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마을 작은 학교 졸업 사진 남겨주러… 카메라 들고 배 타는 사진사들
12년째 무료 졸업 앨범
인천 사진앨범협동조합
“사진 선생님, 저 뽀샵해주세요!”
“저도, 저도요. 팔도 깎아주시고 눈도 크게요~”
지난달 15일 아침 인천 강화군 대월초등학교 운동장. 커다란 카메라를 든 김현우 스튜디오현 대표에게 아이들이 조랑조랑 모여들었다. 이날은 6학년 졸업 앨범 사진을 찍는 날. “아무것도 안 해도 예쁘거든요!” 김 대표가 응수했다.
오늘의 사진 모델은 열네명이다. 중간에 전학 온 몇 명을 빼고는 병설 유치원부터 같은 반인 친구들. 이 학교는 졸업생 수가 너무 적어 학부모 부담으로 졸업 앨범을 만들기는 어렵다. 대신 김 대표가 속한 인천 사진앨범인쇄협동조합(이하 조합)에서 무료로 졸업 앨범을 만들어준다.
십수년 전만 해도 인천 강화·옹진군 도서 지역의 작은 학교들은 졸업 앨범 없이 졸업식을 치렀다. 앨범을 한 권당 5만~7만원 선에 제작하려면 졸업생이 못해도 50명은 넘어야 한다. 학생이 적을수록 비싸지고, 20명도 안 되면 객단가가 수십 배로 오른다. 특히나 하루에 한두번 있는 배를 타고 4시간을 들어가야 하는 백령도·대청도 같은 섬 학교는 사진사를 구하기도 어렵다.
도서 지역 학생들이 변변한 졸업 앨범을 못 갖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 지역의 사진사들이 2012년부터 무료로 제작해주자고 마음을 모았다. 올해로 12년째. 임웅재 조합 이사장은 “전에는 문방구에서 파는 포켓형 사진 앨범에 교사가 직접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을 끼우는 식으로 ‘자체 제작’하는 학교도 일부 있었지만, 단체 사진 한 장으로 갈음하는 곳이 많았다”고 했다.
◇작은 학교 졸업 사진 찍는 날
야외 촬영이 시작됐다. 운동장 잔디밭 중간에 나무 발판을 세워두고 김 대표가 직접 시범을 보였다. “발판에 올라가서 요렇게 살짝 몸을 돌리고, 준비해 온 포즈를 취하는 거야.”
이지유양은 뽀빠이처럼 알통을 자랑하는 자세를, 금빛양은 한껏 허리를 뒤로 꺾어 손으로 꽃받침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확실히 해가 갈수록 학생들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자연스러워지고, 소품이나 포즈도 다양해져서 찍는 맛이 있다”고 했다.
예외도 있다. 흰 셔츠를 차려입은 김하진군은 관객석에서 들려오는 “아빠 같아!” 소리에 귓불이 빨개진다. 말괄량이 같던 이서연양은 정작 카메라 앞에 서니 얼굴이 굳었다. “웃어야지~ 김치!” 소리에 입은 웃는데 눈꼬리가 뻣뻣하다. 카메라를 잡고 잠시 고민하던 김 대표가 눈을 크게 뜨며 익살맞은 표정을 짓자, 드디어 눈이 반달이 됐다. “오케이, 다음 친구!”
양장 앨범은 속지가 12장은 돼야 제본을 할 수 있고, 20장은 넘어야 옹색한 느낌 없이 만들 수 있다. 이 기준에 맞추려니 작은 학교 졸업 앨범은 더 특별하다. 졸업생이 한두 명인 학교는 갖가지 콘셉트로 사진을 찍어 화보집처럼 만들거나, 전교생 사진을 다 찍어 미국의 이어북(Yearbook)처럼 제작하기도 한다. 촬영 현장을 찾은 임웅재 조합 이사장은 “혹시라도 앨범 퀄리티가 떨어지면 부모님들이 공짜라서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아이들이 속상해할까 봐 정성을 기한다”고 했다.
다음은 실내 촬영 시간. 옷을 갈아입고 별관에 모였다. 한 번은 반듯하게 앉아 증명사진을 찍고, 한 번은 각자 장래희망을 담은 소품을 들고 찍기로 했다. 의사가 되고 싶다는 김주아양은 청진기와 주사기를 준비했고 기타리스트가 꿈인 김하진군은 통기타를 멨다. 사육사가 꿈인 이초인군은 ‘푸바오’를 닮은 판다 인형을 안고 호랑이 머리띠를 썼다. 어쩐지 운동장에서 끊임없이 남다른 춤사위를 뽐냈던 이지유양과 안다인양은 아이돌이 꿈. 왕관 머리띠와 블루투스 마이크를 가져왔다. 실내 촬영 담당 임원범 스튜디오 데이지 대표는 “졸업 사진 찍는 날은 다들 신난 모습”이라며 “졸업 앨범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하는 기분이 든다”고 했다.
슬슬 출석부 뒤 번호가 불리기 시작하자 아이들 눈동자가 흔들린다. 한 친구가 슬며시 다가와 소곤대는 말. “기자 선생님, 인터뷰 좀 더 해주세요. 지금 끝나면 국어 수업 해야 된단 말이에요!”
◇배 안 뜨고 섬에 발 묶이기도
즐거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지만 어려움도 많다. 졸업 사진을 찍는 6~7월은 해무가 자주 끼고 장마도 찾아오는 시기. 갑작스러운 풍랑으로 배가 못 떠서 꼭 한두 번은 촬영 일자를 조정해야 한다. 섬에 들어가서 촬영을 잘 마친다고 해도, 돌아가는 길이 막혀 며칠씩 발 묶이는 일이 부지기수. 김 대표는 작년에도 1박 2일 일정으로 백령도에 촬영을 갔다가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하룻밤을 더 묵었다. 배가 못 떠서 민박집이라도 갈라치면 수십만원이 깨진다.
모든 비용은 조합에 소속된 사진관 55곳이 내는 회비로 충당한다. 사진관 한 곳이었다면 엄두를 못 냈겠지만 십시일반으로 가능한 일. 적게는 두세 권만 제작할 수 있는 것도, 조합과 계약한 전담 인쇄소가 있기 때문이다. 3~4월에 원하는 학교에서 신청을 받고 조합 소속 사진사들을 배정해준다. 조건은 딱 하나, 졸업생이 20명 미만인 학교다.
조합에서 무료로 졸업 앨범을 만들어 준 학교는 2012년 21곳에서 2018년 38곳까지 늘었다. 애초 주민 수가 많지 않은 서해 5도 지역 학교들을 염두에 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학생 수가 줄면서 점차 강화도와 내륙에 있는 학교들도 지원 대상이 되고 있다. 강화도 본섬에 있는 대월초는 2016년부터 졸업생이 20명 밑으로 떨어졌다. 올해 무료 촬영 학교는 28곳. 최근 몇 년 줄어든 건 졸업생이 아예 없는 학교들이 생겨나고 있기 때문이다.
졸업 앨범 두께는 해마다 얇아지고 제작 부수도 줄고 있다. 학생 수가 줄어드니 사진사들 벌이도 예전 같지 않다고 한다. 대다수가 영세 기업체인 스튜디오 사진관들은 돌잔치나 칠순·팔순 잔치를 다니기도 하는데 코로나가 덮친 후로 한동안 가족 단위 행사가 뚝 끊기면서 타격이 컸다. 그래도 봄이면 섬마을 학교는 다녔다.
◇“졸업 앨범은 추억이니까”
사진사들은 “계산기를 두들겼다면 못 했을 것”이라고 했다. 고되고 손해까지 보는 일인데도 계속하는 건 졸업 앨범의 값어치를 알기 때문. 임 이사장은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만 켜면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시대지만 졸업 앨범은 다르다”고 했다. “평생을 두고두고 보잖아요. 동창 누가 결혼했다고 하면 꺼내 보고, 아들 군대 보낸 부모님들은 꼭 한 번씩 들춰 봅니다. 아이들한테 부모 졸업 앨범은 또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는 놀잇감이게요.” 맨 뒷장 주소록은 사라졌고 사생활 침해 문제로 선생님 사진도 빼는 곳이 많다지만, 여전히 졸업 앨범에는 추억이 담긴다.
“추억을 되새길 수 있게 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도 사진사님처럼 꼭 남을 위하는 삶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학생들이 또박또박 손글씨로 적어 보내오는 감사 편지는 사진사들이 이듬해 봄에도 카메라와 조명을 싸들고 배를 타게 하는 원동력이다. 대개 학생들은 앨범비를 누가 내고 어떻게 만드는지 모르지만, 일부 교사가 고마운 마음에 편지 쓰기 시간을 갖고 보내준다고 한다.
임 이사장은 매년 2월 열리는 전달식에서도 힘을 얻는다고 했다. 모든 학교에 배달까지 해주기는 어려우니 졸업이 다가오는 어느 날을 정해 졸업생 대표들이 지역 교육지원청으로 모여 완성된 앨범을 받아간다.
“우리 졸업 앨범 받던 날 기억을 더듬어보세요. 친구들이 평생토록 간직할 앨범에 내 사진이 어떻게 나왔을까, 얼마나 두근두근 떨려요. 상기된 표정으로 졸업 앨범을 받고, 빨리 펼쳐보고 싶어하는 게 눈에 보여요. 그건 세월이 지나도 똑같더라고. 그 모습이 너무 예쁘고 보람돼서 계속 하는 것 같아요.”
촬영이 다 끝나고 교실로 돌아가는 아이들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인생 첫 졸업 앨범을 찍은 소감을 물었다. “흑역사 생성? (사진)이상하게 나오면 안 볼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다른 친구가 도끼눈을 뜬다. “야 그래도 졸업하면 기억해야지!” “우리 같은 중학교 가잖아!” 까르르까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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