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은 뱃속 벌레'라면서 "한국전쟁=신이 내린 축복"이라고?

2023. 7. 1. 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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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의 전쟁범죄 이야기 26] 망언과 사과, 용서와 화해 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뒤틀린 역사인식으로 말미암아 일본 정치인들은 잊을 만하면 망언들을 내뱉어 왔다. "일본의 전쟁은 침략이 아니며, 식민통치는 한국에게도 이로웠다"느니, "한일병합은 합의 아래 합법적으로 맺어진 것이다"느니, "좁은 의미에서의 위안부 강제 동원은 없었다"는 따위다. 문제는 이런 망언들을 서슴없이 토해내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고 파급력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듣는 사람들은 '또 녹음기를 트는 것이냐'며 흘려버리려 하지만, 그런 망언이 나올 때마다 뭔가 크게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자료를 뒤져보니, 일본인들이 한국을 겨냥해 내뱉은 망언들의 어록은 결코 짧지 않다. 1951년부터 14년 동안의 밀고 당김 끝에 한일기본조약(1965)이 맺어지기까지의 한일회담 과정에서도 일본인들의 망언들이 튀어나왔다. 이른바 '요시다 망언'과 '구보다 망언'이 대표적이다.

"뱃속 벌레를 없애는 것이 한일회담 목적"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9월8일 패전국 일본과 미국을 비롯한 연합국 사이에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맺어졌다. 일본의 반대로 이 회담에 초대받지 못한 한국으로선 일본과 여러 가지 풀어야 할 문제들이 있었다. 미국이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한일회담을 알선했다. 한일 두 나라가 화해하고 힘을 합쳐야 반공전선이 튼튼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한 달 뒤인 1951년 10월20일 예비교섭 형태의 첫회담이 도쿄에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연합군최고사령부(SCAP 또는 GHQ)에서 열린 것도 이와 관련된다.

당시 일본 총리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1878-1967, 총리재임 1946년5월~1947년5월, 1948년10월-1954년12월)는 한일회담 직전에 열린 일본 국회(중의원)에서 '회담의 목적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자, 아무런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망언을 내뱉었다.

"이번 한일회담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일본에 있는 한국인에게 일본 국적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이민족인 소수민족은 뱃속의 벌레다. 일본이 이것(벌레)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한일회담의 목적이다"(한국외교부, <2018 일본 개황> 258쪽. 외교부 홈페이지에서 '2018 일본 개황'으로 검색 가능).

한국전쟁 기간 내내 일본 총리를 지낸 요시다가 누구인가. 외교관 출신으로 1920년대에 만주 심양에서 일본 총영사를 오랫동안 지내며, 만주사변(1931)으로 이어지는 침략의 길을 닦았다. 패전 뒤의 일본을 다룬 역작 <패배를 껴안고>(1999, 번역본은 민음사 2009)로 퓰리처상을 받은 미 역사학자 존 다우어(MIT 명예교수)는 <요시다 시게루와 그 시대>(中公文庫, 1991)에서 1920년대 요시다 총영사의 오만한 태도를 비판했다. "(요시다가 보였던) 중국인에 대한 태도는 공적·사적으로도 손아래 사람에 대한 태도였으며, 이것은 인종적 우월감에 따른 것이었다"고 묘사했다(와카미야 요시부미, <화해와 내셔널리즘> 나남, 2007, 97쪽에서 재인용).
존 다우어에 따르면, 요시다 총영사는 만주사변(1931)이 일어나기 전부터 군사력으로 중국 동북부를 탈취할 것을 주장했다. 1930년대의 요시다는 외무차관을 거쳐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일본대사를 지냈다. 그는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중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비롯한 군부 강경파들을 못 마땅하게 여겼다. 패전이 눈앞으로 다가온 시점인 1945년 4월 일왕 히로히토에게 전쟁 조기 종결을 주장하는 상주문을 올리려다 문제가 돼 짧게나마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한국전쟁은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

패전 뒤 요시다는 그의 영어 능력으로 맥아더 장군의 연합군최고사령부와 일본정부 사이를 잇는 사실상의 연락관 역할을 맡았다. 이런 그의 이력이 점령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긍정적으로 평가됐고, 두 차례에 걸쳐 모두 7년 동안 전후 일본정치를 이끄는 총리 자리에 오른 배경이 됐다. 총리 요시다의 7년 정책을 줄여 말한다면 '외교는 친미, 국방은 (미국에 의존하는) 경무장, 경제 우선'이었다.

요시다에게 한국전쟁은 '축복'으로 여겨졌다. 그를 포함한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전쟁을 가리켜 '구원의 신'(救ひの神) 또는 '가미가제(神風)'라고 반겼다. 이른바 '전쟁 특수(特需)'는 패전 뒤 불황에 허덕이던 일본경제를 되살렸다. 일본은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까진 해마다 3억 달러의 적자를 보이며 불황에 허덕였으나, 1950년 말 경상수지는 4,000만 달러의 흑자로 돌아섰다. 외환보유액도 크게 늘어났다(남기정, <기지국가의 탄생> 서울대출판문화원, 2016, 140쪽).

[요시다 시게루 총리는 한국전쟁이 터졌다는 첫보고를 받고 가미다나(神棚, 집안에 조상신을 모신 제단) 앞으로 가서, "이것이야말로 하늘이 내려주신 축복입니다. 부디 굽어 살펴주시기를..."이라 읊조리며 깊이 머리를 숙였다](니시무라 히데키, <일본에서 싸운 한국전쟁의 날들> 논형, 2020, 155쪽).

정혜경(ARGO인문사회연구소 연구위원)에 따르면, 1945년 8.15 당시 일본에는 모두 200만 명쯤의 한국인이 있었고, 그들 가운데 104만 명은 일제 때 징용 등 강제 동원으로 끌려와 '노예 노동'을 강요당했던 이들이다. 나머지 절반은 일제의 수탈을 견디다 못해 일본으로 건너온 뒤 '저임금 노예'로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정혜경,「식민지시기 조선인의 도일과 강제동원」, <재일코리안 디아스포라의 형성> 선인, 2013 참조).

그런 사정을 모를 리 없는 요시다 총리가 재일 동포들을 가리켜 '뱃속의 벌레'라는 망언을 내뱉을 수 있을까. 한국전쟁을 '하늘이 내린 축복'이라 반겼던 요시다였지만, 재일 한국인을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던) 한반도로 쫓아내려 했다. 일본 국적을 안 주겠다는 것이야 요시다의 권한이겠지만, '뱃속의 벌레'라고 망언은 한 나라의 정치지도자로서 내뱉을 말을 아닐 것이다.

1945년 8월 일본 패전 뒤 재일한국인 다수가 귀국선을 타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인 1950년 9월말 재일 동포 숫자는 55만 명쯤. 이들 가운데 절대 다수인 79.6%가 일본정부의 외국인 등록에서 '한국'(남한)이 아닌 '조선'(북한)으로 자신의 국적을 선택했다(정영환, <해방공간의 재일조선인사> 푸른역사, 2019, 388쪽). 북한 쪽 등록이 많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재일동포들은 8.15 뒤 남한에서 친일파들이 힘을 쓰고 제주 4.3을 비롯한 유혈사태 소식을 들으면서, 정치적 모국을 정하는 데 고민을 했을 것이다.

▲ 1960년 4월 25일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며 거리에 선 교수들 ⓒ연합뉴스

요시다 총리, 맥아더에게 재일 한국인 추방 건의

자료를 뒤져보니, 요시다는 재일 한국인을 추방하려 엄청 애를 많이 썼다. 다나카 히로시가 쓴 <재일 외국인>(이와나미신서, 1995)에 따르면, 요시다는 한국전쟁이 터지기 전인 1949년 맥아더 사령부에 재일 조선인의 모국 송환을 강력히 요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맥아더 기념관(미국 버지니아주 노스폭)에 보관돼 있는 '요시다 서한'에서 관련 내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다.

[미국의 호의에 따라 일본은 대량의 식량을 수입하고 있고 그 일부를 재일 조선인을 부양하기 위해 사용하고 있다. 조선인을 위해 지는 대미 부채 부분을 미래세대에게 지게 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대다수 조선인은 일본경제의 부흥에 전혀 공헌하지 못한다. 더 나쁜 것은 조선인 범죄분자가 큰 비율을 차지한다. 그들은 일본 경제법령의 상습적 위반자들이다](와카미야 요시부미, <화해와 내셔널리즘> 나남, 2007, 100-101쪽에서 재인용).

지금 다시 읽어도 오만과 편견이 가득 찬 편지다. 요시다는 재일 조선인들이 일제 강점기 말에 억지로 일본으로 끌려왔다는 사실을 잊었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맥아더 사령부는 요시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의 요시다 편지를 인용한 와카미야 요시부미(전 아사히신문 정치부장, 논설주간)는 그의 책에서 "식민지 통치가 낳은 산물이라 할 수 있는 재일 한국인에 대해서 조금의 도의적 책임감도 없다"고 요시다를 비판했다. 이어 그는 요시다에게 도의적 책임감이 없는 이유로 "원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죄악감이 (요시다에게) 없기 때문일 것"이라 잘라 말했다.

"조선총독부가 선정했는데 왜 반일, 반일 하나?"

요시다가 일본 강점기 시절의 억압통치와 전쟁범죄에 대해 어떠한 죄의식을 못 느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거는 또 있다. 와카미야 기자가 김동조(전 주일대사, 외무장관)로부터 들은 얘기다. 1965년 한일기본협정이 체결되고 난 다음해인 1966년 요시다가 김동조를 만났을 때, 한국의 반일감정을 못 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불만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내가 1920년대에) 심양 총영사를 할 무렵 자주 조선에 갔었다. 조선총독부가 얼마나 선정(善政)을 베풀고 있는지 총독의 입으로부터 여러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은 왜 그렇게 일본을 싫어해 반일, 반일 하는 것인가"(와카미야 요시부미, 101쪽).

요시다가 말하는 1920년대의 조선 총독은 사이토 마코토(齋藤實, 1858-1936, 총독 재임 1919-1927, 1929-1931)였다. 3.1만세운동 뒤 취임한 사이토 총독은 이른바 '문화통치'란 회유책을 폈지만, 그렇다고 식민지 피지배층인 조선인의 인권을 존중해준 것은 아니다. 기만적인 '문화'로 위장했을 뿐, 본질에서는 폭력적인 억압 통치였기 때문이다.

요시다의 외손자가 2008년 9월부터 1년 동안 일본 총리를 지냈던 아소 다로(麻生太郎)다. 일제 강점기 말에 강요됐던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조선 사람들이 바랐던 것'이라 말하는 등 '망언 제조기'라는 악명을 지녔다('아소 망언록'에 대해선 다음 주에 살펴본다).

한반도에 남겨둔 일본 재산 비밀리에 조사

1945년 8월 패전 뒤 일본은 지난날 식민지로 지배했던 조선과 타이완에 남겨둔 일본인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를 조사하는 작업을 비밀리에 벌였다. 1947년 일본 대장성(한국으로 치면 재경부)은 '재외재산위원회'를 설치했고, 3년 동안 작업을 통해 1950년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라는 이름의 내부 문건을 펴냈다.

문건 작성의 책임자는 스즈키 다케오(도쿄대 교수, 경제학). 일제 강점기 시절에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있으면서, '대륙병참기지론', '경제적 내선(內鮮)일체론', '북선(北鮮) 루트론'을 내세우며 조선총독부의 경제정책 수립에 깊이 관련을 맺었던 자다. 여기서 '북선(北鮮) 루트'란 지역적으로 일본-함경도-만주를 잇는 선을 뜻한다.

고태우(서울대, 한국근현대사)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1932년 괴뢰 만주국 수립을 계기로 일본과 만주를 최단거리로 연결하는 '북선 루트'의 중요성이 떠올랐다. 이에 따라 '북선 3항'(청진, 나진, 웅기)이 포함된 '북선 루트'는 만주-조선-일본으로 이어지는 핵심 유통로가 됐다. 일제는 함경도 일대의 광산자원을 개발하고 대규모 공장(제철소, 제련소, 공작창, 비료공장 등)을 세워, 대륙침략의 병참기지로 삼았다(고태우,「식민지기 북선 개발 인식과 정책의 추이」<한국문화> 2020, no.89).

일본 대장성이 조선 편 10책 분량을 포함해 모두 35책(책 목록을 더하면 36책)에 이르는 방대한 문건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이나 타이완에서 배상을 요구할 경우 그 문건들을 근거 삼아 나름의 반론을 펴기 위해서였다. 아래에 옮긴 글은 조선편 10책 가운데 결론 부분인 <조선 통치의 성격과 실적>에 쓰인 주요 내용이다. 

[일본의 조선 통치가 구미 강국의 식민지 통치보다 심하게 조선인을 착취하고 행복을 유린했다는 논고에 대해선 항변의 여지가 있다고 믿는다. 20세기 초 완전한 독립국으로서 자립할만한 힘이 없던 조선의 상태를 돌아볼 때, 반드시 일본만이 책망을 들어야 할 탐욕스런 팽창정책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중략) 조선경제가 그토록 처참한 상태에서 병합 후 불과 30여 년 사이에 지금과 같은 일대 발전을 이룬 것은 분명 일본이 지도한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재정 면에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보면 (조선에게) 득이다](다카사키 소지, <일본 망언의 계보>, 한울, 2010, 263쪽에서 재인용).

현대 일본 정치인들의 망언을 분석한 역사학자 다카사키 소지(高崎宗司, 쓰다주크대교수, 한일근대사)는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는 따위의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 망언을 위의 대장성 작성 비밀 문건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썼다. 여기서 '일본의 조선에 대한 원조는 정산해보면 (조선에게) 득'이란 무슨 말인가. 일본이 1945년 8월15일 물러나기 전까지 한반도에 투자했던 공장, 부동산, 토지 등의 재산이 (조선이 일제 강점기 동안 입었던 물적 인적 피해보다) 더 많고, 그 뒤 한국 경제발전에 큰 도움이 됐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위 대장성의 비밀 문건은 '식민지 착취를 위한 투자'를 '원조'라는 엉뚱한 용어로 둔갑시켰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필자 이영훈과 고교와 대학(경북고, 서울대 경제학과) 동기인 허수열(전 충남대교수, 경제학)은 "일제 강점기 개발의 이득은 조선인들에게 거의 귀속되지 않았다"면서 '일제 식민통치 덕분에 한국이 근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신친일파의 지론인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은 너무나 잘못된 주장이라고 비판했다(허수열, <개발 없는 개발> 은행나무, 2017. 본 연재 15 참조).

▲ 노태우 대통령이 1992년1월 16일 오후 청와대에서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총리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구보다 망언, "일본 통치는 한국에게 이로웠다"

1953년 10월15일 제3차 한·일회담 때 일본측 수석대표 구보다 간이치로(久保田貫一郞, 1902-1977)도 망언 제조자 명단에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재산 청구권을 둘러싸고 한국 대표인 홍진기(당시 법무차관, 1960년 4.19 당시 내무장관)와 언쟁을 벌였다. 여기서 '재산 청구'란 일본으로선 한반도에 남기고 간 재산에 대한 청구, 한국으로선 일제 강점기 동안에 입었던 피해에 대한 청구를 가리킨다.

홍진기는 '일본의 재산은 미군정 법령 33호에 따라 접수됐다'는 근거를 내세우며 일본의 재산청구권을 거부했다. 그는 이어 "한국이 일본에 점령당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인은 스스로 근대국가를 만들었을 것"이라면서, 일제 강점기 동안 한민족이 받은 피해에 대해 언급했다. 일본인들이 걸핏하면 내세우고 이즈음 한국의 신친일파들이 신앙처럼 받드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거부하는 홍진기의 말에 흥분했을까, 구보다는 자신의 평소 속내를 드러냈다.

"일본도 보상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왜냐하면 일본은 35년 동안 (한반도의) 산을 푸르게 바꾸었다던가, 철도를 부설했다던지, 논을 개간했다던지, 많은 이익을 한국인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 한국은 다른 국가(중국이나 러시아)에게 점령되어 더 비참한 상태에 빠졌을지도 모른다. 한국 민족이 노예 상태라고 말한 '카이로 선언'(1943년 11월27일 연합국 지도자들의 선언)은 연합국의 전시(戰時) '히스테리'의 표현이다. 일본의 36년 한국 통치는 한국인에게 유익하였다"(오오타 오사무, <한일교섭 청구권문제 연구> 선인, 2008,148-149쪽).

이즈음 일본의 교과서들은 '침략'이란 용어를 쓰지 않고 '진출'이라 하는 묘한 단어를 쓴다(역사교과서 문제를 다룬 본 연재 21 참조). 70년 전 구보다가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하지 않았더라면...'이라 했던 말도 같은 맥락이다. '구보다 망언'(일본쪽 용어로는 '구보다 발언')이 알려지자, 당시 변영태 외무장관은 "(일본이) 한국을 모욕하는 발언을 공공연히 하는 것은 그들의 한국침략에 대한 근성을 아직 청산하지 않는 데 원인이 있을 것"이라 비난했다.

하지만 일본은 '구보다 발언'을 지지했다. 오카자키 가츠오(岡崎勝男) 외무상은 중의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런 잘못된 주장을 하지 않았으며 사과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이는 앞에서 살펴본 대장성의 비밀 문건 <일본인의 해외활동에 대한 역사적 조사>(1950)와 맥락을 같이하는 주장이었다. 오카자키 외상의 이런 발언으로 '구보다 망언'이 사적인 돌출 발언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입장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망언의 파장은 컸다. 한일회담은 결렬됐고, 그 뒤로 4년 동안 회담은 열리지 않았다.

'구보다 망언'이 지닌 의미는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눈여겨보는 대목이다. 다카사키 교수는 △1910년 한일병합이 (협박으로 강제된 것이 아니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가 원만한 합의로 이루어졌고, △'한국을 근대화시켰다는 점에서 일본이 좋은 일도 했다'는 따위의 망원들의 원형(原形)이 다름 아닌 '구보다 망언'이라 본다(다카사키 소지, <일본 망언의 계보>, 한울, 2010, 210-233쪽 참조).

다까쓰기, "20년쯤 더 조선이 日식민지였다면 좋았다"

1965년 6월22일에 맺어진 한일기본조약은 1951년 이래 5차례에 걸친 회담의 종착역이다. 박정희 정권의 회담 실무자들을 만나면서도 일본 쪽에선 녹음기를 틀어놓은 듯 또 망언을 내뱉었다. 한일회담 일본쪽 수석대표인 다까쓰기 신이치(高杉晋一)는 1965년 1월 기자들에게 했던 말을 들어보자.

"일본이 과거 식민지 통치에 대해 한국에게 사과하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일본으로서 할 말이 없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한국의 산에는 나무가 한 그루도 없다고 한다. 이는 조선이 일본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 20년쯤 더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었더라면 그렇게 되진 않았을 것이다. 20년쯤 더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였다면 좋을 것이다. 일본이 사과해야 한다는 이야기는 타당하지 않다. 창씨개명(創氏改名)도 조선인을 동화시켜 일본인과 같이 대하려고 했던 조처였다"(다카사키 소지, 236쪽).

한반도의 산에 나무가 없는 주요한 원인이 6.25 한국전쟁 때문이라는 것을 다까쓰기는 모르는 것일까. 그는 창씨개명에 대해서도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1940년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명분을 내걸고 조선어를 못 쓰게 하고 우리 고유 이름조차 일본식으로 바꾸라고 윽박질렀던 것은 전형적인 민족 말살정책으로 비판 받아 마땅했다. 회담을 앞둔 정부 대표가 멀쩡한 정신으로 그런 정책을 미화하는 궤변을 기자들 앞에서 늘어놓을 수 있을까 싶다.

다까쓰기의 망언을 옆에서 듣고 있던 일본 외무성 간부는 한일회담에 미칠 영향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간부로부터 귓속말로 걱정을 전해들은 다까쓰기는 뒤늦게 기자들에게 '오프 더 레코드'(비보도) 요청을 했다. 하지만 이미 내뱉은 망언을 쓸어 담을 수는 없었다. 일본공산당 기관지 <아카하다>(赤旗)에 발언 요지가 실렸다. <아카하다>는 대중적인 매체가 아니어서 '다까쓰기 망언'이 널리 알려지진 않았다. 한국 언론에까지 보도된다면, '구보다 망언'으로 비롯된 1950년대 한일회담 파행 판박이가 될 수도 있었다. 한국 기자로부터 그 망언을 전해들은 한국측 수석대표 김동조의 회고담을 들어보자.

"나는 그 오만불손한 방언(放言)에 먼저 아연실색했다. 이런 사실이 보도될 경우 한일회담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메가톤급 망언이 터지는 날에는 (1950년대의 구보다 망언 때와 마찬가지로) 한일회담이 수년간 더 지연될 것은 필지의 상황이 아닌가"(김동조, '한일회담' 249회, <중앙일보> 1984년 6월27일).

회담 깨지 않으려고 망언 서둘러 수습

한일 양국의 실무진들은 다까쓰기 수석의 망언이 지난날의 '구보다 망언'과 같은 파란을 일으킬 가능성을 걱정했다. 한일 양국의 실무진들이 애를 쓴 끝에 다까쓰기는 다시 기자들을 만났다. 그가 또 속내를 털어놓고 실언을 할까 걱정한 일본 외무성이 써준 해명발언 메모를 들고서였다. 다까쓰기는 그 메모대로 "일본은 지난날 조선 지배가 한국민의 마음에 상처가 되고 있는 데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한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읊조렸다.

박정희 정권으로선 한일회담을 통해 일본의 자금 지원(무상 3억 달러, 차관 2억 달러)을 받아 경제발전의 밑천으로 쓰고자 했다. 국내에서 '대일 굴욕 외교'라고 비판의 목소리가 컸지만, 밀어붙였다. 일본도 한일회담 성공을 바랬다. 1964년 11월에 출범한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내각은 국교 정상화로 투자와 무역, 그리고 대미관계에서 실리를 챙기려 했다. 베트남전쟁에 깊숙이 개입하기 시작하던 린든 존슨 미 대통령도 한일관계 개선을 바랐다. 한일회담 성공이 베트남전쟁과 관련해서도 도움 되기에, 미국은 뒤에서 사사건건 개입했다. 한일회담을 깨는 일은 없어야 했다. 다까쓰기 망언을 서둘러 수습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일회담을 무조건 성사시킨다는 한미일 3국의 조급함 탓에, 민감한 사안들은 그냥 묻혀버렸다.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의 무효시점을 언제로 볼 것인가(한국은 1965년 시점이 아닌 1910년 시점에서 무효라는 입장이지만, 일본은 1965년이라 주장), △독도를 한국이 실효 지배하는 상황에서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더 이상 주장하지 않을 것인가, △다른 무엇보다, 일제 강점기의 전쟁범죄와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이다. 이런 사안들을 묻어둔 채 조약을 맺었기에 갈등의 불씨를 남겼고, 지금껏 논란이 이어지는 중이다.

▲ 1959년 8월 11일, 우리정부가 제의해 열리게 된 한일회담에 참석할 한국대표단(단장 허정)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했다. 보상금액 및 독도 문제 등이 주요 현안이었다. ⓒ연합뉴스

시나 외무, "조선합병은 영광스러운 제국주의"

한일기본조약(1965)을 맺을 때 이동원 외무장관의 맞상대였던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悦三郎, 1898-1979) 외무의 역사인식도 위의 다까쓰기와 똑 같았다. 일제 말기에 상공 차관, 군수성 육군 사정 장관 겸 총동원 국장을 지낸 전력을 지닌 그는 '조선합병을 제국주의라고 한다면, 영광스러운 제국주의'라는 망언을 남겼다. 1963년 그가 쓴 책 <동화와 정치>에서다.

"일본이 강대한 서구 제국주의의 이빨로부터 아시아를 지키고 일본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대만을 경영하고 조선을 합방하며 만주에 오족공화(五族共和)의 꿈을 건 것이 일본제국주의라 한다면, 그것은 영광의 제국주의다"(다카사키 소지, 239쪽에서 재인용).

그런 시나 외무가 '다까쓰기 망언' 한 달 뒤인 1965년 2월 한일기본조약 가조인을 하려고 김포공항에 내렸을 때는 "일한 양국의 오랜 역사 가운데 불행한 기간이 있었던 것은 매우 유감으로,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 그가 2년 앞서 책에서 썼던 '영광의 제국주의론'에 비춰보면, 일본인들이 흔히 뻔한 상투적인 말을 할 때 쓰는 표현인 '키마리몽쿠'(決まり文句)나 다름이 없는 사과였다.

'온 세상을 일본이 다스린다'는 팔굉일우 궤변

한일기본조약 체결 때 일본 총리였던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1901-1975, 총리재임 1964-1972)의 역사인식도 앞의 두 사람(다까쓰기, 시나)과 다를 바 없다. 도쿄제국대학 출신인 사토는 일제 강점기 시절엔 철도성(한국의 철도청) 고위 간부를 지냈다. 시나가 '영광의 제국주의론'을 펼치기 1년 전인 1962년 사토가 통상장관으로 있을 때, 지금은 폐간되고 없는 일본 월간지 <민족과 정치>(民族と政治)에서 밝힌 그의 신념은 이러했다.

"(1945년) 패전 뒤에는 팔굉일우(八紘一宇)가 제국주의의 표현이라거나 침략주의의 다른 이름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아무래도 팔굉일우는 제국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세계일가(世界一家)나 인류애 사상에 연결되는 숭고한 의미가 아닌가 생각한다"(<民族と政治> 1962년 1월호).

여기서 '팔굉'이란 천지를 잇는 여덟 개의 밧줄, 즉 전세계를 뜻한다. '일우'는 한 지붕을 뜻한다. <일본서기>(日本書記, 서기 720년)에 이 말이 나온다. 일본의 초대 국왕 진무(神武)가 일본 열도를 하나로 통일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팔굉을 덮어 집으로 삼는 것이 좋지 아니한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따라서 팔굉일우는 '온 세상을 일본 국왕의 지배 아래에 둔다'는 뜻을 지닌 황도주의적 용어다.

일제 강점기 시절에 군국주의자들과 조선의 친일파 지식인들이 입에 달고 살던 어휘가 팔굉일우였다. 이를테면, 친일문학가 주요한이 창씨개명한 이름은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여기서 '고이치'는 팔괭일우에서 따왔다고 한다. <일본서기>는 일본의 역사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정사(正史)라고 일본인들은 믿지만, 한국의 민족사학자들은 사서(史書)가 아니라 사서(詐書)라 여긴다. 일본 관변 사학자들이 손을 댄 위서(僞書)라는 의심을 받는다.

'팔굉일우론'에 따르면,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당연하다. 일본의 침략전쟁을 황도주의에 연결시켜 합리화하고 미화한다면, 침략이니 전쟁범죄니 하는 용어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한일기본조약 체결 5개월 뒤(1965년 11월), 일본국회 중의원 한일특별위원회에서 야당인 사회당 소속 의원이 "1910년에 체결된 병합조약이 대등한 입장에서 자주적으로 체결된 것이라 생각하느냐?"고 묻자, 사토 총리가 서슴없이 "그렇다"고 답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사토뿐 아니다. 일본 정치인의 입에서 과거사에 대한 진정성 담긴 '반성'이나 '사과'는 드물다. 다음 주 토요일엔 한일회담 뒤부터 현재까지의 주요 망언을 다룰 참이다. 특히 1990년 이후 일본이 사과와 망언을 오가며 냈던 불협화음이 지닌 문제점, 망언이 그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 등을 독자들과 함께 살펴보려 한다.(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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