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어 장발장 된 참전 유공자… 기업이 나섰다

최인준 기자 2023. 7. 1.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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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주말]
10명 중 7명 빈곤층
관심 사각지대 6·25용사
지난 5월 친환경 욕실용품 업체 인프레쉬 직원 남예원씨가 세종시에 거주하는 한 625참전용사를 찾아 인사하고 있다. 이 업체는 참전용사에게 식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월10만원 어치 선불카드를 참전용사에게 지급하고 있다. / 인프레쉬

“대단한 건 아니지만 우리의 영웅에게 작은 마음을 전해드리고 싶었습니다.”

지난달 26일 한 앳된 여성이 라면 상자 2개를 들고 부산진경찰서를 찾았다. 상자에는 참기름·참치캔·햇반·라면 등 마트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생필품이 가득했다. 여성은 상자와 함께 직접 쓴 손편지를 형사계에 전했다.

‘천수를 누리며 좋은 것만 드셔야 할 분이 우리 사회 가장 구석진 그늘에서 외롭게 살고 계신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그분들의 피와 땀, 젊음 위에 세워진 땅 위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나설 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난달 7일 80대 후반 남성 A씨가 절도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사연이 알려졌다. A씨는 부산 금정구 한 마트에서 7차례에 걸쳐 식료품 8만원어치를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런데 담당 형사가 이 남성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그가 6·25전쟁 참전 유공자라는 것을 알았다. 노인은 1953년 전쟁 마지막 해에 참전했다가 제대한 뒤 30여 년간 선원 생활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왔다. 이후 자녀들은 독립했고, 최근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낸 뒤 독거노인으로 지냈다.

직업이 없는 그에게 매달 쥐어지는 돈은 정부와 지자체가 지급하는 60만원이 전부였다. 그가 훔친 식료품은 참기름·통조림이 대부분. 치아가 약해 부드러운 미역국을 끓여먹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참전용사가 절도 행각을 벌일 수밖에 없던 사연을 안타깝게 여긴 한 청년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선행을 한 것.

부산진경찰서에는 절도죄로 붙잡힌 참전 용사에게 전해달라며 식사용 선불 카드, 손 편지가 도착했다. 편지에는 “영웅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미어졌다”고 적혀 있었다. / 인프레쉬

◇“한 장의 플라스틱 카드, 참전용사 피난처가 되길”

미담의 주인공은 서울에서 친환경 욕실용품을 생산하는 중소 업체에 다니는 남예원(26)씨였다. 남씨는 이날 아침 출근하는 길에 노인에 대한 기사를 보고 회사 대표에게 바로 전화를 했다. ‘부산에 가서 이 노인을 도와드려야겠다’고. 대표는 흔쾌히 “오케이(OK)”를 외쳤다. 그렇게 남씨는 생필품과 함께 치아가 안 좋은 노인이 먹기 좋은 바나나·소시지·빵 등 부드러운 간식거리 등 20만원어치를 선물했다.

남씨가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건 그가 다니는 회사가 평소 참전 용사 후원 사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2007년 인프레쉬를 론칭한 차윤복 대표는 지난 4월 에티오피아를 찾아 6·25 참전 용사 100여 명을 대상으로 안과 진료비와 백내장 수술비를 지원했다. 에티오피아는 전쟁 당시 6000여 명의 군사를 한국에 파견한 우방국. 얼마 전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였던 한 노인의 기사를 접한 게 후원을 시작한 결정적 계기가 됐다. “난 두 다리를 잃었지만 한반도 전쟁에 참전했던 걸 후회하지 않는다”는 인터뷰였다.

차 대표는 이후 한국을 포함 ‘16국 참전 용사 후원 사업’을 본격 시작했다. 지난 5월 세종시에 사는 어려운 형편의 참전 용사 5명에게 어디서든 식사를 할 수 있는 월 10만원어치 선불 카드를 선물했다. 회사는 전 세계 참전 용사들에게 태극 마크를 형상화한 수건과 순금으로 만든 카네이션을 보내기도 했다. 차 대표는 회사 홈페이지에 올린 손편지를 통해 참전 용사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전했다. “이 한 장의 카드가 참전 용사들께 그저 얇은 플라스틱이 아닌 세상의 비바람을 막고 식사 한끼 챙겨 드실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길 바랍니다.”

◇생계형 범죄 할 수밖에 없는 참전 용사들

생활고에 시달리는 참전 용사는 A씨뿐만이 아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현재 생존해 있는 6·25 참전 용사는 4만여 명. 2000년대 들어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지난 20여 년간 그 숫자가 90%가량 줄었다. 문제는 현재 남은 참전 용사 10명 중 7명이 당장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빈곤층이라는 점. 지난 2017년 한 6·25 참전 용사는 병으로 앓아누운 아내에게 먹이기 위해 마트에서 귤 한 봉지를 몰래 가져나오다가 경찰에 체포됐다. 단돈 1만원도 안 되는 돈이 없어 호국 영웅이 절도범 신세가 된 것이다.

참전 용사들의 생계형 범죄가 늘어난 건 이들 대부분의 나이가 80세가 넘으면서 몸이 성하지 않아 벌이를 갖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지급하는 참전 명예수당은 월 39만원. 2~3년 전까지 지자체가 별도로 지급하는 수당은 월 2만~5만원 수준에 불과했다. 최근 들어 ‘예우 논란’이 불거지면서 대부분 지자체가 10만원으로 올렸지만 이에 못 미치는 지역이 여전히 많다. 한 참전 용사 유가족은 “전남도는 민주화운동 경력자에겐 월 13만원의 생계비를 지원하면서 전쟁 유공자에겐 여전히 3만원을 지급하고 있다”고 했다.

(서울=뉴스1) = LG가 2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 위치한 대형 전광판에 송출되는 '한미 참전용사 10대 영웅' 백선엽 장군 영상. (LG 제공)

◇정부 빈자리 메우는 기업

참전 용사에 대한 국가 차원의 예우와 지원이 부족하다 보니 민간 업체들이 그 빈자리를 메우고 있다. 방산업체 KAI(한국항공우주산업)는 지난달 27일 6·25참전유공자회에 참전 용사 100여 명에게 1인당 20만원 상당 여름나기 물품을 후원하는 등 2500만원을 기부했다. LG생활건강은 정전 70주년을 맞아 참전 용사들에게 생활용품과 건강기능 식품을 담은 ‘희망박스’ 400개를 기부했다. 삼성전자, LG전자는 지난 4월 미국 뉴욕 타임스스퀘어 전광판에 참전 용사에 대한 감사 메시지 영상을 2주간 내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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