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그린 싱가포르]② ‘지속가능성의 눈’으로 싱가포르 거래소 이끄는 한국인 CSO
투자은행 ING에서 인수합병 전문가로 활약
무작정 떠난 아마존 여행 통해 방향 재설정
2019년 홍콩에서 벌어진 민주화 시위는 라이벌 싱가포르와의 아시아 금융허브 경쟁에서 우위에 있던 홍콩의 위상에 큰 타격을 입혔다. 친중(親中) 홍콩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일대 혼란이 빚어지면서 홍콩을 거점으로 아시아 사업에 주력했던 글로벌 기업과 투자금의 ‘헥시트(HKexit·탈홍콩)’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안전하고 사업하기 좋은 곳’이란 이미지가 강했던 싱가포르는 홍콩의 혼란으로 반사이익을 톡톡히 누렸다. 홍콩을 떠나 싱가포르에 둥지를 트는 중국 본토 자본과 인력도 급증했다. 일례로 싱가포르 기반 패밀리 오피스(고액자산가 대상 자산 관리 회사) 수는 2018년 약 50개에서 2021년 말까지 약 700개로 증가했다. 이 중 약 40%가 중국 본토인의 자산을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싱가포르 통화청(MAS)에 따르면 2021년 싱가포르의 자산 관리 유입액은 전년보다 15.7% 증가한 4480억 싱가포르 달러(약 436조2600원)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홍콩 자산관리 유입액은 1조5140억 홍콩달러(약 254조5500억원) 수준이었다.
이 같은 변화의 영향으로 싱가포르는 지난해 영국의 싱크탱크 Z/Yen 파트너스와 중국 종합개발연구원(CDI)이 공동 조사해 발표한 글로벌 금융센터 지수 순위에서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 최고 금융허브에 등극했다. 글로벌 순위는 뉴욕, 런던에 이은 3위였다.
그렇다고 싱가포르가 가만히 앉아서 반사이익만 누린 건 아니다. 싱가포르 정부는 안전하고 비즈니스 친화적인 장점을 최대한 지속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싱가포르거래소(SGX)가 지속가능금융 등 지속가능성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직책을 만든 것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다.
2021년 2월 취임한 SGX의 초대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CSO)는 한국인 조혜리(40) 전무다. 서울에서 태어난 조 전무는 부친이 해외 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영국과 폴란드에서 중고교 시절을 보냈다. 이후 영국 옥스퍼드대와 동대학 대학원에서 생화학을 공부한 그는 네덜란드계 글로벌 투자은행 ING에 입사해 런던과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인수합병(M&A) 전문가로 활약했다.
각국 거래소들 중에는 자체 조직이나 상품 관련 지속가능성 이슈를 담당하는 직책을 둔 곳이 있긴 하지만, SGX의 경우처럼 정책과 운영 등 업무 전반을 지속가능성의 렌즈로 들여다보는 최고경영자(CEO) 직속 총괄 포지션을 운영하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SGX가 관련 이슈에 진심이라는 뜻도 된다.
지난달 22일 싱가포르 도심 한복판 ‘다운타운’ 지하철(MRT)역과 인접한 SGX 본사 라운지에서 조 전무를 만났다. 어린 시절부터 오랜 시간을 해외에서 보냈는데도 간혹 의미 전달을 분명히 하기 위해 영어를 섞어 쓰는 정도 외에는 우리말 대화가 어색한 느낌은 없었다. 때론 전쟁을 방불케 할 만큼 경쟁이 치열한 글로벌 M&A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라는 걸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온화한 인상과 차분한 말투도 인상적이었다.
SGX는 1999년 12월 1일 싱가포르증권거래소(SES), 싱가포르국제통화거래소(SIMEX), 싱가포르증권청산소(SCCS)가 합병하면서 출범했다. SGX는 아시아 금융허브 싱가포르 거래소 답게 해외사업 확장에도 적극적이다. 2016년 영국 런던에 있는 발틱해운거래소을 인수하여 자회사로 두고 있다. 800곳에 육박하는 상장기업 중 약 40%는 해외기업이다.
SGX의 최고지속가능성책임자는 어떤 일을 하나요.
“SGX 전체의 목표와 실행 전략, 관련 규제 등을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바라보고 고민합니다. 다양한 업무 조직과 여러 해 동안 꾸준히 협력해야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이기도 합니다.”
CEO에게 직접 보고하는 위치라는 점도 의미가 있어 보입니다. SGX가 지속가능성 이슈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방증인 것 같기도 합니다.
“매우 드문 경우이긴 합니다. 보통은 CEO와 CSO 간 보고체계에 전략과 비즈니스, 재무, 마케팅 등 다른 분야의 최고 책임자가 하나둘씩 끼어있거든요. 투자은행 시절 수많은 기업과 투자자를 접하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기업 안에서 지속가능성 이슈를 맡아 의미있는 진전을 이루려면 최고 의사결정권자와 긴밀한 소통은 필수라는 점입니다.”
한때 투자은행에서 M&A 전문가로 활약 했는데, 방향을 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당시에도 고객을 돕는 보람과 성취감은 컸는데 장기적인 목표의식 이랄까, 그런게 좀 부족했던 것 같아요. 목표의식에 대한 고민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졌고, 결국 그걸 찾기 위해 어느날 사표를 냈어요.”
회사에선 뭐라고 하던가요.
“사표를 수리하는 대신 쉬다가 오라고 하더군요. 무급 휴직이었지만 6개월 뒤에 다시 돌아오면 자리를 찾아주겠다고 했고요. 그 시간 동안 저의 목표를 찾은거죠.”
무슨 일이 있었나요.
“무작정 중남미로 여행을 떠났어요. 인생의 목표를 찾는 게 유일한 목표였죠. 쿠바의 수도 아바나 거리에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하고, 해변에서 노래도 부르고 다이빙도 하면서 모처럼의 자유와 재충전의 시간을 만끽했어요. 그러다 아마존 정글 깊은 곳을 탐험했는데 열대우림 한복판에서 검은 연기가 고층빌딩 만큼 높이 치솟아 기둥을 이루고 있는 걸 보게 됐어요. 깜짝 놀라서 ‘저게 뭐냐’고 물으니 ‘산업 현장’이라고 얼버무렸어요. 뭔가 굉장히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예전에 물이 풍부했던 곳이 사막으로 변한 현장도 봤고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었습니다.”
회사나 업무는 달라진 게 없었을 것 같은데요.
“제가 달라졌다는 게 중요합니다. 여행을 통해 용기를 얻었기 때문에 (싱가포르에 있는 ING 아태본부) 회장님을 찾아가서 ‘(지속가능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뭔가 해야한다’고 설득하는 것도 두렵지 않았어요(웃음). 당시 회장님도 생각이 열린 분이라 제 이야기를 듣고 ‘그럼 한번 전략을 짜보라’고 격려해 주셨어요. 그래서 지속가능금융 관련 업무를 준비 단계부터 이끌게 됐습니다.”
조 전무는 2014년 6월~2015년 3월 6개월 동안의 ‘인생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ING 아태본부 소속 M&A 전문가(상무)로 재직하며 홍콩과 싱가포르를 주무대로 아시아의 우량 기업들과 유럽 주요 고객사들의 역내 M&A 성사를 도왔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는 ING에서 아시아 최초로 지속가능금융 전담 조직을 만드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공교롭게도 2015년은 온실가스 배출의 단계적 감축을 골자로 하는 파리기후협약이 체결된 해이기도 하다). 조 전무는 이후 2017년 7월부터 SGX 합류 직전까지 3년 8개월 동안 ING 아태본부의 지속가능금융 총괄 디렉터로 활약했다.
이후에 SGX로 이직을 결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제한된 시간 동안 같은 값이면 더 큰 임팩트를 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던 중 SGX에서 관련 투자를 늘린다는 소식을 접했고, 새로운 도전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가 아시아의 금융허브인 만큼 ‘여기서 잘 하면 전 세계 모든 거래소가 벤치마킹하는 모범사례를 만들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와서 일해보니 어떤가요.
“개별 기업에서보다 시야가 넓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식과 상장지수펀드(ETF), 채권, 파생상품 등 다루는 분야가 훨씬 넓으니까요. 지속가능성 이슈에 대한 기업과 투자자의 인식도 예전보다 많이 개선된 것 같습니다. 적어도 상장사 중엔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기업은 없으니까요.”
ESG(환경·사회·거버넌스) 경영에 대한 관심이 커진 만큼 ‘그린워싱’에 대한 우려도 커진 것 같습니다.
“허위 공시 등을 막기 위한 제도적 노력이 앞으로 더 강화될 것으로 봅니다. 싱가포르통화청(MAS, 중앙은행에 해당)도 그린워싱 관련 단속 규정을 강화할거라 했고, 각국 중앙은행과 금융당국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사안인 만큼 시간이 지날수록 그린워싱 관행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겁니다. 2050년 탄소중립 목표를 세운 기업들이 많은데, 사실 2050년은 너무 먼 미래잖아요. 그래서 좀더 가까운 2030년 목표를 들여다보면 그 기업이 관련 이슈에 얼마나 진심인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린워싱은 친환경을 뜻하는 그린(green)과 세탁을 뜻하는 워싱(washing)의 합성어로, 실제로는 친환경적이지 않지만 마치 친환경적인 것처럼 홍보하는 위장환경주의를 의미한다. 그린워싱 문제가 되고 있다는 건 그만큼 환경 친화적인 기업이 이득을 볼 가능성이 커졌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해외 생활을 했는데도 우리말이 전혀 어색하게 들리지 않습니다. 비결이 뭔가요.
“폴란드에서 국제학교를 다니면서 주말에는 한인학교에서 수업을 들었어요. 언젠가 거기 선생님 한 분이 제게 “네가 아무리 국제적인 경험을 많이 해도 사람들은 결국 너를 한국인으로 볼 것”이라고 하셨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말씀이 제게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소중히 지키도록 하는 큰 동기부여가 된 것 같습니다. 옥스퍼드에 진학한 후에는 한인 동아리 활동도 열심히 했고요.”
앞으로 10년 뒤엔 또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요.
“아직 거기까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현재 업무 분야에서 경험이 더 많이 쌓이면 긍정적인 영향력을 더 많이 끼치는 일을 할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선은 지금 위치에서 맡은 일에 최선 다하는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생각하지 않은 곳에서 길이 열리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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