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익어가기를 기다리는 와인이 있다는 것은
[한은형의 밤은 부드러워, 마셔]
생빈
헤밍웨이와 하루키의 공통점은 안 가본 데가 없고 가본 여기저기에 대해 썼다는 것이다. 글의 톤은 두 분이 상당히 다른데, 헤밍웨이가 허장성세과라면 하루키는 담백과다. ‘이런 걸로 나대면 보기 안 좋다’는 겸양이 수맥처럼 흐른달까.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아시아인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의식하게 되었다. 눈동자 색이나 부모를 바꾸는 것보다 내가 나고 자란 아시아적 풍토를 없애는 게 더 어렵다는 것도. 이를테면, 혼자 있을 때라도 조심해야 한다는 ‘신독(愼獨)’ 같은 덕목들을 배웠고, 이런 것들은 알게 모르게 나를 조종한다는 생각이다.
그런 나의 눈에는 하루키의 글에 내면화된 동아시아적 정서가 보인다. 가본 데도 많고 본 것도 많고 먹은 것도 많지만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서 위화감이 없다. ‘평범한 보통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레이먼드 챈들러와 달리기와 두부와 맥주를 좋아한다는 말은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 하루키의 스탠더드한 평범함이 좋다거나 날 서 있지 않은 단정함이 좋다고 하는 분들을 만나면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속고 계시는 거예요. 이 얼마나 고수의 기술인가. 평범함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착착 할 수 있다니.
평범함에 대해 말하고 있으려니 ‘보통 사람’이라고 주장하던 그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보통 사람’이라며 잔잔하게 손을 흔들던, 카리스마는 좀 약하다고 평해지던 전직 대통령 말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인 퉁소를 잘 불었다는 이야기를 최근에 듣고 인간적인 궁금함이 생겼다. 바이올린이나 플루트가 아니라 퉁소인 것이다! 퉁소를 불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보통 사람’이라고 칭하는 사람이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되진 않는다.
다시 하루키로 돌아와서. 하루키가 평범함을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이건 좀 얄밉네?’ 하는 일이 있었다. 보스턴과 아이슬란드, 미코노스 섬 등을 여행하고 쓴 글을 모아 만든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문학동네)’라는 책을 읽다가였다. 로마에 살 때 잡무를 떨쳐내고 소설에 집중할 수 있었다며, 특히나 주말이면 차를 타고 토스카나 와이너리를 돌아다니다 트렁크에 가득 싣고 돌아왔던 와인 덕을 봤다는 이야기가 그랬다. 로마와 소설, 토스카나와 와인을 횡단하는 게 루틴인 삶이라… 더군다나 198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야기도 참 그렇지만 더 그런 건 다음에 오는 문장이다. “멋진 삶이다 싶죠? 음, 확실히 멋진 삶이었다.”라고 약을 올리지 않는 듯 약을 올리더니만 이탈리아에서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살짝 써주고, 그래도 일본에서와는 달리 자유로움을 흠뻑 맛볼 수 있어 좋았다고 적는다. 현실을 떠나고 싶지 않은 자가 어디 있나요? 이래 주시니, ‘아, 나도 자유롭고 싶다’라는 데로 관점이 이동하면서 얄미움의 감정은 스르르 사라지고 만다.
하지만, 곧 다시 토스카나 와인 이야기를 하시는데 이 부분이 앞에서 말한 하루키스러움의 절정을 이룬다. 나는 생빈 이야기를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일단 ‘생빈’이란 무엇인가. 생년 빈티지의 줄임말이 생빈이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난 해에 태어난 와인이어야 생빈이 될 수 있다.
와인 좀 드시는 분들 사이에 ‘생빈’이라는 오묘한 세계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수십 년 전에 생산된 와인이면서 수십 년을 너끈히 버틸 수 있는 체격이 출중한 와인이어야 하므로 값도 상당하다. 수십 년 전의 것이므로 돈이 있다고 해도 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빈을 구해 드시는 분들이 있다. 어느 세계에나 고수들은 계시니까.
본인의 생빈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지도 보았다. 자식의 생빈을 구하거나 손녀의 생빈을 구한다. 갓 태어난 손녀가 성인이 되거나, 아니면 좋을 일이 있을 때 따라며 생빈을 준비해두었다는 분을 만난 적이 있다. 라벨에 손녀의 이름까지 인쇄한 특별한 생빈을 구했으나 배송 착오로 못 받게 된 이야기도 들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 무덤덤했다. 세상에는 그런 세계가 있구나 정도의 느낌. 그런데 차츰 뭔가가 일어났다. 사람이 태어난 해의 와인이란 그 해의 공기와 기후를 머금을 수밖에 없는 물질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고, 사람이 익어가는 동안 와인도 셀러에서 익어가면서 함께 열릴 순간을 기다린다는 게 오묘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익은 두 개의 같은 빈티지가 만나는 순간이 온다는 것이.
하루키의 생빈 이야기는 이렇다. 토스카나 북서부 루카가 배경인 소설을 쓰면서 1983년산 콜티부오노 레드를 마시는 장면을 넣었다고 한다. 원래는 고유명사를 안 넣는데 토스카나에서 즐겨 마시던 와인이라 넣었다고. 이 책이 이탈리아에도 번역되면서 콜티부오노 와인을 만드는 분이 읽게 되었고, 도쿄의 하루키에게 1983년산 콜티부오노를 보내주었다. 1983년은 최고까지는 아니어도 양호한 축에 드는 해라는 말도 하루키는 잊지 않는다. 하루키가 다시 토스카나에 가게 되어 콜티부오노 와이너리에 묵게 되는데, 주인이 1949년산 빈티지를 선물해주었다는 이야기. 1949년은 하루키가 태어난 해다. 그러니까 생빈.
“기쁜 동시에 이렇게 귀한 와인을 대체 언제 어떤 상황에서 따면 좋을지 꽤 심각하게 고민된다. 뭐, 그거야 천천히 생각해 보죠. 분명히 조만간 멋진 기회가 찾아올 것이다.” 마법처럼 생빈을 얻은 이야기를 하신 후 이런 말을 덧붙이신다. 그렇게 얻은 1949년산 생빈의 사진도 실려 있는데, 먼지와 곰팡이로 뒤덮여 라벨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은 와인에게나 인간에게나 만만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예전에 이 책을 볼 때는 아무 느낌이 없었는데(생빈에 대해 몰랐음) 이제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다. 애써 구할 것까지야 없지만(여력도 안 됨) 어쩌다 생빈이 생긴다면 나름의 계획을 세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런데 역시 나는 태어난 해에 별 감흥이 없다, 탄생에는 내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아 그런가도 싶고. 차라리 내게 의미 있는 해를 정하고 기념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다. 문제는 아직 그렇게까지 기념할 만한 해가 없다는 것이다. 두고두고 기억할 만한 해를 만들고, 그 해의 생빈을 산다는 게 현재로서의 계획이다. 정말로 태어났다는 기분이 드는 해일 것이다. 인간은 여러 번 태어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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