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가격 폭등으로 한국인의 매운맛 ‘소울 푸드’가 탄생했다고? [김기철의 역사를 바꾼 사물들]
[역사를 바꾼 사물들3] 최근 국내 천일염 가격이 폭등했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를 앞두고 불안감을 느낀 소비자들이 미리 천일염을 사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불안감을 노린 일부 유통업자들의 사재기도 소금 가격 폭등을 부추겼다.
이런 사태는 소금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물질인지를 말해준다. 역사를 살펴봐도 소금이 민란과 폭동의 원인이 된 경우가 많다. 국가간 전쟁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김치에 고춧가루가 들어가고 한국인들이 매운맛에 중독되기 시작한 것도 소금 가격 폭등 때문이었다.(이 이야기는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최사장(허준호) 일당은 악날한 사채업자 김명길(박성웅)의 부하 임정도(하수호)를 붙잡아서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을 한다. 고문 방법이 허벅지에 상처를 내고 그 위에 물에 녹인 소금을 얹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삼투압 현상으로 속살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며 평소에는 겉피부로 보호받고 있던 약한 세포들이 산채로 절여지게 되기 때문에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상처에 소금 뿌리기’라는 말이 그냥 생긴 것은 아니다.
또 다른 장면. 김명길 일당이 몰래 탄 마약을 마신 민강용(최영준)이 몸에 이상 반응이 나타나자 소금통을 찾아서 입에 소금을 한 웅큼 집어 넣는다. 그러자 구토가 일어나고 마약이 몸 밖으로 빠져 나오면서 해독이 된다.
소금은 몸속에서 소화와 호흡을 돕는다. 인간의 몸은 나트륨을 자체적으로 생산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트륨을 외부에서 공급해 주지 못하면 영양분이나 산소를 운반할 수 없고, 신경자극을 전송할 수 없게 된다. 성인의 몸 속에는 약 250g의 염분을 지니고 있다. 신체 활동을 하면 자연스럽게 염분이 빠져나가기 때문에 반드시 소금을 공급해 줘야 한다. 땀과 눈물이 짠 이유가 있다.
사실 수렵사회에서는 인간이 따로 소금을 먹을 필요가 없었다. 인체에 필요한 염분은 육식, 특히 동물의 피를 통해서도 충분이 공급됐기 때문이다. 인류가 농경을 시작하면서 소금은 따로 섭취해야 하는 소중한 자원이 됐다. 그러니까 소금의 역사는 인류의 문명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인류 문명의 발상지가 모두 소금을 얻기 쉬운 곳이라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최초의 경제학자’라고도 불리는 관중은 좋은 정치의 핵심이 ‘경제’에 있다고 생각했다. 농업 생산을 늘리기 위해서 농민들에게 세율을 낮춰주었고 풍년기에 곡식 가격이 폭락하면 나라에서 대신 사주었다가 흉년에 저렴한 가격에 시장에 내놓았다. 관중은 또 상인들이 유통을 통해서 얻는 정당한 이윤을 인정했고 이를 통해 상업를 장려했다.
그렇다면 백성들을 위해 낮춰진 세율로 구멍이 난 나라의 재정은 어떻게 할 것인가? 관중은 ‘국가가 가진 무기는 소금, 철, 곡식’이라고 생각했다. <관자> ‘해왕’ 편에는 관중이 환공과 나눈 대화가 나온다. 주로 환공이 묻고 관중이 답했다.
“건물에 세금을 매기려 하는데 어떻습니까?”“그럼 집을 헐게 됩니다.”“나무에 세금을 징수하면요?”“나무를 베겠지요.”“가축들에 징수하면요?”“새끼들을 죽일 겁니다.”“이니두세를 징수하려는데 이는 어떨까요?”“아이를 낳지 않아 인구가 줄어들 것입니다.”“그렇다면 어떻게 나라를 위할 수 있을까요?”“오직 산과 바다를 관리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전국시대를 통일한 진시황은 ‘관중’의 주장을 받아들여 소금과 철의 전매제를 실시했다. 특히 소금 독점을 통한 염세 수입은 군대 양성과 흉노족을 막기 위한 만리장성 건설에 사용됐다.
지난 2019년 중국 국무원은 ‘염업체제개혁방안’을 발표하고 식염생산업자가 생산량을 직접 결정하고 유통·판매시장에 진출해 자체 브랜드의 소금을 판매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그전까지 소금을 생산, 판매하려는 중국 기업은 국가의 승인을 받아야 했고, 생산량도 국가가 정해준 쿼터를 초과할 수 없었다. 또 소금 생산업자는 정부가 지정한 유통업자에게만 판매할 수 있다.
기원전 7세기 관중이 주장했던 소금의 국가 관리체제가 2700년만에 막을 내린 셈이다.
기원전 81년 한나라 왕실에서는 뜨거운 경제 논쟁이 불붙었다. 국가의 철과 소금 전매사업을 지속할 것인가 아니면 폐기할 것인가.
상홍양이 이끄는 국가주의적 전략가들은 세수를 늘려 국가 활동과 군사 작전의 비용을 해결하고자 했고, 그 수단으로 소금과 철의 전매를 주장했다. 물론 그 이면에는 소금과 철을 이용해서 지방 권력 가문들의 독립성을 제한하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도 숨어 있었다.
상홍양은 주장했다.
“이제 당신들은 이를 폐지하려 하는데, 이는 재정의 원천을 끊고 재원의 흐름을 막자 함이니, 국가와 백성 모두 재정이 고갈돼 궁핍함이 닥치게 될 것인즉, 비록 일을 줄이고 비용을 절약함이 아무리 좋다 한들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상홍양의 주장에 문인들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불필요한 관청과 급하지 않은 공사와 유행 따라 사치한 옷을 입는 사람들과 공이 없으면서도 국가의 녹을 받아 입고 먹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고 백성들이 궁핍한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중국정치사상사>에서 “양측의 서로 다른 정책 내용을 결정한 핵심 요인은 흉노라는 강력한 타자의 존재였다”며 “흉노와의 대결 상황은 중국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들은 양편으로 갈라서서 거대한 제국체제 내에서 중앙정부의 역할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논의한 것”이고 “양측의 입장은 시대가 바뀌면서 후대에 다양하게 전승되었는데, 둘 중 어느 한 입장이 완전히 패배하여 사라지는 법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한나라 때의 경제논쟁, 염철론은 20세기 세계 경제학계에서 벌어진 ‘케인즈학파VS신고전주의’의 논쟁과 닮았다.
적극적인 재정확대를 주장한 케인즈학파가 전매사업을 통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주장한 법가와 궤를 같이 한다면 정부의 시장개입을 줄일 것을 주장한 신고전주의는 유가의 전통과 맞닿아 있는 셈이다.
아무튼 2000년전에 이런 수준높은 경제 논쟁을 벌일 만큼 소금은 국가 재정의 핵심 요소였다.
로마 제국은 병사들에게 급료를 때때로 소금(salt)으로 주었는데 여기서 월급을 의미하는 단어 샐러리(salary)가 나왔고, 급료를 받는 병사들을 가리키는 단어 솔져(soldier)도 나왔다. 샐러드(salad)도 야채를 소금에 절여서 먹는 로마인의 습관에서 나왔고 염장 소시지인 살라미(salami) 역시 소금에 어원을 두고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로마 제국은 제국 통치를 위해서 도로를 정비했다. 로마를 상징하는 그 도로가 원래는 소금 수송을 위해 건설됐다. 로마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생산하는 소금에 의지하지 않기 위해서 오스티아 지역에 직접 제염소를 세웠다. 이 오스티아 소금을 로마는 물론 반도 내륙으로 나르기 위해 최초의 로마 도로인 소금가도, 즉 살라리아 가도(Via Salaria)를 건설한 것이다.
이후 제국이 확대되고 로마제국 내에 제염소가 60곳 이상으로 늘어나면서 소금가도는 더욱 확대됐고 이것이 로마제국의 주요 교통망으로 자리를 잡게 됐다.
1269년 중국 여행을 마치고 베네치아로 돌아온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동방견문록>을 펴낸다. <동방견문록>에 마르코 폴로는 중국에서 본 소금 이야기를 많이 담았다. 소금이 너무 깨끗해서 그저 깎아내기만 하면 되는 ‘소금언덕’으로 여행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동화처럼 묘사했다. 또 황제가 카라잔 지방의 소금못에서 세입을 얻는 방법과 찬글리에서 소금으로 국가와 백성이 이문을 남기는 방법, 황제가 소금으로 거둬들이는 국가 세입의 규모도 자세하게 기록했다.
마르코 폴로로서는 소금 얘기를 많이 쓰는 것이 당연했다. 그의 책을 읽을 독자들이 주로 베네치아의 상인들이고 가장 많은 상인들이 소금 무역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가 흥미로워할 주제를 주로 쓰는 법이다. 또 마르코 폴로가 책을 펴낸 동기들 중에는 베네치아와 지중해의 소금 무역에 대한 통제를 확대하도록 베네치아 정부를 자극하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만큼 소금 산업은 베네치아의 핵심 산업이었다. 1281년부터 베네치아 정부는 다른 지역에서 소금을 싣고 베네치아에 도착하는 상인들에게 장려금을 지급했다. 소금을 싣고 베네치아로 오면 이문이 더 많이 남기 때문에 상인들은 다른 물건들의 운임료도 낮출 수 있었다. 또 소금 판매 수익으로 부유해진 베네치아 정부는 융자를 통해 다른 무역을 지원할 수 있어서 향신료와 도자기, 곡물 무역도 번성했다. 14~16세기 베네치아는 무역이 가장 번성한 유럽의 항구였지만 소금은 수입품 총량의 30~50%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위상을 유지했습니다.
소금 무역을 기반으로 하는 베네치아는 상거래가 발달하면서 회계, 은행 등 관련 분야 혁신과 표준화를 이끌었다. 오늘날에도 사용하는 복식부기는 14세기 베네치아에서 발명돼 이를 ‘베네치아 방식’이라고 불렀다. 은행 장부에 입출금을 기입하면 다른 지점 계좌에서 가감하는 환어음 방식으로 돈을 찾을 수 있는 근대적 의미의 은행도 베네치아에서 시작됐다.
상공업의 번성은 문화의 번성을 가져왔고 그렇게 해서 르네상스가 태동했다. 르네상스 미술이 피렌체와 베네치아에서 시작됐다. 피렌체가 원근법을 통해 회화의 혁신을 이루었다면 베네치아 미술은 ‘색채 혁명’을 일으켰다. 무역이 번성하고 부유하고 막강한 경제력으로 진귀한 안료가 베네치아로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베네치아 회화 색채 표현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조반니 벨리니가 그린 산 자라키라 성당의 제단화이다.
포문은 세종 19년(1437년) 신개가 먼저 열었다.
“소금은 관에서 주관해야 합니다. 관에서 굽는 소금을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사염(私鹽)은 금지시켜야 합니다. 또 선군(船軍)과 공천(公賤)으로 하여금 관에서 소금 굽는 일을 돕게 해야 합니다.”
세종 27년 신개의 주장에 따라 소금 생산을 맡을 의염색(義鹽色)이라는 관청을 설치한다. 그러자 이계전은 소금 전매의 폐단을 지적하는 긴 상소를 올린다.
“우리나라는 3면이 바다라서 염간(鹽干•소금 굽는 백성)이 생산한 소금으로도 충분한데 관가까지 나서서 소금을 굽게 되면 산출량이 급격히 늘어나 백성들에게 억지로 소금을 분배하게 될 것입니다. 고금에 이권이 백성에게 있지 않으면 관가에 있고, 관가에 있지 않으면 백성에게 있는 것이온데, 관과 사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종은 의염색을 혁파했고 이후 조선은 주로 염찰사를 파견해 필요한 공물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소금 생산을 관리했다.
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잘 관리되던 조선의 소금 가격이 18세기 들어 폭등하기 시작했다. 소금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2가지로 꼽힌다. 우선 이앙법이 보편화되고 전국적으로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쌀 생산이 급증했다. 쌀 생산력 증가로 밥 소비량이 늘면서 반찬에 사용되는 소금에 대한 수요가 덩달아 늘었다. 당시 반찬으로 먹는 김치는 무나 배추를 소금물에 절이는 형태였다.
둘째 17세기 이후 향교와 서원의 급격한 증가로 소금 사용량이 증가했다. 서원과 향교는 향촌사회에 유교를 기반으로 한 각종 의례를 보급하는 역할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제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주요 제사 음식 중 생선 등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금을 많이 쓰게 된 것이다.
백성들에게는 소금 사용을 줄일 수 있는 대체 양념이 필요했다. 이때 눈에 띈 것이 바로 고추였다.
아메리카 신대륙 발견 이후 구대륙에 소개된 고추는 16세기 이후 국내에 소개된다. 1614년 편찬된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따르면 고추는 일본에서 온 것이라 하여 ‘왜개자(倭芥子)’라 표현되어 있다.
18세기 전까지 고추가 식재료로 크게 관심을 받지 못하다가 18세기 소금 가격이 급등하자 소금의 대체재로 부상하게 됐다. 대표적으로 소금물을 사용한 절임음식이었던 김치에 고춧가루가 사용되게 됐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자신의 저서 <음식인문학>에서 우리 식탁을 고추가 점령하게 된 배경에는 조선 후기의 사회•문화적 변화에 따라 소금 수요가 폭증하고 가격이 올랐던 원인이 작용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니까 고춧가루 양념이 버무려진 빨간색 김치, 한국인이 생각하는 김치의 원형은 소금가격 폭등의 부산물이었다. 이후 한국인은 중독 수준으로 매운 맛을 사랑하게 됐다.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을 일으켰던 황소는 소금을 밀매하던 소금 상인이었다. 당나라 조정의 전매제로 소금값이 급등하자 자연스럽게 암거래가 생겨났다. 당 조정은 이들을 추적해서 사형시키는 등 가혹하게 대응했고 소금 밀매조직들은 더 적극적으로 자위책을 찾게 됐다. 그 결과 무장 봉기까지 발생한 것이다.
프랑스 혁명이 발발한 여러 이유 중 하나도 ‘가벨(gabelle)’이라고 하는 소금 세금이었다. 프랑스 정부는 소금세를 지나치게 많이 부과해서 1710년 소금가격이 생산비의 140배까지 치솟았다. 특히 귀족들에세는 가벨을 면제해주고 일반 민중들에게는 과도하게 부과했다. 가벨은 단순한 소금 세금이 아니었다. 왕이 정한 가격대로 모든 시민들은 일주일에 한번씩 의무적으로 소금을 사야했다. 왕은 자기 마음대로 가벨의 세율과 할당량을 올릴 수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불만들이 프랑스혁명을 통해 폭발했다. 가벨은 프랑스혁명 중인 1790년 폐지됐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군비 마련을 위해 다시 부과됐고 1946년 최종 폐지됐다.
1893년 영국 정부는 인도에서의 소금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원래 영국은 식민지 인도의 카르타치에 소금 공장을 지었다. 카르타치산 값싸고 질좋은 소금이 영국으로 들어오자 영국산 소금이 경쟁력을 잃었다. 그러자 영국은 자국 소금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인도에서의 소금 생산을 전면 금지시킨 것이다.
대신 영국에서 수입한 소금에 50%의 높은 세금을 붙여 인도에 팔았다. 눈 앞에 바다가 있어도 소금을 생산할 수 없고, 영국에서 수입한 소금은 너무 비싸서 가난한 인도인들은 소금을 제대로 섭취할 수가 없었다
1930년 3월 2일, 간디는 인도 총독에게 편지를 썼다.
“당신이 이런 죄악을 다룰 생각이 없고 내 편지에도 마음이 움직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이 달 12일에 세바그람(Sevagram)에 있는 동료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소금에 대한 법을 위반할 생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세금은 가장 사악한 것이지요. 독립 운동은 근본적으로 이 땅의 가난한 이들을 위한 것이므로, 그 불발점은 이런 죄악을 해결하는 데 있을 겁니다. 오랫동안 이런 잔혹한 독점에 굴복한 우리 자신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1930년 3월 12일, 간디와 78명의 추종자들이 세바그람에서 단디 해변에 이르는 440km의 대장정에 올랐다. 바닷가에 도착해 바닷물로 소금을 만드는 방식으로 영국 정부의 법을 위반할 생각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22km씩 비포장길을 따라 걸었다. 맨 앞에는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깡마른 간디가 있었다. 간디가 단디 해변에 도착했을 때 78명이던 추종자는 수천만명으로 불어나 있었다. 간디가 이끌었던 이 장엄한 저항으로 소금세는 1931년 폐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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