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렴으로 덥혀낸 뜨거운 한 모금

양세욱 인제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2023. 7. 1. 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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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양세욱의 호모 코쿠엔스]
돼지국밥

기차가 좋다. 기차에 오르면 첫 수학여행 같은 기분 좋은 추억들이 떠오른다. 단잠에 들 수도 있다. 버스나 비행기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기차의 진동은 심장박동과 비슷하고, 객실의 안온은 태아가 쉬는 양막을 닮았다. 서울역을 출발해 부산역으로 향하는 KTX, 돼지국밥을 찾아 떠나는 여행이다.

두 시간을 달린 기차는 동대구에 닿는다. 박사 학위를 마친 해 출강을 위해 두 학기 동안 다니던 역사다. 첫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려 1교시 강의를 앞두고 국밥 한 그릇을 허겁지겁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대구부터 밀양, 부산까지 이어지는 길을 ‘돼지국밥 로드’라고 불러도 좋겠다. 이슬람권을 제외하면 인류 보편의 식재료인 돼지고기로 국밥을 끓이는 세계 유일 지역을 관통하는 노선이다.

펄펄 끓는 솥을 옮겨가며 붓고 따르기를 반복하는 토렴으로 덥혀낸 김해 ‘밀양돼지국밥’/양세욱 제공

돼지 뼈와 살코기를 삶아낸 국물에 수육 편육을 얹고 밥을 말아 먹는 돼지국밥은 동남권의 음식이다. 남원의 추어탕, 마산의 아구찜, 전주의 비빔밥, 춘천의 닭갈비 같은 지역 음식들이 전국화를 모색하면서 우리 외식 문화는 새 국면을 맞이했지만, 이 대세에 마지막까지 맞선 음식이 돼지국밥이다. 지금껏 돼지국밥은 왁자지껄한 경상 방언을 배경음악 삼아 먹어야 제격인 음식이자 국밥을 완성하는 식재료인 부추를 정구지라고 부르는 방언 권역의 토속 음식으로 남아 있다.

동대구에서 한 시간을 더 달린 기차는 부산역에 정차한다. 지하철 1호선을 갈아타고 범일역에 내리면 부산의 상징색 딥블루로 외벽을 칠한 ‘60년전통할매국밥’이 있다. 돼지국밥의 미묘한 세계를 처음 경험한 노포다. 수요미식회 같은 맛집 프로그램에 소개되기 한참 전, 창업주 ‘할매’가 작고하고 둘째 며느리가 물려받기 이전의 일이다. 수육은 여전했지만 국밥은 기대하던 맛이 아니다. 그 사이 입맛이 변한 걸까.

돼지국밥은 논쟁적인 음식이다. 밀양과 부산이 주도권 다툼의 맞수다. 원조를 주장하는 밀양은 캐릭터까지 만들며 홍보에 공을 들이고 있다. ‘부산’을 내세운 돼지국밥은 드물지만, ‘밀양’은 전국에 흔한 이름이기는 하다. 부산은 부산대로 돼지국밥을 솔푸드로 부르며 전국화의 공을 내세운다. 지역 변이도 상당해서 부산에는 곰탕처럼 맑은 육수가 많고, 밀양에는 설렁탕처럼 뽀얀 국물을 내는 집이 대부분이다. 돼지국밥의 기원을 둘러싼 논쟁도 치열하다.

돼지국밥은 예민하다. 호불호가 우선 갈리고, 선호하는 스타일도 먹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개인적으로는 곰탕보다 설렁탕 스타일이 좋다. 지금은 그렇다. ‘할매국밥’의 맑은 국밥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지 못한 이유도 어쩌면 이 때문일 터이다.

부산에서 한 곳을 더 들르려던 계획을 바꿔 찾은 곳은 김해 ‘밀양돼지국밥’. 내 인생 돼지국밥으로 불러도 좋을 곳이다. 돼지국밥에서 양보할 수 없는 기준 한 가지는 토렴이다. 뜨거운 국물을 부었다 따르기를 반복하며 데우는 과정인 토렴은 국밥의 화룡점정이다. 이 집의 토렴은 단순한 조리 과정을 넘어 숙련된 퍼포먼스이자 엄숙한 의식이기도 하다. 펄펄 끓는 솥 세 개를 옮겨가며 뚝배기에 육수를 붓고 따르기를 10여 차례. 이 지루하고도 위험한 프로세스를 평온한 표정으로 빈틈없이 치르는 주방 이모 두 분을 보고 있자면, 국물 한 방울도 감히 남기기 어렵다.

프랑스의 한 타이어 제조 회사가 발간하는 ‘미쉐린 가이드’는 별 개수로 식당을 평가한다. 별 하나는 “해당 카테고리에서 요리가 아주 좋은 식당”, 둘은 “요리가 훌륭해서 우회할 만한 가치가 있는 식당”, 최고 등급인 셋은 “조리가 특출해서 따로 여행할 가치가 있는 식당”이다. 수학적 간결함과 시적 서정성까지 담은 정의이지만, 어디까지나 타이어를 달고 자동차로 여행하는 이들을 고려한 정의다.

대구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돼지국밥 로드’ 토박이들 가운데 돼지국밥을 먹으러 멀리 여행을 떠나는 이들은 드물다. 제각각 만족스러운 식당이 지척에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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