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와인] 오렌지 와인으로 맛보는 8000년 전 동유럽…부부의 고집 담긴 ‘카바이 암포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에 놓여있던 와인은 어떤 것이었을까. 영국의 와인 잡지 ‘디켄터’의 칼럼니스트 크리스 머서는 지난 2017년, 이 명화에 등장하는 와인이 내추럴 와인이자 포도 껍질·씨 여과 없이 그대로 병입하는 현대의 ‘오렌지 와인’과 가장 비슷할 것이란 주장을 소개했다.
‘고대 와인의 환생’으로도 여겨지는 오렌지 와인에는 오렌지가 주재료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옛 방식 그대로 포도 껍질, 씨를 제거하지 않고 천천히 침용, 자연 효모로 발효해 구릿빛이 나게 된 화이트 와인을 오렌지 와인이라 부른다. 현대에는 깔끔한 와인이 선호되며 오렌지 와인은 잊히는 듯 했으나, 최근 자연주의 열풍을 타고 유럽을 중심으로 다시 각광받기 시작했다.
8000년 전 고대 조지아에서 거대한 흙 항아리 ‘암포라’에 넣어 천천히 침용, 숙성시킨 양조법이 오렌지 와인의 뿌리다. 오랜 역사를 가진 이 암포라는 훗날 고대 그리스에 전해져 오늘날 유럽, 지중해 와인의 초석을 다졌다.
인구 200만명, 동유럽의 작은 나라 슬로베니아의 ‘카바이 와이너리’는 이런 전통적인 제조 방식을 전승해 오렌지 와인의 거장으로 거듭난 곳이다. 카바이 와이너리는 슬로베니아의 서쪽 브르다(Brda) 구릉에 위치해 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전세계를 휩쓸던 지난 2020년 무렵, 프랑스, 칠레 등이 주도했던 와인 시장에 ‘변방 와인’ ‘제3세계 와인’들이 부상했다. 그때 다시금 떠오른 와인이 카바이 와이너리의 제품들이다.
8000년 전 원조 와인 제조법을 따르고 있는 카바이 와이너리에 ‘변방’ ‘제3세계’란 말이 다소 억울할 수 있겠다. 엄밀히 따지면 와인의 원류를 더 엄격하게 계승하고 있는 이쪽이 원조인데 말이다.
프랑스인 와인 메이커 장 미셸 모렐(Jean Michel Morel)과 그의 아내 카트자 카바이(Katja Kabaj)가 이 와이너리를 함께 운영한다. 이들은 1989년 결혼 후, 1993 빈티지로 첫 와인을 출시했다. 처음부터 이들의 목표는 확고했다. 8000년 역사의 고대 조지아 와인을 재현해내는 것.
카바이 와인은 큰 오크 배럴, 스테인리스 스틸 탱크, 조지아의 점토로 빚은 암포라에서 양조, 숙성한다. 와이너리에서는 연간 6만~7만 병의 와인을 생산하며, 모든 와인은 프랑스산 오크통에서 최소 1년 이상 숙성하며 병입 후에도 몇 개월 더 안정화 과정을 거친다.
장 미셸 모렐은 고대 조지아 와인의 뿌리를 찾으며 암포라 와인을 직접 양조하고 지지하는 협회의 일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오렌지 와인의 거장이라는 이름 값을 하며, 카바이 와이너리는 세계적인 주류전문지 ‘와인앤스피릿’에서 네차례 ‘올해의 와이너리’로 뽑히기도 했다.
카바이 와이너리가 자리잡은 브르다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와 높은 일조량을 갖고 있어 포도 재배에 최적의 환경이다. 12헥타르의 포도밭 중 70% 가량이 화이트 품종이다. 포도나무 평균 수령은 30년이며, 직접 만든 자연퇴비만 사용하고 잡초를 제거하지 않는 등 친환경 농법을 고수한다.
이 가운데서도 ‘카바이 암포라’는 평균 수령 40년 된 나무에서 난 포도를 손으로 수확해 12개월 간 토기에서 발효 후 큰 용량의 프랑스산 오크 배럴에서 12개월, 병입 후 12개월 더 숙성해 출시한다.
잔에 따르자마자 달콤한 벌꿀, 신선한 과일 향이 풍부하게 나고, 오렌지 필, 사과 풍미가 이어지는 와인이다. 직후에는 스파이시한 부케가 남으며, 미네랄리티와 신선한 맛이 어우러져 길고 복합적인 여운을 남긴다. 연간 8000병 가량 생산되며, 빈티지로부터 15년 이상 더 두고 숙성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카바이 암포라는 리볼라, 소비뇽베르트와 같은 슬로베니아의 풍토에 잘 적응한 포도 품종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이 와인의 60%를 차지하는 리볼라는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를 거쳐 슬로베니아로 들어온 품종으로, 14세기 문헌에 처음 등장할 정도로 역사가 깊다. 언덕에서 잘 자라며 포도 껍질이 두껍고 약간 노란빛을 낸다.
간장소스를 곁들인 비프 카르파쵸, 사슴고기, 전복 등 복합적인 풍미의 음식이 카바이 암포라와 잘 어울린다고 전문가들은 추천한다.
카바이 암포라는 2023 대한민국 주류대상에서 화이트 와인 구대륙 10만원 이상 부문 대상을 받았다. 수입사는 신세계엘앤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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