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을 가족처럼 아끼는 ‘식집사’는 400년 전에도 존재했다

김민정 기자 2023. 7. 1.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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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왕립식물원 등에서 일한 저자, 실내식물의 역사와 문화 총망라

실내식물의 문화사

마이크 몬더 지음 | 신봉아 옮김 | 교유서가 | 240쪽 | 2만2000원

“커다란 팬에 담긴 석탄에 꼼꼼히 불을 붙이고, … 다음으로 그것을 손수레에 옮겨 담고, 두 사람이 온실 구석구석 그 손수레를 조심스럽게 끌고 다닌다.”(17세기 문인 존 이블린의 기록)

영국의 어느 겨울, 두 사람은 왜 석탄 손수레를 하루 종일 끌고 다녔을까. 이들의 직업은 원예가. 열대 지방에서 채집한 귀한 식물들이 추위에 죽는 것을 막기 위해 이런 수고를 한 것이다. 400년 전의 ‘식집사’(식물을 애지중지 키우는 사람)였던 셈. 이 책의 저자인 식물학자 마이크 몬더는 “혹독한 겨울이 끝날 무렵, 원예가들의 폐 상태가 얼마나 끔찍했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고 염려한다.

식물학자와 원예가들이 보기에 세계적으로 최근 실내 식물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어느 시대보다 뜨겁다고 한다. 호주 가정의 3분의 1이 실내 식물을 기르고, 실내 식물 동호인 페이스북 가입자가 36만명에 이른다. 이 중에 “행복한 ‘사 모으기’ 전문가”도 있지만, 메마른 도시에서 식물과 “기쁨과 우정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저자는 말한다. “실내 식물은 몇 년씩, 때로는 몇 십년씩 우리와 동거하고 어떤 식물은 우리 배우자보다 오래 생존한다. 이들의 근본적인 존재 이유는 우리 삶에 기쁨과 풍요를 더하는 것.”

◇누군가에겐 사치품, 누군가에겐 향수(鄕愁)

저자는 영국의 큐 왕립식물원, 하와이 국립열대식물원 등에서 일했고 케임브리지대의 케임브리지보존계획(Conservation Initiative) 전무이사를 맡고 있다. 책에 실내 식물의 역사와 실내 식물이 소재가 된 그림과 문학, 인류와 식물의 ‘공동 진화’까지 다양한 뒷이야기들을 풀어놨다. 읽고 나면 우리 집 식물이 어딘가 ‘사연 있는’ 애처럼 보인다. “너 열대 야생의 ‘특사’였구나!”

싱싱하고 거대한 초록 잎이 달린 몬스테라나, 색깔과 문양이 화려한 칼라디움, 각종 다육식물과 선인장, 제라늄, 금전초 등 실내 공간에서 다양한 열대 식물들을 기르는 일이 지금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일부는 슈퍼에서도 살 수 있다. 저자는 “파인애플이 통조림이 된 것처럼 신비감이 사라졌다”고 말하지만, 이게 처음부터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15세기 그림 ‘트로이아전쟁’(1455)에 지금과 비슷한 화분이 침실에 등장한다. 현존 실내 식물 첫 지침서는 1608년 휴 플랫 경이 지은 ‘식물 낙원’이다.

야생에서 살던 식물을 집에서 기를 수 있게 만들기까지는 많은 기술 발전과 분투가 필요했는데, 이 열망의 바탕은 ‘이국적인(exotic)’ 것에 대한 놀라움과 경외였다. 인터넷도 없고 해외 여행도 흔치 않은 때 난생처음 보는 이 식물들은 ‘집 안에 놓고 볼 수 있는’ 미지의 세계였던 것이다. 또 이민자들에겐 고향을 떠올리는 ‘한 조각의 자연’이었다. 민트는 중동 가족들이 유럽 이민 당시 가져와 키웠고, 마이애미로 이주한 쿠바 가족들은 창턱이나 베란다에 쿠바 오레가노를 키웠다. 이렇게 야생 식물을 재배종으로 만드는 육종 열풍은 영국에서 시작해, 미국 등을 거쳐 태국과 한국 등 아시아로 이어져 발전했다. 오늘날 실내 식물 문화는 400년간의 수많은 실험과 재배 기술 발전의 결과인 것이다.

◇'식물과의 오랜 로맨스’가 남긴 해악

하지만 이면의 어두운 구석까지 보지 않으면 실내 식물에 대한 ‘반쪽 이해’에 그칠 것이다. 새로운 종에 대한 경쟁적인 채집 과정에서 서식지 보존은 무시됐고, 원산지에 보상도 제공되지 않았다. 이로 인해 현재 “야생종 아프리칸바이올렛은 몇 십년 안에 완전히 멸종할 위기에 처해 있지만, 재배종 아프리칸바이올렛은 북반구의 가정에서 정성스레 길러지고” 있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 야생 식물이 사라져도 실내 식물이 있으면 되지 않느냐고? 품종 개량을 거친 집에서 기르는 식물과 그들의 조상인 야생 식물은 “수퍼마켓에서 판매하는 닭과 정글에 살던 야생 가금류만큼 차이가 크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자연 생태 사슬의 복잡성은 실내 식물에 비할 수 없다.

저자는 실내 식물이 야생 식물의 ‘특사’ 혹은 ‘사절’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한다. ‘식집사’들에게 야생 보존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감정적 고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식물 판매 가격에 ‘보존 관세’를 매겨 야생 보존을 지원해야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사실 인류의 ‘열대 식물과의 오랜 로맨스’는 무역 과정에서 발생하는 각종 환경 오염과, 원예용 이탄 채굴로 인한 탄소 발생 문제 등 해악도 상당하다. 실내 식물이 환경 보전에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저자의 주장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들리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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