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의 녹는 시계와 핑크 플로이드 노래 몽환적 조화 [문소영의 영감의 원천]
[영감의 원천] 미디어아트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
20세기에 한국에서 드물게 라스베이거스식 쇼를 선보이던 60년 역사의 워커힐 호텔 대극장이 ‘빛의 시어터’로 바뀐 것은 지난해였다. 세월의 흐름과 인기 문화 장르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아니었나 싶다. ‘빛의 시어터’는 제주도 ‘빛의 벙커’에 이어서 국내기업 티모넷이 프랑스 기업 컬처스페이스와 다시 한 번 협업해서 만든 곳이다. 컬처스페이스는 ‘빛의 채석장’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명화를 재창조하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빛의 시리즈’를 선보여왔다.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는 ‘빛의 시어터’의 두 번째 상영작으로 지안프랑코 이안누치 아트디렉터가 기획했다.
달리의 다양한 작품이 핑크 플로이드의 음악과 함께 펼쳐지는 이 미디어아트 작품에서 하이라이트는 역시 가장 유명한 ‘기억의 지속’(1931)이 등장하는 부분일 것이다. 정확히는 달리가 ‘기억의 지속’을 바탕으로 1950년대 중반에 새롭게 그린 ‘기억의 지속의 붕괴’를 바탕으로 한 장면이다. 당시 그는 원자력에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원자력 발전소를 상징하는 수많은 직사각형 블록과 함께 자신의 대표작을 다시 그렸다.
왜 달리 시계는 늘어져 있을까
이 그림은 꿈속의 풍경처럼 도무지 시공간을 짐작할 수 없다. 비록 멀리 보이는 절벽은 달리의 고향인 스페인 카탈루냐의 해안을 모델로 했지만, 전체적으로 마치 외계 행성 같다. 그 황량하고 무한한 풍경에서, 딱딱한 회중시계가 흐물흐물 늘어져 흘러내리고 금속 시계 케이스가 마치 썩어가는 고기처럼 개미 떼를 불러모은다.
‘기억의 지속’을 소장한 뉴욕 현대미술관(MoMA)은 달리의 말을 인용하여 이렇게 설명한다. 화가는 이 그림을 극도의 정밀함으로 그렸는데, 그것은 오히려 “혼란을 체계화하여 관람객이 현실의 세계를 완전히 불신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이 그림에서 우리가 신뢰하는 ‘객관적이고 규칙적인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달리의 말대로 시간을 상징하는 시계가 “시간의 카망베르 치즈”가 되어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그림 한가운데 자리잡은 짐승의 시체 같기도 하고 외계 유기체 같기도 한 것은 잘 보면 달리의 잠든 옆 얼굴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여기에도 늘어진 시계, 혹은 시간이 맥없이 걸쳐져 있다.
이 그림에 대한 해석 중 하나는 달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깊은 감명을 받아서 공간과 시간의 상대성을 나타냈다는 것이다. 즉 시간이 고정적이거나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주관적이며 관찰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생각을 표현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해석은 꿈속에서는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것을 나타낸 그림이라는 것이다. 꿈속에서는 몇 시간, 며칠이 흘렀는데 깨어보면 단 몇 분 잠들었던 경험을 해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 경험을 바탕으로 이 그림을 보면 시계가 엿가락처럼 늘어나는 게 직관적으로 이해가 가며 친근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훗날 이 그림의 ‘흘러내리는 시계’를 차용한 여러 광고나 영화 등을 보면, 시간이 주관적으로 몹시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장면에서나 판타지적으로 일상적인 시공간이 뒤틀리는 장면에서 차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떤 평론가들은 달리가 시간의 주관적인 흐름보다도 그저 시계처럼 단단하고 기계적인 사물이 부드럽고 흐물흐물하게 늘어지는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한다. 이들 평론가들은 이것이 달리가 젊은 시절 몹시 고민했던 성적 불능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달리가 성적 불능으로 인해서 신경쇠약까지 시달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그를 구원해준 것이 바로 달리의 수많은 그림의 모델이 된 그의 영원한 뮤즈이자 아내인 갈라 달리(1894-1982)였다.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는 ‘레다 아토미카’(1947-1949) 등 달리가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르네상스 명화 스타일과 자신의 원자물리학에 대한 관심을 결합한 그림들을 보여준다. 이 그림들의 모델도 모두 한 사람, 갈라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달리의 영원한 뮤즈 갈라
갈라가 스타였던 이유는 총명하고 두려움이 없으며 자기 주관이 뚜렷한 성격인 데다가 연애에서는 뜨거움과 차가움을 오가는 미스터리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그전에 성적 불능으로 인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던 달리는 갈라와 연애하면서 육체적으로는 몰라도 (달리는 이후에도 계속 자신이 성적 불능이라고 주장하고 다녔다.) 적어도 정신적으로는 확실히 안정을 찾았다는 것이 미술사학자들의 정설이다.
미혼인 달리가 유부녀 갈라와 사랑에 빠진 것에 대해 스페인에 있는 달리의 가족은 분노했고 그 외에 여러 이유로 달리의 아버지는 마침내 그를,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호적에서 파버렸다. 그러나 이 커플을 둘러싼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은 놀라지도, 비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자유연애를 추구했고 이미 갈라와 남편 폴 엘뤼아르는 여러 혼외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갈라는 남편을 떠나 달리와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러나 정식 결혼 후에도 정조의 의무는 달리만 지켰고 갈라는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갈라는 매우 지배적인 성격이었다는데, 그것이 달리에게 맞았는지도 모르겠다. 충돌도 없지는 않았다지만 말이다. 하지만 갈라는 달리가 세계적인 예술가로 성장하는 데 큰 공헌을 했다. 달리의 수많은 그림을 위해 모델을 섰을 뿐 아니라 여러 조언을 주었고, 달리의 매니저 역할을 하면서 뛰어난 기획과 프로모션 능력을 발휘했다. 그래서 달리는 갈라가 “내가 가진 모든 것의 소유주”라고 했다.
미디어아트 ‘달리: 끝없는 수수께끼’에는 달리의 고향인 스페인 피게라스에 세워진 달리 극장-미술관의 내부를 재현한 시퀀스도 있다. 달리가 직접 디자인한 곳이며, 세상을 떠난 후 묻힌 곳이기도 하다. 미술관의 통념에서 벗어나 마치 초현실주의 테마파크 같이 현란한 곳으로서, 달리의 별명 ‘쇼맨’에 참 잘 어울리는 곳이다.
‘쇼맨’이라는 별명은 달리에 대한 복합적 시각을 함축한다. 그가 한때는 천재적으로 독창적이었으나 점차 “달러에 환장한” 진부한 흥행사로 전락했다고 보는 앙드레 브르통(초현실주의 창시자 시인) 같은 이들의 시각이 있다. 반면 추상과 순수성에 치우친 20세기 전위미술계에서 구상화와 각종 퍼포먼스 및 새로운 매체를 실험하고 광고 같은 대중적·상업적 영역을 넘나듦으로써 팝아트 등 포스트모던 아트에 영감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아무튼 그가 미술사에서 가장 따분하지 않은 미술가 중 하나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문소영 기자 sym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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