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인 ‘세도남’ 스타일, 파리 패션계 홀리다
파리 진출 21년 패션 디자이너 우영미
블루·블랙 톤의 편안한 바지와 점퍼, 재킷과 셔츠, 니트 스웨터와 반바지를 입은 남자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넘긴 머리에 금속 테 안경과 넥타이를 착용한 복고풍의 모델들은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자유로운 ‘현대의 도시 남자’를 연상시킨다. 2024 SS ‘솔리드 옴므’의 컨셉트는 전통적인 워크 웨어와 스트리트 웨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실용성과 스타일을 강조한 것이다.
# 6월 25일, 샤이요 국립극장, 우영미
이번 시즌 ‘우영미’ 컬렉션은 제주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해녀들의 잠수복을 연상시키는 스킨 스쿠버 소재 의상과 수산물을 담아두는 테왁망사리를 연상시키는 가방 등이 눈에 띈다.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는 프린트와 귀걸이 등의 액세서리로 등장했다. 특유의 테일러링이 돋보이는 수트 사이로 캐주얼한 오버사이즈 테크 웨어와 애시드 워싱 데님들도 보인다. 1653년 조선시대 때 제주도에 표류했던 하멜이 현재의 제주도로 시간 이동해 테크노파티를 벌인다면 이런 의상을 입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브랜드로 매출 1000억 달성
파리 패션계에서 ‘마담 우’는 유명 스타다. 한국인 최초로 루이비통·에르메스·디올 등 명품 하우스들이 속해 있는 프랑스패션협회 정회원이 됐고,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포진한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우영미’ 매장 입성을 앞두고 있다. 이제 겨우 네 번의 쇼를 치렀을 뿐인데 ‘솔리드 옴므’는 반응이 좋아서 오는 9월 봉 마르셰에서 단독 팝업을 열 예정이다. 컬렉션 때마다 ‘우영미’와 ‘솔리드 옴므’ 쇼의 스타일링을 책임지는 스타일리스트도 펜디·폴 스미스 쇼의 스타일링을 도맡아 하는 거물이다.
‘마담 우’가 보여준 21년간의 열정과 집요함은 파리 패션계가 인정하는 바다. 코로나19로 파리패션위크 오프라인 쇼가 모두 중지되고, 디지털 영상으로 쇼를 대체했을 때도 우 디자이너는 파리에 있었다. 당시 ‘우영미’의 마케팅 전략 팀장과 홍보·마케팅 책임자, 이렇게 달랑 여자 셋이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옷을 가득 실은 40개의 박스를 옮겼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파리를 찾은 디자이너였다. “파리패션위크에서 보여줄 무대를 서울에서 디지털 영상으로 대체하는 게 성에 안 찼어요.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코로나도 겁 안 날만큼 쇼 생각밖에는 없었으니 참 무모했죠.”(웃음)
파리에서 론칭한 ‘우영미’는 현재 영국·이탈리아·런던·일본·홍콩 유명 백화점 등에 40개 매장을 갖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로 인지도를 먼저 쌓은 우영미가 국내 젊은 층에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7~8년 전부터. 새롭고 유니크한 브랜드를 찾는 젊은이들 눈에 ‘우영미’가 눈에 띈 것이다. 국내 판매 수량이 많지 않자 해외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구매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얼마 전에는 국내 명품 온라인 쇼핑몰이 해외 바이어들에게 ‘우영미’ 구매대행을 부탁한 일까지 있었다. SNS에는 “홍콩 가서 ‘우영미’ 사왔다”는 인증샷이 수시로 올라온다.
사옥 아카이브에 의상 5000점 모아
“네모 엠블럼은 18년 전쯤 ‘우영미를 입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생각하다 만든 거예요. 제가 미술 관람을 좋아하거든요. 우영미를 입는 남자라면 혼자서도 갤러리를 찾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빈 액자 프레임을 떠올렸죠. 실제로 제 사무실에 빈 액자가 걸려 있어요. 수시로 바라보며 그 네모 틀 안에 뭔가를 넣었다 뺐다하는 상상을 즐기죠.”
우 디자이너는 지난해 봄 서울 구의동에 6층짜리 건물을 짓고 쏠리드 사옥을 이전했다. 세계3대 디자인 어워드 중 하나인 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 2023’ 본상을 수상할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1층에 마련한 아카이브다. 수십 개의 행거에는 1988년 ‘솔리드 옴므’를 론칭할 때부터 차곡차곡 모아놓은 컬렉션 의상 5000여 점이 걸려 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지금의 인기를 누리는 이유도 오랜 시간 끊임 없이 이어진 장인정신과 진화의 역사를 간직한 아카이빙 때문이다. “단단한 브랜드가 되려면 기본이 확실해야죠. 그러려면 현재 내 모습이 네모난지 세모난지, 시대에 따라 어떤 방향성을 갖고 변화해왔는지 수시로 자신을 들여다 봐야 해요. 어떤 유행이나 흐름에도 나를 잊지 않고 계속 성장하고 진보할 수 있는 길이죠.” 서양적이면서 동양적인, 특별하면서도 부담 없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그래서 결국은 ‘우영미다운’ 옷이 매번 탄생하는 이유다.
파리=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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