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용적인 ‘세도남’ 스타일, 파리 패션계 홀리다

서정민 2023. 7. 1.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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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진출 21년 패션 디자이너 우영미
‘우영미’ 2024 SS 패션쇼와 의상. [사진 쏠리드]
# 6월 21일, 팔레 드 도쿄, 솔리드 옴므

블루·블랙 톤의 편안한 바지와 점퍼, 재킷과 셔츠, 니트 스웨터와 반바지를 입은 남자들이 무대에 등장했다. 포마드를 발라 단정하게 넘긴 머리에 금속 테 안경과 넥타이를 착용한 복고풍의 모델들은 어딘가 고집스러워 보이지만,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은 자유로운 ‘현대의 도시 남자’를 연상시킨다. 2024 SS ‘솔리드 옴므’의 컨셉트는 전통적인 워크 웨어와 스트리트 웨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실용성과 스타일을 강조한 것이다.

# 6월 25일, 샤이요 국립극장, 우영미

이번 시즌 ‘우영미’ 컬렉션은 제주도에서 영감을 얻었다. 해녀들의 잠수복을 연상시키는 스킨 스쿠버 소재 의상과 수산물을 담아두는 테왁망사리를 연상시키는 가방 등이 눈에 띈다. 바닷속을 유영하는 해파리는 프린트와 귀걸이 등의 액세서리로 등장했다. 특유의 테일러링이 돋보이는 수트 사이로 캐주얼한 오버사이즈 테크 웨어와 애시드 워싱 데님들도 보인다. 1653년 조선시대 때 제주도에 표류했던 하멜이 현재의 제주도로 시간 이동해 테크노파티를 벌인다면 이런 의상을 입지 않았을까.

디자이너 브랜드로 매출 1000억 달성

‘우영미’ 2024 SS 패션쇼와 의상. [사진 쏠리드]
17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파리의 명품 백화점 봉 마르셰 지하 1층은 남성복 전문 매장이다. 브루넬로 쿠치넬리, 제냐, 폴 스미스, 버버리, 발렌시아가 등 내로라하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의 매장이 즐비한 곳에서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한국의 남성복 브랜드 ‘우영미(WOOYOUNGMI)’ 단독 매장이다. 여러 브랜드가 모인 편집매장에선 ‘솔리드 옴므(SOLID HOMME)’도 만날 수 있다. 바로 옆 행거에는 릭 오웬, 아크네 스튜디오, 사카이 등의 브랜드들이 위치해 있다. ‘우영미’ 브랜드는 2021년 봉 마르셰 남성관 매출 1위를 기록한 바 있다.

파리 패션계에서 ‘마담 우’는 유명 스타다. 한국인 최초로 루이비통·에르메스·디올 등 명품 하우스들이 속해 있는 프랑스패션협회 정회원이 됐고,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포진한 파리 생토노레 거리에 ‘우영미’ 매장 입성을 앞두고 있다. 이제 겨우 네 번의 쇼를 치렀을 뿐인데 ‘솔리드 옴므’는 반응이 좋아서 오는 9월 봉 마르셰에서 단독 팝업을 열 예정이다. 컬렉션 때마다 ‘우영미’와 ‘솔리드 옴므’ 쇼의 스타일링을 책임지는 스타일리스트도 펜디·폴 스미스 쇼의 스타일링을 도맡아 하는 거물이다.

‘우영미’ 2024 SS 패션쇼와 의상. [사진 쏠리드]
누군가는 “영화계에 박찬욱·봉준호가 있다면 패션계에는 우영미가 있다”고 한다. 물론 이 모든 영광스러운 결과가 단숨에 이뤄지진 않았다. 파리패션위크에서 ‘우영미’ 쇼를 처음 열고 21년이 흘렀다. “다시 이 길을 가라면 못할 것 같아요. 얼마나 힘들고 고독한 시간이었는지 뼈저리게 기억하고 있으니까요. 등산화만 겨우 신고 열심히 길을 개척하면서 산에 올랐는데, 요즘의 한류 열풍 덕분에 관광버스 타고 지금 위치까지 단숨에 오른 줄 알면 섭섭한 마음도 들어요.”(웃음)

‘마담 우’가 보여준 21년간의 열정과 집요함은 파리 패션계가 인정하는 바다. 코로나19로 파리패션위크 오프라인 쇼가 모두 중지되고, 디지털 영상으로 쇼를 대체했을 때도 우 디자이너는 파리에 있었다. 당시 ‘우영미’의 마케팅 전략 팀장과 홍보·마케팅 책임자, 이렇게 달랑 여자 셋이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서 옷을 가득 실은 40개의 박스를 옮겼다고 한다. 당시 아시아에선 유일하게 파리를 찾은 디자이너였다. “파리패션위크에서 보여줄 무대를 서울에서 디지털 영상으로 대체하는 게 성에 안 찼어요. 제대로 보여주고 싶었으니까. 코로나도 겁 안 날만큼 쇼 생각밖에는 없었으니 참 무모했죠.”(웃음)

지난달 26일 ‘우영미’ 패션쇼를 찾은 세계적인 뮤지션 트로이 시반과 함께 촬영중인 우영미 패션 디자이너. [사진 쏠리드]
시간과 정성은 배신하지 않는 법. 우영미 디자이너가 대표로 있는 회사 쏠리드는 ‘솔리드 옴므’ ‘우영미’를 통해 지난해 999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년대비 38%, 4년 전보다 2배 넘게 성장한 숫자다.

파리에서 론칭한 ‘우영미’는 현재 영국·이탈리아·런던·일본·홍콩 유명 백화점 등에 40개 매장을 갖고 있다. 글로벌 브랜드로 인지도를 먼저 쌓은 우영미가 국내 젊은 층에서 인기를 누리기 시작한 것은 7~8년 전부터. 새롭고 유니크한 브랜드를 찾는 젊은이들 눈에 ‘우영미’가 눈에 띈 것이다. 국내 판매 수량이 많지 않자 해외 온라인 사이트를 통해 구매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얼마 전에는 국내 명품 온라인 쇼핑몰이 해외 바이어들에게 ‘우영미’ 구매대행을 부탁한 일까지 있었다. SNS에는 “홍콩 가서 ‘우영미’ 사왔다”는 인증샷이 수시로 올라온다.

사옥 아카이브에 의상 5000점 모아

‘솔리드 옴므’ 2024 SS 의상. [사진 쏠리드]
남성복에서 최고의 요건은 ‘테일러링’이다. 입었을 때 몸에 착 감기듯 핏감이 좋아야 하고, 실루엣은 부드럽게 떨어져야 한다. 우 디자이너의 테일러링 감각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여기에 깔끔한 로고와 독특한 네모 엠블럼을 추가해 요즘 젊은이들이 원하는 세련된 도시 남자 스타일을 완성시킨다.

“네모 엠블럼은 18년 전쯤 ‘우영미를 입는 남자는 어떤 남자일까’ 생각하다 만든 거예요. 제가 미술 관람을 좋아하거든요. 우영미를 입는 남자라면 혼자서도 갤러리를 찾을 거라고 상상하면서 빈 액자 프레임을 떠올렸죠. 실제로 제 사무실에 빈 액자가 걸려 있어요. 수시로 바라보며 그 네모 틀 안에 뭔가를 넣었다 뺐다하는 상상을 즐기죠.”

‘솔리드 옴므’ 2024 SS 의상. [사진 쏠리드]
‘상상’은 우 디자이너가 즐기는 영감의 원천이다. “우영미·솔리드 옴므를 입은 남자를 늘 상상하는데 매번 바뀌죠.(웃음) 젊었을 때는 넘어져도 절대 울지 않는 강한 남자를 상상했는데 나이가 들면서 남자에 대한 판타지도 변하더군요. 남자도 여자랑 똑같구나, 힘들면 우는구나.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하지, 남자냐 여자냐는 중요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인간에 대한 아량이 생긴 거죠.” ‘우영미’ 컬렉션에 여성복이 등장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여성스러운 디테일을 좋아하는 남자, 남성스러운 실루엣을 사랑하는 여자. 요즘 MZ세대의 패션 트렌드다.

우 디자이너는 지난해 봄 서울 구의동에 6층짜리 건물을 짓고 쏠리드 사옥을 이전했다. 세계3대 디자인 어워드 중 하나인 독일의 ‘iF 디자인 어워드 2023’ 본상을 수상할 만큼 아름다운 건축물도 화제였지만, 무엇보다 의미 있는 것은 1층에 마련한 아카이브다. 수십 개의 행거에는 1988년 ‘솔리드 옴므’를 론칭할 때부터 차곡차곡 모아놓은 컬렉션 의상 5000여 점이 걸려 있다. 글로벌 명품 브랜드들이 지금의 인기를 누리는 이유도 오랜 시간 끊임 없이 이어진 장인정신과 진화의 역사를 간직한 아카이빙 때문이다. “단단한 브랜드가 되려면 기본이 확실해야죠. 그러려면 현재 내 모습이 네모난지 세모난지, 시대에 따라 어떤 방향성을 갖고 변화해왔는지 수시로 자신을 들여다 봐야 해요. 어떤 유행이나 흐름에도 나를 잊지 않고 계속 성장하고 진보할 수 있는 길이죠.” 서양적이면서 동양적인, 특별하면서도 부담 없는, 원칙을 지키면서도 새로운, 그래서 결국은 ‘우영미다운’ 옷이 매번 탄생하는 이유다.

파리=서정민 기자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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