한 해를 끼쳤다”고 판단한다.
케르스텐도 마찬가지로 영웅시되며 네덜란드 훈장을 받기까지 했다. 그의 회고록의 근거가 된 일기와 자료들은 대부분 전후에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지만, 당시엔 그를 믿는 사람들도 많았다. 케르스텐은 항상 권력자의 충실한 하인이자 심복이었으며, 그들을 마사지해주며 부와 안락을 얻었다. 케르스텐은 네덜란드와 스웨덴, 독일 등에서 상류층 마사지사로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며 히틀러 시절 과거 동료들과의 연도 끊지 않았다.
여자들에게 더 가혹했던 전후 처벌···
나치의 지도자는 살아남고, 소수의 부역자만 처형
성급한 도덕적 판단 대신 의심을 통한 진실을 추구해야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고 노벨상 수상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썼다. 이 말을 거꾸로 뒤집어도 성립한다. “전후의 정의는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가장 약한 부역 행위를 한 이들이 가장 강한 박해를 받았다. 독일군과 동침한 여성들은 성난 군중의 복수 심리에 의해 거리로 끌려나와 머리카락을 잘리고, 오물을 뒤집어쓰고, 폭행당하고, 강간까지 당했다. 세 사람 중 자신의 행동 때문에 처형까지 당한 이는 요시코가 유일하다. 네덜란드의 여성 유대인이며 레즈비언이었던 안스 판데이크는 전후 재판에서 총살당했다.
“이런 극형에 처해진 유일한 여성이 왜 하필 유대인 레즈비언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대량학살에 대한 책임이 있는 나치 지도부의 일부가 살아남던 와중에도, 소수의 부역자만이 사형을 당했다.”
네덜란드인 아버지와 영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저자는 유럽에서 나치가 남긴 흔적들을 보며 자랐다. 저자의 아버지는 전후 특별법원의 변호사였는데, 그 경험으로 인해 성급한 도덕적 판단에 대해 평생 불신을 갖게 됐다고 말한다. “너무나 많은 모호함을 목격한 나머지 빛과 어둠, 선과 악이 언제든 손쉽게 결정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 말은 지금, 여기에도 적용된다. 저자는 미국, 영국 등에서 음모론과 가짜뉴스를 적극 이용한 권위주의적 지도자들이 선출되는 것을 보면서 이 책을 쓸 동기를 얻은 듯하다. “허풍쟁이들과 ‘호흐슈타플러’가 횡행하는 시대”라고 그는 진단한다. 하지만 그는 진실을 손쉽게 포기해선 안 된다고 말한다. 체코의 극작가 바츨라프 하벨의 말을 인용하며 끝을 맺는다. “우리가 믿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라도, 의심을 허용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진실 속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영경 기자 samemin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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