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문현답(愚問賢答)
[김황식의 풍경이 있는 세상]
저의 총리 재직 기간 내내 국무차장으로 함께 일하였던 육동한 춘천 시장에게 공무원을 상대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한번 찾아가 취임 축하와 격려를 해드리고 싶던 차에 강연 요청을 받았기에 기쁜 마음으로 수락하였습니다. 먼저 어떤 주제로 강연을 할까 고민하다가,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것보다 공직 후배들에게 저의 공직 경험을 소박하게 소개하기로 하였습니다. 공직자들이 그 가운데 참고할 교훈을 얻기를 바라며.
재판 경험에서 이야기를 시작하였습니다. 재판은 사실관계를 확정하고 거기에 법률을 적용하여 결론을 내는 과정입니다. 재판에서 사실관계 확정의 비율은 70% 이상입니다. 사실관계가 정확하게 확정되면 나머지 문제는 어렵지 않게 정리가 되며 좋은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많은 경우 서류 검토보다는 당사자나 증인의 표정 등 태도를 보며 소통하거나 사건 관련 현장을 직접 방문하면 사실관계가 더 명확히 밝혀집니다. 행정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모습을 확인하면 좋은 결론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탁상공론에 빠지지 않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재판이건 행정이건 국민의 요구가 형식적, 절차적 이유로 부당하게 거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꿔 말하면 국민이 가려움을 호소하는데 법원이나 행정기관은 형식적 법률 규정에 얽매여 나 몰라라 하는 셈입니다. 심지어 “억울하지만, 방법이 없다”가 답변이 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 다른 좋은 해결책은 없을까 하고 길을 찾아 나서는 것이 좋은 재판이자 행정입니다. 감사원장으로 일할 때 행정기관이나 공기업에서 사후 감사를 염려하여 소신껏 일할 수 없다는 이야기가 들려 왔습니다. 설거지하지 않으면 접시를 깰 일도 없는 것처럼 일하지 않으면 감사에서 지적될 일도 없습니다. 그리하여 공직자가 이른바 무사안일, 복지부동의 자세에 빠진다면 그 피해는 국민에게 돌아갑니다. 그래서 “적극 행정면책 제도”를 도입하였습니다. 어떤 조치가 결과적으로 위법, 부당한 것으로 판명되더라도, 그 행정처분이 지향하는 목적이 공익에 부합하고, 절차적으로 나름대로 충분한 협의와 숙고를 거쳤으며, 그 과정에서 부정 청탁 등의 요소가 없다면 그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는 제도입니다. 공직자의 적극적 자세를 당부하기 위해서입니다.
국민 편의, 불편 해소를 위해 창의적 자세를 가질 것도 당부하였습니다. 다양한 사례를 소개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제가 법원 행정을 담당할 때 경험한 한 예입니다.
회사 등 법인 이사의 주소는 법률상 등기사항이었습니다. 주소가 변경되면 일정 기간 내에 변경 등기를 하여야 하고 지체되면 과태료 처분을 하였습니다. 이사들의 주민등록번호가 등기되므로 이사의 동일성을 확실히 하기 위하여 주소까지 등기토록 할 필요가 없습니다(다만 대표이사 주소는 등기토록 함). 말하자면 쓸데없이 국민만 괴롭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법무부와 상법 개정을 논의하였더니 다른 개정 사항과 함께 개정하여야 하니 당장은 어렵다는 답이었습니다. 국민 불편을 빨리 면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법제사법위원회 수석전문위원과 상의하여 의원입법 형식의 ‘법인의 등기사항에 관한 특례법’을 제정하기로 하였습니다. 다만 법안을 소개할 의원을 모셔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인제 의원에게 부탁하였더니 기꺼이 맡아주었습니다. 4개 조항으로 구성된 특별법이 작업 착수 2주 만에 국회를 통과하였습니다. 역사상 가장 단출한 내용의 최단기 처리 법안이었습니다. 국민은 그만큼 편리해졌습니다.
끝으로 다양한 갈등 해결의 기준, 방법과 구체적 사례를 소개하고 나서, 적어도 춘천에서는 복지 사각에서 죽음을 선택하는 송파 세 모녀 사건 같은 일, 고독사(돌보는 이 없이 홀로 죽는 것)나 직장(장례식도 없이 화장터로 직행하는 장사 방식) 같은 비인간적 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다문화 가정이나 이주 노동자가 잘 배려되는 따뜻한 춘천을 만들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뜻으로 우스개 삼아 사용하는 ‘우문현답(愚問賢答)’이 이 모든 것들의 출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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