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상에서 ‘은빛 청춘’ 폭발…마음만은 젊은이 [ESC]
코로나 이후 4년만에 띄운 속초발 크루즈…60·70대가 절대다수
과감한 옷차림에 매일밤 댄스파티…트로트 공연 등 볼거리 풍성
긴 항해 답답해하기도…비용 비싸고 짧은 기항지 일정도 단점
‘아~, 이 느낌 뭐지?’
지난 6월17일 오전, 서울 잠실야구장 앞에서 관광버스를 탈 때 좀 뜻밖이었다. 2011년 미국에서 남미 크루즈 여행을 했던 기억이 있는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코로나19, 그 긴 터널을 통과해 3년8개월 만에 운항을 재개한 크루즈 전세선 ‘코스타 세레나’를 타기 위해 강원도 속초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은 ‘어르신들’이 절대다수를 점하고 있었다.
롯데관광개발이 6월17일부터 23일까지 6박7일 일본 홋카이도(북해도) 소도시(오타루·하코다테·아오모리) 여행 전세선으로 띄운 이탈리아 선적 유람선 코스타 세레나는 일단 규모로 여행객을 압도한다. 길이 290m, 너비 35m, 지하 3층부터 지상 12층 갑판까지 모두 15층으로 구성된 11만4천t급 유람선은 서울 여의도 63빌딩을 눕혀 놓은 것보다 크다. 4개 유형 객실(내측·오션뷰·발코니·스위트)엔 3780명을 수용할 수 있다.
연말 방송사 시상식에서나 봄 직한
유람선에 오르자 ‘실버 천국’ 분위기는 더욱 확연했다. 트로트 가수 나태주와 박세욱, 국악 가수 조엘라의 공연과 시니어 모델 쇼, 허리 건강 지키는 법 강연(구성욱 연세대 의과대학 교수)까지, 어르신 맞춤형 프로그램이 빼곡하게 편성돼 있다. 2300여명 여행자 중 절대다수가 60~70대였다. 20~30대 젊은이와 어린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어르신을 모시고 온 ‘가족 단위 효도 관광객’이었다.
크루즈 여행엔 드레스 코드가 있다. 출항 사흘 전 담당 가이드에게서 문자 메시지가 왔다. “선장님과 함께 갈라 파티-예쁜 옷, 화이트데이-흰옷….” 다 맞춰 갈 수 없었다. 양복 한 벌과 간편복을 챙겼다. 물론 복장 문제로 유람선 안에서 출입이 막히는 곳은 없다. 하지만 제대로 갖춰 입은 어르신 모습을 볼 때마다 크루즈는 저렇게 즐기는 것이라는 느낌이 온다. 승선 첫날 저녁 정찬 식사 때 마주친 어르신들은 연말 방송사 연예대상 시상식 때 배우들에게서 봄 직한 의상을 거침없이 소화했다. 어깨가 깊이 파이고 쇄골이 드러난 이브닝드레스, 빨강·파랑 원색에 등이 온전히 노출된 옷차림도 흔하다. “어머, 너 정말 멋있다.” “이런 때 한번 입지, 우리가 언제 이런 걸 입어보겠니?” 백발성성한 이들 사이엔 이런 대화가 오간다. 코로나19로 힘겨웠을 어르신들은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유람선을 누볐다.
선상 공연, 라이브 쇼 등이 펼쳐지는 대극장의 열기는 아이돌 공연장 못지않다. 3~5층 객석은 밤낮없이 어르신들의 뜨거운 함성이 울려 퍼진다. 첫 기항지 오타루로 향하는 항해 둘째 날인 18일, 낮과 밤 두 차례 선보인 나태주와 박세욱 공연에선 그 열기가 최고조에 이르렀다. 나태주가 관객에게 묻는다. “20대 손 드세요.” 꽉 찬 객석에서 수많은 손이 올라간다. “30대 손 드세요.” 더 많은 이가 손을 든다. 연세 지긋하지만 마음만은 젊다는 듯 앞다퉈 손을 올린다. 나태주가 ‘막걸리 한 잔’을 시작으로 ‘인생 열차’ ‘고장 난 벽시계’를 부르며 마이크 잡고 공중 돌기를 하자 환호와 탄성이 잇따른다. “제주도 공연 좀 오세요.” “대구도요.” “인천도요.” 자신의 지역에서 나태주 공연을 보고 싶다고 아우성친다. 박세욱이 ‘고래 사냥’을 부를 땐 수백명의 어르신들이 손에 손을 잡고 객석에서 일어나 파도를 타며 떼창을 한다.
5층 그랜드 바에서 매일 밤 펼쳐지는 댄스파티는 더욱 화려하다. 이탈리아 가수가 김아중의 ‘마리아’ 등 익숙한 노래를 부르면 어르신들은 격하게 몸을 흔든다. 흰 드레스, 가슴엔 빨간 장미를 달고 나선 이도 있다. 얼추 70대로 보이지만 이곳에선 나이 따윈 상관없다. 아무도 의식하지 않고 리듬에 몸을 맡기고 흥겹게 춤을 춘다. “저분들, 크루즈 타려고 춤을 배워 오신 거 아니냐?” “젊어서 좀 놀아보신 분들 같은데.” 40대 안팎으로 보이는 이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술잔을 기울이며 어르신의 화려한 춤사위를 품평한다.
롯데관광개발은 2010년 9월 중국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오는 크루즈를 시작으로 2019년 10월까지 10년 동안 42회 월드 크루즈를 운항했다. 전세선 크루즈 여행을 사실상 개척한 셈이다. 부산항, 인천항, 속초항에서도 크루즈가 출발하고, 홋카이도는 물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오가는 노선도 열었다. 1조원이 넘는 크루즈 선박을 독자 보유할 만큼 크루즈 여행이 대중화하지 않은 우리는 미리 외국 국적 전세선을 예약해야 한다. 또 3천여명을 수용할 객실을 채우기 위해 보통 6개월 전부터 여행객을 모아야 한다. 하지만 2020년 코로나19 창궐로 크루즈 여행은 직격탄을 맞았고 이번 ‘북해도 크루즈’는 코로나 이전인 4년 전 계약에 따른 출항이었다.
70대 남성 “챗지피티로 자유여행 일정”
크루즈 여행은 아직 대중적이지 않다. 항공편을 이용한 패키지 여행에 견줘 가격이 비싸고, 여행에 소요되는 시간도 훨씬 길다. 항공편을 이용하면 100만원 안팎으로 홋카이도를 3박4일 여행할 수 있는 상품이 즐비하다. 반면 이번 6박7일 홋카이도 소도시 코스는 가장 저렴한 객실이 1인당 218만원, 가장 고급인 그랜드 스위트룸은 468만원이다. 객실 봉사료, 일본 입국료, 기항지 투어 비용은 별도다. 유람선 안에서 호텔급 룸서비스를 받고, 각종 공연을 관람하며, 4개의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뷔페와 이탈리아식 저녁 정찬을 무료로 즐길 수 있지만 아직은 그 정도 비용을 감내할 구매력과 여유 시간을 갖춘 이는 많지 않다. 크루즈 여행이 젊은 층까지 대중화하지 못하는 이유다.
실제 유람선에선 젊은 층보다 나만의 여행을 즐기며 크루즈의 장점을 예찬하는 어르신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 여행 나흘째인 20일 아침, 두 번째 기항지 하코다테항에 들어서자 12층 갑판에서 청량한 가곡이 들려온다. 70대 김순종씨가 갑판 위에서 ‘그리운 금강산’을 열창한다. 자발적 콘서트다. “쑥스럽지 않으세요?”라고 묻자 “이 얼마나 아름다운 풍경이에요. 즐겨야죠”라고 답한다. “우린 만학도예요. 20년 전 뒤늦게 대학을 졸업했어요. 그 인연으로 동창 8명이 가곡 동아리를 만들어 해마다 함께 여행을 다녀요.” 동창 권희자씨는 “북해도는 라벤더꽃이 최고인데 그 시절이 아니어서 아쉽지만, 음식도 좋고 누구 눈치도 안 보고 우리 나이에 이렇게 대접을 받으며 친구들과 종일 수다 떨 수 있으니 이보다 좋은 여행이 어디 있겠냐”고 했다.
갑판 간이침대에 누워 부인과 일광욕을 하는 박철순(75)씨는 더 도전적인 여행을 하고 있었다. 친구 부부와 넷이서 여행에 나선 그는 “우리 나이에도 두려움 없이 얼마든지 크루즈를 즐길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전날 첫 기항지 오타루에 이어 하코다테에서도 자유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했다. 크루즈 여행객 대다수는 항구에 내리면 여행사에서 제공하는 전세버스를 타고 유명 관광지를 둘러보는 기항지 투어를 한다. 육지 체류 시간에 제한이 있고, 언어 장벽 등을 우려해 가이드가 동행하는 투어에 의존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항지 투어는 1인당 13만~17만원까지 별도 비용을 지불해야 하고, 유명 관광지 두세 곳을 들르는 일정이라 생생한 현지 체험이 어렵다. 그래서 자유여행을 택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전 준비 등 적잖은 수고가 따른다. 그렇지만 그는 “기항지에 내리기 직전 챗지피티에 승선 시간과 함께 갈 만한 곳을 물으면 다 알려준다. 어려울 것 없다”고 했다. 전날 오타루에서 챗지피티가 추천한 대로 택시를 타고 오타루 운하, 오르골당 등을 관광하고 분위기 좋은 일식집에서 식사한 뒤 걸어서 배로 돌아왔다고 했다. 택시 요금 1200엔(약 1만원), 4인 식사에 1만4천엔(약 13만원)이 들었다고 했다. 오타루항에서 좀 떨어진 삿포로의 민속촌 격인 ‘홋카이도 개척촌’과 딱 10마리뿐인 양이 살고 있는 ‘양들의 언덕’을 소개한 여행사 제공 투어보다 훌륭한 선택이었다.
유람선 안에서 모든 걸 즐기는 이도 있었다. 김경욱씨는 “크루즈가 속초항에서 뜬다고 해 속초에 사는 동네 친구 5명이 칠순 기념으로 배를 탔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사이지만 일주일 동안 같은 방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보내니 정말 좋다. 크루즈 프로그램엔 별 관심이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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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 파티 인스타에 올리면 난리 나”
물론 모든 이가 만족하는 건 아니다. 크루즈에선 여행자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각종 공연과 파티, 노래왕 선발 대회, 에어로빅, 스트레칭 교습 등 무료 프로그램과 면세점, 카지노, 오락실, 뷰티 살롱, 마사지, 4D 시네마 등 각종 유료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그래도 6박7일 여행 시간 대부분이 ‘항해의 시간’이다 보니 답답함을 호소하기도 한다. 막냇동생과 함께 왔다는 60대 윤현자씨는 “크루즈는 시스템도 익숙지 않고, 뷔페 음식도 안 맞는다. 장점이라면 세상과 떨어져 푹 쉴 수 있는 정도”라고 했다. “에이, 잘못 선택했어. 배 안에 있으니 할 것도 없고 답답해”라며 푸념하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래도 크루즈는 자고 나면 새로운 여행지에 당도한다. 다만 긴 항해 시간에 견줘 기항지마다 머무는 시간이 짧다는 것을 단점으로 지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번 크루즈 기항 시간은 오타루 8시간30분, 하코다테 10시간30분, 아오모리 9시간30분이었다. 출입국 수속 등을 고려하면 실제 육지 체류는 이보다 짧아 관광지를 충분히 둘러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약점에도 크루즈 여행은 도전해볼 만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특히 어르신들의 정열적인 모습에 자극을 받은 ‘젊은이들’이 있었다. 자매가 함께 여행 온 언니 박미소(48)씨는 반성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주위에서 크루즈를 타본 사람이 없고, 나이 많은 어르신들만 있다고 해 솔직히 걱정 많이 했어요. 그런데 우리는 밥 먹고 침대에 누워 있는데 그 연세에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댄스파티 등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어르신을 보면서 반성 많이 했어요. 우리보다 젊게 사는 어르신들의 에너지를 받아가는 느낌이에요. 다음엔 저희도 드레스 코드를 제대로 갖춰 올 거예요.” 동생 박영진(42)씨는 “스포츠 프로그램 말고 젊은 층이 참여할 프로그램도 적고, 기항지에 머물 시간을 좀 더 많이 주면 좋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있다”면서도 자유여행과 다른 경험이 좋았다고 했다. “그동안 경험한 자유여행과 달라 좋았어요. 자유여행은 장소가 바뀔 뿐, 비행기 타고 내리고, 호텔에서 짐 풀고 싸는 패턴이 똑같아요. 크루즈는 입출국 수속부터 배 안 활동까지 모든 게 새로웠어요. 선상 파티나 바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거기 어디냐?’고 난리가 나요. 크루즈 여행 강력히 추천해요. 다음 크루즈를 위해 언니와 적금을 넣기로 했어요.”
국내에서 출발하는 월드 크루즈는 아주 드물다. 보통 항공기로 이동을 한 뒤 외국에서 출항하는 형식이 많다. 롯데관광개발 쪽도 “다음번 코스타 세레나 전세선 크루즈는 2024년 5월과 10월로 예정하고 있다”고 밝혔다. 국내에서 출항하는 월드 크루즈 여행에 도전하려면 어쩔 수 없이 좀 더 기다려야 한다.
글·사진 신승근 기자 sksh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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